"어제 우리는 최초의 흑인 하원의장을 선출할 수 있었습니다."
하원의장 선출 과정 사흘째를 맞은 1월 5일 7차 표결에 앞서 공화당 댄 비샵 의원이 아쉬운 듯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공화당 케빈 매카시 원내대표의 하원의장 선출에 반대하던 20명 강경파 의원 중 한명으로, 흑인 동료의원인 바이런 도널즈 의원을 하원의장으로 추천했다.
이에 앞서 매카시를 하원의원 후보로 지명하는 연설은 또 한 명의 흑인 초선의원인 존 제임스(John James)가 맡았다. 제임스는 "매카시의 리더십 덕분에 공화당 내 흑인 하원의원의 수는 지난 회기에 비해 두 배가 되었다"고 강조했다. 현재 공화당 하원의원(222명) 중 흑인 의원은 4명이다.
지난주 하원의장에 당선된 매카시는 연방하원에 입성한 2007년 "영 건스 (Young Guns)" 프로그램을 출범시켰다. 부통령 후보 그리고 하원의장을 지낸 폴 라이언, 그리고 다수당 원내대표를 지낸 에릭 캔터와 함께 매카시는 촉망받는 보수진영의 젊은 지도자로 평가받았다. 당시 이들의 비전은 유능하고 젊은 후보들을 발굴하고 지원해야 세제개혁과 작은 정부를 실현하는 공화당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폴 라이언과 에릭 캔터는 예상치 못한 당내 강경파의 도전에 정계에서 은퇴했지만, 끝내 의장에 오른 매카시는 "영 건스" 프로그램의 새로운 초점으로 여성, 소수인종, 이민자 및 재향 군인 (veterans) 후보 영입을 추가했다. 그 결과 2021년에 시작된 117회기에서는 비백인 초선의원 16명 중 9명이 공화당 소속이었다. 이 중에는 한인 영 김 의원과 미셸 스틸 의원도 포함된다.
역사상 가장 다양성이 확보된 118회기 美 의회에서 공화당 강경파가 내세운 흑인 하원의장 후보
1월 초 개원한 118회기는 인종과 문화권 구분을 기준으로, 미국 역사상 가장 다양한 의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상·하원을 합쳐 비백인 의원은 총 133명으로 전체 의원들의 약 25%를 차지한다. 여성의원의 비율 또한 28%를 웃돈다. 미국 전체 인구 분포에 비하면 대표성이 불충분한 수치지만, 20년 전과 비교했을 때는 두 배에 달한다. 하원의원만 보자면 흑인 53명, 히스패닉 46명, 아시아·태평양계 14명, 아메리칸 인디언 및 알래스카 원주민 4명, 그리고 다인종으로 구분되는 의원 4명 등으로 나타난다. 또 공개 성소수자 의원의 숫자도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이들 중 공화당 소속은 다섯 명 중 한 명 꼴이지만, 지난 10여 년간 공화당 소속 의원들의 인종과 문화적 배경은 빠른 속도로 다양해지는 추세다.
흑인 초선의원 존 제임스 외에도, 매카시를 의장 후보에 지명하는 연설을 할 기회는 재선의원 마이크 가르시아와 초선 후안 시스코마니에게도 주어졌다. 두 사람은 모두 히스패닉계일 뿐만 아니라, 2020년 대통령선거에서 바이든이 우세했던 지역구를 대표하는 공화당 의원이다. 시스코마니는 멕시코 이민가정 출신으로, 그의 부친은 미국에 정착한 이후 평생 시내버스 운전을 해왔다는 점을 자주 소개한다. 그는 2022년 중간선거 기간 "영 건스" 프로그램에 선정된 후보 중 공화당에서 가장 부각한 인물이었다.
새 회기 첫 주부터 공화당 지도부에서는 이런 의원들에게 기회를 적극적으로 주었다. 프리덤 코커스에서 의장 후보로 내세운 바이런 도널즈 또한 잘 알려지지 않은 재선의원으로, 총 15차례 표결 중 8차례나 두 자릿수의 지지표를 얻어 유례없는 주목을 받았다.
이를 두고 민주당 코리 부시 의원은 "바이런 도널즈는 역사적인 의장 후보가 아니다. 그는 소품이다. 흑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백인우월주의를 지키고 유지하는 정책 어젠다를 지지한다. 그의 이름이 후보군에 있다는 것은 발전이 아니다. 한심하다"라고 비판했다. 공화당에 대한 이런 비판이 제기된 것은 이번뿐이 아니다. 지난 2019년 2월, 하원 감독·개혁위원회 청문회에서 라시다 틀레입 의원도 비슷한 문제제기를 했다. 해당 청문회에서 트럼프 백악관에는 흑인 여성 보좌관이 있다는 점을 근거로, "트럼프 대통령은 인종 차별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러자 틀레입 의원은 "비백인 (person of color), 흑인 직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그 사람을 인종주의자가 아닌 것으로 만들어주지 않는다. 그런 말을 한다는 사실자체가 인종주의적이며, 그게 아니라고 증명하기 위해 흑인 여성을 소품으로 사용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부시와 틀레입 의원은 "진보 진영의 티파티," "좌파의 프리덤 코커스"로 비견되는 일명 스쿼드 (The Squad) 소속이기도 하다. 수평적인 관계를 지향하는 비공식 조직이지만, 사실상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 (AOC) 의원이 이끌고 있다. 때문에 틀레입 의원의 발언에 분개한 트럼프 지지자들은 AOC와 다른 스쿼드 소속 의원들에게 온라인 공격을 퍼붓기도 했다. 이에 AOC는 "우리는 우리 팀이 얼마나 다양한지 과시할 목적으로 그들 (비백인 보좌관과 동료)을 내세우지 않고, 그 사실을 인종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처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건 '토크니즘'"이라고 맞섰다.
토크니즘이란? 개인의 정체성은 다층적이다
토크니즘 (tokenism)이라는 개념은 1950년대에 생겨나 1960년대 민권운동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1962년 여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 시리즈에서 중심적으로 다뤄지는 주제 중 하나로, 당시 그는 백인 전용 학교나 일터에 흑인 학생이나 노동자 한두명을 허락하는 행위를 토크니즘의 전형적인 예시로 들었다. 토크니즘은 정치권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매스 미디어, 기업 조직, 일상에서도 스스로 인종주의자가 아니라는 증거로 빈번하게 사용된다.
토크니즘의 또 다른 폐해는 그 대상자의 정체성을 특정 단면으로만 압축하는 데에 있다. 개인의 정체성은 비단 피부색이나 문화권, 또는 종교, 언어, 장애, 출신 국가, 나이, 성별, 성적지향 등의 속성 중 일부로만 정의되는 것이 아니다. 콜럼비아 로스쿨과 UCLA 로스쿨에서 동시에 교수직을 맡고 있는 민권 법학자 킴벌리 크렌쇼 (Kimberlé Crenshaw)는 1989년 에세이 "인종과 성별 교차의 주류성 회복: 반차별이론, 페미니스트이론, 반인종주의 정치에 대한 흑인 페미니스트 비판"을 통해 교차성 (intersectionality)의 개념을 소개한다. 그는 흑인 여성이 차별 피해를 받은 세가지 판례를 통해, 법 제도에는 한 개인이 흑인인 동시에 여성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고려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즉 한사람이 인종차별과 성차별 등 복수의 차별 피해를 받을 수 있는 만큼 모두의 정체성 또한 성별, 계층, 인종 등을 포함해 다층적임을 알린다.
위에 언급한 부시, 틀레입, AOC 등도 미국에서 권력층에 속하는 연방의원 신분임에도 비백인, 여성, 그리고 (또는 혹은) 젊다는 점만 부각되면서 다른 의원들에 비해 집중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개인의 사회적 또는 경제적 성공이 구조적 불평등을 타개하는 해법이 되지 못한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지난 2022년 중간선거에 연방 하원에 출마했던 알렉산드라 헌트도 비슷한 부당한 경험을 겪었다. 그는 출마선언을 하며 대학시절 생계유지를 위해 스트리퍼로 일한 과거를 당당히 밝혔다. 이를 통해 언론의 많은 주목을 받을 수는 있었지만, 그의 공약이나 비전에 대한 본질적인 논의 보다는 "스트리퍼"라는 자극적인 단어 위주로 소비됐다. 그는 두 개의 공공보건 석사 학위를 취득한 연구자로 필라델피아 지역 저소득층의 의료접근성 강화 활동, 여성의 재생산권리 보장 활동, 또 여성 및 취약계층 대상 의료지원 활동을 활발하게 이어오고 있는데, 이런 모습은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모든 비백인 또는 소수자들이 단순히 "토큰" 또는 소품처럼 소비되고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렇게 일반화하는 것은, 그들의 주체성을 부정함과 동시에 그들의 정체성을 특정 부분으로만 제한하는 위선적인 접근일 것이다. 이 소수자들이 공화당의 전부를 대표하지 않듯, 그들이 속한 인종이나 문화권 또는 종교의 전체를 대표하지 않는다.
트럼프가 밀었던 허셀 워커의 낙선, '토크니즘'을 보여주는 사례
지난 2022년 중간선거에서 조지아 상원의원에 출마했던 공화당 허셀 워커 후보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조지아 대학 미식축구 선수 시절 전설적인 활동을 이어나갔던 그는 트럼프가 직접 선택한 후보라는 점에서 선거 1년 전부터 전국적인 이목을 끌었다. 접전 끝에 12월 초까지 이어진 결선 투표에서 낙선한 뒤, 그의 아들은 트럼프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1999년생 크리스천 워커는, 그의 아버지가 출마 선언하기 전부터 틱톡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 일종의 시사 논평 컨텐츠를 꾸준히 생산하고 있는 Z세대 보수 활동가다. "우리 공화당원들은 '정체성 정치' (identity politics)를 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미식축구 외에는 아무 경험이 없는 사람을 단지 경쟁 후보와 같은 피부색을 가졌다는 이유로 출마시켰다"며 다른 일반적인 공화당 후보였다면 선거에서 승리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허셀 워커의 경우처럼 관련 경험이 전무하고 의미 있는 어젠다 없이 단순히 유명세나 피부색 같은 표면적인 이유만으로 정치 활동의 기회가 주어졌거나, 본인이 소수자라는 정체성을 이유로 속한 커뮤니티를 모두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스스로를 토큰으로 만드는 행위와도 같다. 흑인, 히스패닉, 아시아계, 한인, 이민자, 성소수자, 퇴역군인, 청년 등 그들이 속한 커뮤니티 또한 평면적이고 획일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흑인 사회 안에서도 코리 부시 의원처럼 노동자 계층이자 진보적인 여성이 존재하고, 존 제임스 의원처럼 보수적이고 젊은 나이에 경제적 성공을 이룬 남성이 함께 존재한다. 다만 개인마다 본인 정체성을 정립하는 속성 중 우선순위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미국 정치권의 다양성 증진을 위한 노력이 아직은 단발적으로 소수자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고자 하는 수준인 것은 사실이다. 이런 변화의 핵심에 도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공화·민주 양당에서 소수자 후보 영입을 늘리려는 노력이 앞으로도 지속되기를 희망한다. 동시에 소수자 유권자들 또한, 이런 움직임을 보다 비판적인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다. 표면적인 변화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고서는 그저 상징적인 발전에 발목 잡힐 것이다. 정치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하워드 진은 이렇게 말했다: "변화는 불가피성이라는 바퀴에 실려 오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투쟁을 통해 다가온다."
저스틴 트루도 캐나다 총리는 2015년 첫 임기를 시작할 때부터 내각 구성에 남녀성비 동률을 원칙으로 적용할 것을 선언했다. 지금까지 그 공약을 실행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나아가 비백인 여성과 캐나다 원주민, 이민자 등 또한 적극적으로 내각에 임명하고 있다. 유럽연합 (EU) 또한 2026년부터 회원국 내 상장 기업의 이사회 구성에 있어 최소 40%를 여성으로 기용할 것을 의무화할 예정이다.
궁극적 목표는 외적인 생김새만 시민을 닮는 것 아니라, 각계각층의 다양한 경험과 견해를 대표하고 반영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20년 사이 소수자 연방의원의 숫자는 양당과 양원을 합쳐 두 배나 늘어났지만, 미국 내 소수자들의 권리 보장이 그만큼 강화된 것은 아니다.
진정한 대표성은 외모가 아니라 공통된 일상의 경험과 문제의식의 공유에서 나온다. 킴벌리 크렌쇼 교수는 2016년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널리 확산된 다양한 시민운동의 움직임을 분석하며 "이끄는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볼 게 아니라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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