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칠레의 한류 팬덤을 통해 중남미에 한발짝 다가갈 수 있는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2022년 한국과 중남미 15개국이 수교 60주년을 맞았지만 한국과 중남미의 지리적·문화적 거리는 여전히 멀다. 그러나 지구 반대편 칠레에도 케이팝과 한국드라마를 사랑하는 팬들이 있고 오늘날 칠레는 가히 라틴아메리카 한류의 메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1년부터 2020년까지 모두 15회의 MUSIC BANK World Tour 중 2회가 2012년과 2018년 칠레에서 있었고, 2022년에는 세번째 녹화가 진행될 예정이다. 2019년에는 SM Town Live가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열려 이웃 나라에서까지 몰려든 팬들로 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칠레의 한류팬덤은 엘리트 층의 백인 지배 문화 속에서 비백인, 비서구 문화형식이 도입, 소비, 협상되는 흥미로운 예를 제공한다. 칠레 한류팬덤에 대한 기존 연구에서 드러나듯, 보이는 팬들의 대부분은 중하류층 소녀들이고 케이팝을 좋아하는 남성팬들은 게이로 오해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상류층에도 분명 숨겨진 케이팝과 드라마 팬들이 있다. 칠레 한류 팬덤은 하위문화를 통한 현상이기 때문에 고전적인 팬덤의 정의와 꼭 부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칠레의 한류 팬들은 케이팝을 해석하고 재창조하는 과정을 통해 나름의 방식으로 한국대중문화를 즐기는 중이다. (필자)
2022년 한국과 중남미 15개국이 수교 60주년을 맞았지만 한국과 중남미의 지리적·문화적 거리는 여전히 멀다. 사람들은 때로는 마약과 폭력으로, 때로는 살사와 탱고로 중남미를 그린다. 상상 속 중남미에는 빈곤, 마약, 폭력, 열정, 체 게바라부터 미인대회와 마초미 넘치는 남성들까지 온갖 환상이 넘친다.
중남미에는 33개국이 넘는 나라가 있고 대부분이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그러나 중남미에는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은 브라질, 영국, 네덜란드 등 서구의 각축장이었던 카리브해지역도 있다. 또한 스페인어를 쓰는 지역 내에서도 인디오 거주 비율과 유럽 이민에 따라 스페인어 사용과 문화에 차이가 있다. 이 중 칠레는 한국 최초의 자유무역협정 (FTA) 체결국이다. 한국은 칠레 최초의 자유무역협정 아시아 파트너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낯선 나라 칠레. 긴 나라, 와인과 연어가 유명한 나라, 혹은 2019년 지하철 요금 50원으로 대규모 시위가 발발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을 때 중남미에서 정치경제적으로 가정 안정된 나라에서 무슨 일인가 하는 호기심 정도가 한국에서 알려진 칠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구 반대편 칠레에도 케이팝과 한국드라마를 사랑하는 팬들이 있다. 이 글은 칠레의 한류 팬덤을 통해 중남미에 한발짝 다가갈 수 있는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16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 칠레를 비롯한 중남미 대부분의 지역은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약 5세기에 걸친 식민 지배 기간 동안 칠레는 현재 페루의 리마 부왕령에 속한, 정복자들이 꿈꾸던 황금이 나지 않는, 그저 변방일 뿐이었다. 그러나 독립 이후 태평양전쟁(1879-1883)에서 이웃 페루와 볼리비아에 승리를 거두고 광물 자원의 보고인 북부 사막지역을 차지하면서 이후 정치적, 경제적 발전을 이룰 토대를 다졌다. 피노체트 군사 독재 정권 (1973-1990) 기간 동안에는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여 신자유주의 모델의 모범생으로 불릴 정도로 눈부신 경제적 발전을 이루며 2010년 중남미 최초로 OECD에 입성했다. 그러나 동시에 식민시대부터 이어온 전통적인 신분과 경제적 격차 (2020년 기준 불평등지수 44.9)는 더욱 견고해졌고, 이는 2019년 10월 이후 지속되고 있는 시위의 근원이기도 했다.
역설적이게도 신자유주의는 칠레의 사회경제적 약자들에게 인터넷을 통해 다른 세상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이 틈을 비집고 K-pop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오늘날 칠레는 가히 라틴아메리카 한류의 메카가 되었다. 2011년부터 2020년까지 모두 15회의 MUSIC BANK World Tour 중 2회가 2012년과 2018년 칠레에서 있었고, 2022년에는 세번째 녹화가 진행될 예정이다. 2019년에는 SM Town Live가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열려 이웃 나라에서까지 몰려든 팬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칠레를 비롯한 중남미의 한류는 아시아와 북미 등 여타 지역과는 도입 시기와 발전면에서 차이가 있다. 또한 중남미 지역 내에서도 나라마다 한류가 알려진 시기와 드라마, 케이팝, 영화 등 선호도에 나름의 특색이 있다. 공식적으로 중남미에 한류가 처음 소개된 때는 2002년 멕시코, 칠레, 페루, 브라질에 한국드라마가 방영되면서부터다. 그러나 방영시기는 국가마다 매우 산발적이고 이후 드라마 소개도 간헐적이었다. 일부 소수 팬들만의 눈요기거리라는 세평을 벗어난 인기다운 인기는 10여년이 지나 <꽃보다 남자>가 방영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물론 그 사이 2005년도에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나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 등은 영화 마니아들의 사랑을 받았다. 2007년 칠레현대미술관에서 한국현대미술전 <Peppermint Candy>을 개최했을 때 당시 박물관 소장 베아트리스 부스토스 (Beatriz Bustos)는 그 해 최고의 전시라며 한국미술을 칭송하기도 했다. 일부 학자들은 한국드라마가 중남미에서 성공할 수 있는 이유로 한국의 감성이 중남미와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중남미에서 생산되는 드라마의 내용을 고려해보면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 한국드라마는 줄거리도 흥미로우면서 온 가족이 보기에도 적절한 내용이라는 점이 차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칠레에서 한류의 인기는 케이팝이 단연 주축을 이룬다. 칠레에서 케이팝이 조용히 인기를 끌며 케이팝 안무를 따라하는 커버댄스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주로 Super Junior, 동방신기, 소녀시대, 빅뱅이 팬층을 이끌었다. Super Junior 커버댄스 그룹 Blue Boy는 자체 팬클럽까지 생길 정도였다. 커버댄스를 즐기는 팬들은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 곳곳에서 춤을 추었다. 2011년 KBS는 신동을 닮은 Blue Boy 멤버의 일상을 보도했고 중남미 주재 한국대사관들은 앞다투어 커버댄스 그룹을 대상으로 케이팝콘테스트를 개최했다.
2012년 칠레 몇몇 공영 방송과 케이블 TV에서 <천국의 계단>, <이브의 모든 것>. <겨울소타나> 등과 같은 한국드라마가 방영되었다. 칠레와 페루에서 JYJ의 공연이 열렸고 공연장을 가득 매운 대부분의 팬들은 십대 소녀들이었다. 한국언론에서는 중남미에 부는 케이팝 열풍에 대해 보도했고, 심지어 공연을 보도한 길거리 신문은 칠레 주요 일간지로 소개되었다. 같은 해 전세계를 강타한 <강남스타일>의 인기는 칠레도 예외가 아니었다. 비록 <강남스타일>이 칠레 사회에 케이팝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만을 심어주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칠레를 비롯한 중남미에 케이팝을 널리 알린 것은 확실하다. MUSIC BANK 녹화에는 칠레 전역 및 심지어 이웃 나라에서도 팬들이 몰려들었다. TV 드라마의 경우 일반적으로 주위 사람들로부터 줄거리를 들었거나, 매회 챙겨보기 힘든 경우가 많지만, 케이팝의 경우는 가사를 몰라도 리듬을 즐기고 안무를 따라하는 재미가 있어 칠레 대중들에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이제는 케이팝팬층과 선호하는 그룹이 다양해지고 연령층의 폭도 넓어졌다.
지난 20년 동안 세계화는 칠레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이 과정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한국 대중문화는 초국가적 글로벌 문화 현상으로 칠레에 자리 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이팝으로 대변되는 한국대중문화는 인기와는 별개로 칠레 사회 전반에서 부정적 이미지로 비치는 경우가 많다. 케이팝을 좋아하면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이상하다”는 취급을 받기도 한다. 칠레 한류팬덤에 대한 기존 연구에서 드러나듯, 보이는 팬들의 대부분은 중하류층 소녀들이고 케이팝을 좋아하는 남성팬들은 게이로 오해를 받기도 한다. 이는 칠레 및 중남미 사회의 유럽중심주의와 모든 아시아인을 중국인으로 가늠하는 Chinoism에 기인한 탓이기도 하다. 그러나 상류층에도 분명 숨겨진 케이팝과 드라마 팬들이 있다. 주변화는 오히려 팬들로 하여금 소셜미디어라는 공간을 활용해 더 큰 유대감을 형성하고, 이러한 유대감은 2019년 시위 당시 케이팝 팬들의 커버댄스 시위로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2020년 글로벌 기업 펩시 칠레지사는 K-Pepsi Chile라는 케이팝 아이돌 모방 그룹을 만들어 자사 제품을 광고했다. 춤과 노래에 재능이 있는 5명의 칠레 케이팝 남성팬을 모집해 한국어, 영어, 스페인어가 섞인 케이팝 스타일의 음악을 선보였다. K-Pepsi Chile 광고에는 칠레가 생각하는 케이팝의 주요 구성 요소, 즉, 안무, 미학, 남성성, 테크놀로지, 가사, 언어 등이 나타난다 (Min, 2022). 칠레 한류 팬덤은 하위문화를 통한 현상이기 때문에 고전적인 팬덤의 정의와 꼭 부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칠레의 한류 팬들은 케이팝을 해석하고 재창조하는 과정을 통해 나름의 방식으로 한국대중문화를 즐기는 중이다.
유럽인 듯 아닌 듯, 스페인과 독일의 영향을 모두 받은 칠레. 칠레 팬들에게 언어는 중요하지 않다. 팬들은 K-pop에 맞춰 춤을 추며 하루하루의 행복을 찾는다. 비록 좋아하는 만큼 말로 다 표현하지는 못해도, K-pop이든 일본 음악이든, 중국 음식이든, 다 chino가 아닌가 헷갈려도, 팬들은 K-pop을 사랑한다. 대학생들은 수업시간에 K-pop을 좋아하냐고 물으면 시치미를 떼지만, 모르는 척 칠레 팬들 사이에 유행하는 K-pop을 틀어주면 기쁜 표정을 숨기지 못한다. 칠레의 한류팬덤은 엘리트 층의 백인 지배 문화 속에서 비백인, 비서구 문화형식이 도입, 소비, 협상되는 흥미로운 예를 제공한다. 칠레 사회에서 한국 대중문화는 더이상 온전히 새롭거나 이국적이지 않다. 앞으로 이들의 한국대중문화 사랑이 어떻게 이어질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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