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복지국가인가?
돌이켜보면 1990년대 이후 우리나라의 사회복지는 전반적으로는 불만족스러웠지만, 간헐적인 비약을 동반하면서 양적, 질적으로 꾸준히 발전하는 양상이었다. 더디게 느껴졌지만, '이렇게 우리도 복지국가로 가는구나.' 하는 일종의 '한국판 복지국가 컨센서스' 분위기가 있었다. 새로운 복지제도를 만들어내는 정치적, 운동적 노력이 존중받던 행복한(?) 시대였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2000년대 초반에는 '한국도 복지국가인가, 그렇다면 어떤 복지국가인가?' 하는 논쟁이 사회복지학계에서 활발해질 정도로 우리 복지도 성장했다.
하지만, 주지하듯이 이후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사회적 곤경은 계속 양상을 바꾸면서 결코 나아지지 않았고, 국내외적 정치, 경제 상황도 끊임없는 위기의 연속이었다. IMF 경제위기를 극복하자마자 신빈곤, 양극화 현상에 더하여 저출산, 고령화 위기가 본격화 되었고, 세계금융위기를 거쳐, 촛불과 탄핵 그리고 코로나19 사태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르렀다. 결국 복지국가는 1회적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위기와 도전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깨달음이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한때 선망의 대상이었던 서구의 선진 복지국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임을 목도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복지국가인가 하는 물음은 이제 큰 의미는 없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복지국가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을 극복해나갈 수 있는 믿음직스러운 대응기제와 방향성, 주체의 형성 등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제는 현실에 대한 성찰에 기반한다.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주장들이 가능하겠지만, 필자는 우리나라의 사회복지가 더 발전하기 위해서 시민참여의 부재(혹은 저조)라는 상황을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복지제도의 발전, 그러나 충족되지 않은 욕구들
우리나라 복지제도의 발전은 괄목할 만하다. 2000년경 의료보험 통합과 국민연금 전국민 확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시행, 그 이후 기초연금과 아동수당, 장애인연금 등을 도입하면서 소득보장제도를 상당 수준으로 확립하였고,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를 위시하여 무상보육, 아동돌봄, 장애인 활동지원제도, 커뮤니티 케어 등의 사회서비스를 확충해나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와 같이 괄목할만한 복지발전을 인정할 수 있지만, 아직도 소득보장의 사각지대가 광범위하고, OECD 최고 수준의 노인빈곤율과 자살율, 불평등 확대, 부동산 폭등과 청년들의 좌절감, 세계 최저의 출산율, 장애인들의 절망적인 투쟁 등 국민들의 전반적인 삶의 질과 행복추구라는 측면에서 부족한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나아가 부동산 문제, 그리고 아직도 노동자들이 '결사투쟁'을 해야만 하는 상황 즉, 시장에서의 일차적 분배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는 한계도 존재한다.
이러한 현상은 1970~80년대 서구 복지국가의 위기를 반추하게 된다. 복지국가 위기는 1970년대 초 중동전쟁과 석유파동 그리고 그로 인한 서구 복지국가들의 재정위기가 주된 내용이지만, 이와 더불어 당시의 주요 사회변화 즉, 저출산과 고령화, 이민자 증가, 실업과 양극화, 고학력사회화로 인한 스트레스 등의 새로운 사회적 위험들의 증가에 대해 기존의 복지국가가 무력함을 드러내는 현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복지국가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무력했던 것은 한편으로 국가 규모의 팽창으로 인한 관료주의와 그에 따른 복지사각지대의 확산, 다른 한편으로 복지수급자들의 의존성(오남용) 증가에 기인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즉, 복지에 대한 재정 지출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복지제도의 민감성과 체감도가 떨어지는 현상이다. 우리 사회의 취약계층들도, '열심히 하고 있다'는 정부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복지제도를 체감하기 어렵다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모든 정책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복지정책의 체감도가 떨어지는 것은 정책의 내용 자체에도 결함이 있겠지만, 시민들의 관심이 높지 않은 점도 중요한 요인이다. 특히 정책결정과 집행 과정에서 시민들이 소외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인 상황은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정책과정에서 소외된 시민들
우선은 정책 결정의 비정치화 현상이다. 복지정책이 활발하게 확대되고 있었던 1990년대에는 시민사회운동이 정책 확대를 견인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기초생활보장제도는 물론, 의료보험 통합과 국민연금 시행 등 중요한 정책 과제들이 시민사회운동의 추진력에 힘입어 속속 입법되거나 시행되었다. IMF 경제위기 상황에서는 시민사회운동이 실업극복운동에 직접 뛰어들어 사회적 경제 운동의 단초를 형성하였고, 이후 자활지원사업 등 제도권 사회복지실천에 대거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 이후 시민사회운동의 영향력은 급속히 추락하였다. 여기에는 우파 시민운동의 출현 등 다양한 요소들이 있겠지만, 복지정책 측면에서는 제도의 복잡성 즉 재정추계나 효과성 또는 효율성 평가 등의 기술적이고 전문적인 요소가 중시되고 복잡한 제도 설계와 관련된 세부 내용들이 부각되는 데 반비례하여 시민들의 관심도가 줄어드는 '복지이슈의 탈정치화' 현상이 확대된 것이다. 결국 복지정책이 시민의 관심사 뒤편에서 일부 전문가들과 기술관료들의 주도로 입법되고 실행되는 상황이 보편화되었다. 간혹 TV에 비춰지는 복지이슈들도 시민들은 친근하게 접근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 결과 연금개혁과 같은 중요한 이슈들이 너무 손쉽게 보류되곤 한다.
보다 근본적으로 복지국가의 국가 주도적 성격과 시민의 '수급자화' 경향도 지적할 수 있다. 서구 역사를 보면 복지국가는 협동조합운동 등 민중의 자구적 사회경제운동이 제도화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국가 주도적 프로젝트의 성격을 강화하게 되고, 그 반대급부로 시민 참여가 약화된다는 점이다. 즉, 나라마다 상황은 다양하지만, 발달된 복지국가도 관료주의와 급격한 사회적 변화에 대한 대응의 어려움과 더불어, 국가 주도적 성격으로 인한 시민참여와 소외문제 등 나름의 한계를 안고 있고, 그 결과 복지제도의 민감성 하락과 비효율성 그리고 결정적으로 '시민의 수급자화(수동성)'를 결과한다는 것이다. 시민은 '무기력해야 즉 불쌍하게 보여야' 수급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힐러리 코탐의 저서 <래디컬 헬프(radical help)>(박경현·이태인 옮김, 착한책가게 펴냄)는 복지현장을 배경으로 이러한 상황을 실감나게 비판하면서 대안적 노력을 제시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시민이 소외된 정책 결정과 집행구조가 문제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도 있고, '2% 부족'한 것이 얼마나 큰 균열을 가져올 수 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정책 과정에서 시민참여의 결여가 딱 그렇다. 현재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들은 정책 분야마다 각종 시민참여 위원회들을 구색 갖춰 운영하고 있다. 지자체마다 지역복지협의체도 구성되어 있다. 문제는 이러한 위원회들이 공식적인 결정권도 거의 없지만, 관료들의 주도로 운영되고, 참여자들도 해당분야 전문가와 이해관계자들로 한정되고, 나아가 기관장이나 관료들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로 대부분 구성된다는 점이다. 일선 복지기관장이나 종사자들도 참여하고 있지만, 정부의 보조금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목줄을 쥐고 있는 관료들과 대등하게 정책 현안을 논의하기도 대단히 어렵다.
참여 부재 문화는 개별 복지기관들에도 만연되어 있다. 일선 복지기관들에서 직원과 이용자들이 기관의 주요한 의사결정에 활발하게 참여하는 구조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렇게 된 중요한 이유는 기관의 권력이 과도하게 편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행 사회복지사업법 등에 의하면 복지기관은 주로 복지법인들이 설립하는데, 복지법인 이사회가 기관의 모든 권한을 독점하는 구조이다. 특히 직원들은 1997년 법 개정에 의해, 기관장 외에는 해당 복지법인의 이사가 될 수 없도록 되어있다. (이는 1963년 사립학교법 제정 당시, 교수나 직원들은 학교법인 이사가 될 수 없도록 규정한 것과 유사하다. 역사적으로 대학의 중심이라고 평가되는 교수들 그리고 총장조차 현행법상으로는 학교 운영에서 법적인 권한을 거의 갖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직원들조차 주인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주민들이 복지기관의 주체로 참여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전향적인 법 개정이 필요하다.
시민단체들도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시민단체들은 정부의 권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자임하고 있지만, 대부분 시민단체들은 전문가 혹은 직업적 활동가 중심으로 운영되기 일쑤다. 관심 있는 일반 시민들의 참여를 통해 보다 대중적인 여론을 조직하는 일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결론을 대신하여
'시민없는 시민운동'이 가능치 않듯이 '시민없는 복지국가'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가능한 분야부터, 가능한 지자체부터 시민참여를 실질화 하는 노력이 다시 시작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좀 더 개방적이고 적극적으로 복지분야별(노인복지, 장애인복지 등)로 관심 있는 시민들을, 정책에 대해 토론하고 논의하면서 개혁을 모색하는 정책공동체로 모아내는 작업이 일어날 필요가 있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민주시민을 훈련하는 중요한 장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단체장의 의지에 따라서는 상당히 빠른 진척도 가능할 것이다. 이를 위한 권한 배분 등 현재의 시민참여예산제도를 넘어서는 과감한 노력이 일어나길 바란다.
또한 시민참여의 고취를 위해 2000년대 이후 부상하고 있는 사회적 경제운동을 유력한 파트너로 고민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시민의 자발적인 경제적 활동을 통해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사회적 경제 운동은 풀뿌리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시민참여와 훈련의 장이 될 수 있고, 기존의 복지 인프라와 결합하면 상당한 시너지 효과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2012년 협동조합기본법이 제정되면서 수 만 개의 협동조합들이 빠른 시간 내에 조직되었던 경험을 볼 때(물론 모두가 활성화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에 내재하고 있는 시민사회의 잠재력은 결코 작지 않다.
*내가만드는복지국가는 의제별 연대 활동을 통해 풀뿌리 시민의 복지 주체 형성을 도모하는 복지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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