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장의 유연안정성(flexicurity)은 2000년대 이후 많은 복지국가에서 새로운 노동시장과 사회정책의 방향으로 제시되어 왔다. 유연안정성은 노동시장에서 유연성(flexibility)과 안정성(stability)이 양립할 수 없다는 기존의 인식을 깨고 양자를 조화시키고자 한 아이디어인데 많은 복지국가에서 2000년대 이후 노동시장 정책방향의 표준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유연안정성은 종종 정치권과 언론에서 노동시장정책의 대안으로 논의되고 있다. 우리나라 노동시장은 매우 불안정한 노동의 비중이 높으면서도 동시에 일부 안정된 부문과 그렇지 않은 부문 사이의 격차가 크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 편으로는 노동시장의 안정성을 제고해야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격차를 해소해야 하는데 유연안정성이 그 유력한 방향으로 꼽히고 있다.
유연안정성의 개념과 접근의 다양성
유연안정성이라는 불가능해 보이는 조합의 핵심은 유연성과 안정성 개념을 다차원적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유연성을 '해고의 자유', 안정성을 '평생직장'으로 개념화한다면 양립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유연안정성론에서는 유연성과 안정성을 모두 다차원적으로 사고한다. 노동의 유연성 안에는 해고의 자유를 의미하는 '외부적-수량적 유연성' 뿐만 아니라 생산량에 따라 노동시간을 신축적으로 활용하는 '내부적-수량적 유연성', 기업 내에서의 인력 배치전환이나 이동을 통해 변화하는 수요에 대응하는 '기능적 유연성', 유연한 임금제도를 통해 경제상황에 따라 임금부담을 조정하는 '임금 유연성' 등이 포함된다. 노동의 안정성은 하나의 직장에 오래 머무를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하는 '일자리 안정성' 외에 직장을 이동하더라도 지속적으로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고용 안정성', 일자리의 전환이 일어나더라도 소득을 안정시킬 수 있는 '소득 안정성', 일·가정 양립과 같이 유급노동과 다른 활동의 결합 가능성을 통해 확보할 수 있는 '결합 안정성' 등으로 세분할 수 있다.
덴마크와 네덜란드는 유연안정성 모델 사례로 손꼽히는 대표적인 두 나라다. 이 중 덴마크의 '황금삼각형(Golden Triangle)' 모델은 외부적-수량적 유연성을 허용하되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을 통해 '고용 안정성'을 확보하고, 두터운 실업급여를 통해 '소득 안정성'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유연안정성에 접근한 사례다. 네덜란드의 방식은 이와 다르다. 네덜란드는 정규직에 대한 두터운 고용보호를 유지함으로써 '일자리 안정성'을 보장하는 대신, 시간제 노동을 확대함으로써 '내부적-수량적 유연성'을 확보하고 시간제 노동에 대한 사회보장제도의 적용을 통해 '소득안정성'도 어느 정도 보장하였다. 두 국가는 공통적으로 다양한 유연성 차원 중 일부와 이와 병립 가능한 안정성 차원 중 일부를 조화시켜 유연안정성을 달성했지만 그 모델은 완전히 다르다. 이 점은 유연안정성이 하나의 모델이 아며 내적 다양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유연안정성 모델을 유럽 국가들의 표준적 노동시장 전략으로 제안했던 유럽위원회(EU Commission)가 발간한 연구와 보고서에서는 국가마다 유연안정성을 위한 경로가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한 바 있다. 유럽 국가들과 현저히 다른 환경에 있는 한국의 경우는 더욱 그를 것이다. 요컨대 한국에서의 유연안정성은 한국의 상황에 기초해야 한다.
한국에서의 유연안정성: 유연안정성에서 안정유연성으로
그렇다면 한국에서의 유연안정성은 어디에서 출발해야 할까? 그간 우리나라 유연안정성 논의를 주도해온 이들은 우리나라 노동시장에서 해고의 자유가 부족하다고 지적하며, 그 예시로 대기업 생산직과 공공부문을 든다. 이른바 '노동귀족'과 '철밥통'이다. 실제로 OECD 국가들의 고용보호를 수치화하여 비교한 고용보호법제(Employment Protection Legislation, EPL) 지수를 보면 한국의 정규직 고용보호는 OECD 중상 정도로 보호가 엄격한 편이다. 이렇게 보면 '해고의 자유', 유연안정성의 용어로 말하면 '외부적-수량적 유연성'을 높이는 것이 우리나라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의 핵심인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법적 규제와 노동시장의 실질에는 차이가 있다. 고용보호가 엄격하다면 한 직장에서 머무는 기간 역시 비교적 길어야 하는데, 우리나라 임금노동자들의 평균 근속기간은 2021년 기준 6년에 불과하다. 이는 2020년 기준의 OECD 평균(10.1년)은 물론 해고가 자유로운 노동시장으로 널리 알려진 덴마크(7.7년)보다 더 짧은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정규직만의 평균 근속기간 역시 8년 1개월에 불과하다. 근속기간이 훨씬 더 짧은 비정규직을 제외한 평균근속도 OECD 국가들의 전체 노동자 평균근속보다 짧은 것이다. 법제도와 달리 현실에서의 우리나라 노동시장은 매우 높은 수준의 '외부적-수량적 유연성'이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법적 제도와 노동시장 현실의 괴리가 나타나는 것은 법제도를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 노동시장 관행 때문이다. 노동시장에 대한 연구들은 어떤 노동시장의 현실은 법제도 자체보다는 노동시장 관행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고 보고해왔다. 우리 노동시장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불법파견, 산업재해 은폐, 최저임금 미만 노동, 사회보험 미가입 등의 문제는 모두 법제도의 미비 보다는 법제도가 관철되지 않는 노동시장 관행에서 비롯된다. 고용보호법제와 평균근속기간의 괴리에도 유사한 문제가 작용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유연성과 달리 우리 노동시장의 안정성은 어떤 기준으로도 높다고 보기 어렵다. 짧은 평균근속기간은 '일자리 안정성'이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직을 통해 더 나은 고용조건으로 이동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좀 더 흔한 경우는 고용이 불안정하여 불가피하게 이동하거나 오히려 더 낮은 고용조건으로 이동하는 경우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낮은 일자리 안정성을 '고용 안정성'이나 '소득 안정성'으로 보완하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과 실업자 소득보장 정책이 충분히 발전해야 하는데 우리의 상황은 그렇지도 못하다. 지난 수년 간 정부가 고용서비스, 직업훈련 등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전국민 고용보험을 중심으로 한 실업자 소득보장 정책의 강화를 위해 어느 정도의 노력을 해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와 같은 정책이 불안정 노동자들의 고용 안정성이나 소득 안정성을 실질적으로 높이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상황이며, 이는 이 영역의 정책들에 대한 공적 지출 수준이나 보장 수준을 국제 비교한 연구들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요컨대 한국의 노동시장은 법적 현실과 달리 가장 대표적인 유연성 유형인 '외부적-수량적 유연성'은 높고, 반면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안정성은 모든 면에서 낮은 상황이다. 이 점은 한국에서 유연안정성을 구현하기 위한 방향의 출발점이 '유연성'보다 '안정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에 있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유연안정성'이 아니라 '안정유연성'이 필요하다.
내부적 유연성의 제고를 위한 과제들
그렇다면 노동시장의 '격차' 문제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외부적-수량적 유연성'이 평균적으로 높다고 해서 노동시장의 모든 부문이 유연한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노동시장은 흔히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로 불리는 노동시장 내 격차가 큰 편이고, 실제로 '경직되었다'고 볼 수 있는 내부 노동시장도 분명히 자리하고 있다. 문제는 노동시장의 '외부적-수량적 유연성'을 제고하기 위한 법적 유연화 조치는 이들에게만 배타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일자리 유연성을 높이기 위해 국내외에서 이루어진 기존의 조치들은 애초의 의도와 달리 이미 불안정한 이들만 더 불안정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노동시장의 안정된 부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법제도 뿐 아니라 노동조합이나 노사 간의 관행 등에 의해서도 보호받지만, 불안정한 부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시장의 전반적인 유연화가 기업의 '좋은 일자리' 창출을 용이하게 함으로써 기존의 불안정한 노동이 더 좋은 일자리로 취업하기 용이해질 것으로 기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고용보호의 전반적 완화로 인한 불안정성 증가보다 훨씬 더 간접적인 효과이며, 고용보호가 일자리 창출의 유일한 조건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면 조심스럽게 고려할 가능성이다.
노동시장 격차에 좀 더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은 내부적 유연성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최근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내부적-수량적 유연성'에 해당하는 근로시간의 유연성과 '임금 유연성'에 해당하는 임금제도 변화다. 각각 '유연근로제도의 확대'와 '직무중심 임금체계로의 전환'으로 대표되는 이 두 차원의 유연성은 최근 새 정부의 노동시장 개혁방향의 핵심을 이룬다.
이 두 차원의 유연성은 모두 해고-채용과 관련된 외부적 유연성이 아닌 고용을 유지하는 상태에서 형성될 수 있는 내부적 유연성이기에 노동시장 전반의 불안정성을 높이지 않으면서 유연성을 제고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여기에 특히 직무 중심 임금체계로의 전환은 우리나라 노동시장 격차의 핵심인 기업 간 임금격차를 완화하여 '동일노동 동일임금'에 가까워질 수 있는 방안이기도 하다. 기존의 연공임금제도의 혜택을 보는 노동자들이 노동시장의 안정된 부문에 종사하는 소수라는 점, 그리고 연공임금 부담이 기업이 비정규직을 확대해온 원인 중 하나라는 점에서도 개혁의 방향으로서 상당한 타당성이 있다.
다만 내부적 유연성의 제고에서도 고려해야 할 문제는 많다. 우선 근로시간 유연성의 경우 현재 OECD 최고 수준으로 축소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총 근로시간 축소라는 대원칙을 훼손할 가능성이 있으며, 기간에 따른 노동시간의 급격한 증감이나 야간노동 등은 노동자의 건강권을 위협할 수 있다. 직무중심 노동시장으로의 전환을 위해서는 노사 간 신뢰와 협력에 기초하여 직무분석과 직무평가가 공정하게 이루어지고, 노동시장 환경 변화에 맞게 직무가 적절하게 설정되어야 한다. 노동자 입장에서 임금은 가장 중요한 조건이기에 임금제도 변화의 과정이 노동자들을 배제한 채 이루어진다면 이를 수용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한대로 직무중심 임금체계가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격차 완화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기업 내에서가 아니라 기업 외부에서 기업 횡단적 직무 노동시장의 형성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직무분석과 평가를 둘러싼 노사 간 협력이 기업 수준이 아닌 산업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지금 당장의 우리나라 노동시장에서 쉽게 달성하기 어려운 조건들이다.
노동시장 개혁을 위한 해묵은 숙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유연하고 안정적인 노동시장'이라는 이상은 단지 법제도를 바꾸거나 '노동귀족'을 공격한다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앞서 살펴볼 것처럼 노동시장의 구조적인 변화는 노동시장 행위자 간 신뢰와 협력에 기초한 공동의 노력을 필요로 하며, 이와 같은 과정이 없다면 어떤 법제도의 변화도 노동시장 관행이라는 벽을 넘기 어렵다. 결국 지난 수년간 실패해온 노사정 협력이라는 해묵은 과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가 문제다.
새 정부는 노동정책이 부족하다는 비판 속에서도 근로시간 유연화와 직무·성과 중심 임금체계라는 방향만큼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제들이 실현되기 위한 조건들에 대한 신중한 검토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정부가 일방적으로 개혁의 방향을 정하고 노동시장 행위자들이 일방적으로 이를 따라오기를 요구하는 방식으로 개혁이 실현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본다면 내부적 유연성 증가를 위한 '노동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에 앞서서 노동시장 안정성 제고를 위한 조치들을 선제적으로 강화해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앞서 논의한 것처럼 우리 노동시장에 필요한 것은 '유연안정성'보다 '안정유연성'일 뿐 아니라 노동시장 안정성 제고를 위한 조치는 노동개혁에 나서는 정부에 대한 노동시장 행위자들, 특히 노동조합의 신뢰를 높일 수 있는 방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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