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노동기구(ILO)의 연차총회인 국제노동대회(International Labour Conference)가 지난 11일 끝났다. 오는 9월로 임기를 마치는 가이 라이더 ILO 사무국장은 올해로 110번 째를 맞은 이번 총회가 "대단한 성과를 수확했다"고 평가했다. 후한 평가의 배경에는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환경"을 '일의 기본원칙과 권리에 관한 ILO 선언'에 기초한 기본협약의 지위로 변경한 총회의 결정이 자리하고 있다.
ILO는 1998년 총회에서 △결사의 자유와 단체교섭권의 실질적 보장, △강제노동의 금지, △아동노동의 철폐, △동등 가치의 일에 대한 동등 보수와 고용상 차별금지 등 4개 기준을 '일의 기본원칙과 권리(fundamental principles and rights at work)'로 선언한 바 있다.
ILO 기본협약이 된 안전보건 국제기준
1998년 선언에서 ILO는 회원국 정부의 관련 협약들에 대한 비준 여부에 상관없이 모든 나라와 모든 사업장에 이를 실현한다는 '기본협약화' 입장을 공식화했다. 그리고, 그 실행을 위해 각 기준과 관련하여 2개 협약씩을, 따라서 4개 기준과 관련하여 모두 8개 협약을 기본협약(Fundamental Conventions)으로 결정하였다.
올해 총회에서 직업안전보건(occupational safety and health) 기준에 관련된 협약들 가운데 155호 '직업안전보건' 협약과 187호 '직업안전보건 체계증진' 협약을 기본협약으로 결정함으로써 '일의 기본원칙과 권리'에 관련된 기준은 4개에서 5개로, 관련된 기본협약은 8개에서 10개로 늘어나게 되었다.
협약 155호는 직업안전보건 정책을 수립할 국가의 의무와 노동자의 안전보건을 증진할 사용자의 책임을 규정한다, 협약 187호는 노사정 3자의 협의에 기초한 사회적 대화를 통해 직업안전보건 문제를 일관되고 체계적으로 다룰 정책과 체계(framework)를 수립할 국가의 의무를 규정한다.
안전보건 국제기준의 핵심은 노동자와 노조의 참여
노무현 정권 말기인 2008년 2월 대한민국 정부가 비준한 155호와 187호 두 협약의 핵심 내용은 직업안전보건 정책을 만들고 직업안전보건 체계를 세울 때 정부와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하지 말고,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참여시켜 함께 하라는 것이다.
ILO 본부가 있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총회에 직접 참석한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한국 정부가 산재 예방을 위해 안전보건관리체계를 구축하고 구체적인 로드맵을 마련할 예정"이라며 "이번 총회에서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조건'을 노동기본권으로 포함하려는 시도는 매우 시의적절하다"면서 155호와 187호 두 협약의 '기본협약화'를 지지했다.
이러한 이 장관의 연설은 평가할만한 일이다. 왜냐하면, 상대적으로 '친노동'으로 평가받는 노무현-문재인 정권 하의 고용노동부 장관들도 국제노동기준과 관련해서는 대개 소극적인 입장을 견지했기 때문이다. 노동자를 위한 부서인 고용노동부 장관이 노동자를 위한 국제노동기준을 지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으나, 정권의 성격과 상관없이 그러한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한 장관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일까. '반(反)노동'의 시각에서 이정식 장관의 ILO 총회 참석에 시비를 거는 기사가 눈에 띈다. <중앙일보> 김기찬 기자가 쓴 '화물연대 파업 와중에…"표 어렵게 구했다" 출국한 고용장관'이라는 제목의 '취재일기'가 그것이다.(☞ 바로 가기) 노동전문을 자처하는 김 기자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일관되게 '반노동'의 입장에서 노동 관련 기사를 써왔다. 흥미로운 점은 김 기자가 장관 후보로 거론될 때부터 이 장관을 비난하는 기사를 연거푸 써오고 있다는 점이다.
<중앙일보>가 이정식 장관을 '까는' 이유
이번 제네바 출장을 두고도 "3일간의 제네바 일정(입출국 포함 5일)이라고 해봐야 총회에 3~4분 연설하고, 의례적으로 ILO 사무총장을 면담하는, 딱 두 건이 고작이다. 그곳에서 한 연설 요지도 산업 안전 로드맵을 마련하겠다는 정도다"라고 비난했다.
국제연합(UN) 산하 기구인 ILO는 '노사정 3자주의(tripartism)'라는 독특한 의사결정 구조를 갖고 있다. 매년 6월 열리는 총회엔 ILO 187개 회원국의 노사정 대표가 참가하여 각자의 입장을 연설로 밝힌다. 회원국 수도 많고 정부 대표만이 아니라 노사 대표도 연설해야 하므로 연설 시간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3~4분만 할당된다.
또한 김기찬 기자가 '사무총장'이라고 잘못 표기한 ILO 사무국장(Director-General)은 ILO의 총책임자다(UN 체계에서 사무총장, 즉 Secretary General은 UN 총책임자 한 명뿐이다). 고용노동부 장관이 ILO 총회에 가서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하여 연설하고 그 조직의 총책임자를 만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는 김 기자가 "고작"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진짜 이유는 "안전보건 문제가 노동자에게는 권리요 사용자에게는 책임"임을 천명하고 "사업장 안팎의 안전보건정책을 만들거나 안전보건체제를 만들 때 노동조합과 반드시 협의해야 한다"는 내용의 국제노동기준을 이정식 장관이 ILO 총회에서 지지하고 나섰기 때문일 것이다.
OECD 최고 수준의 산업재해 사망률
산업재해 사망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뉜다. 사고로 인한 사망과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 그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중에서 사고로 인한 산업재해의 10만 명당 사망률은 우리나라가 4.6으로 콜롬비아(18.0), 멕시코(8.2), 터키(7.5)에 이어 4위다.
이번 ILO 총회에서 기본협약으로 범주가 변경된 155호와 187호 협약을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에 비준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일하다 다치고 병들고 죽는 '헬조선'의 현실은 지난 15년 동안 바뀐 게 별로 없다.
두 협약 모두를 비준한 나라들의 사망률은 대부분 대한민국보다 현저히 낮다. 벨기에 1.3, 핀란드 1.1, 체코 2.0, 노르웨이 1.1, 스웨덴 0.7, 스페인 1.8, 덴마크 1.4다. 심지어는 두 협약 중 하나만 비준하거나 하나도 비준하지 않는 나라들의 사망률도 대한민국보다 낮다. 전자로는 오스트리아 2.5, 캐나다 2.9, 칠레 3.1, 독일 0.8, 프랑스 3.5, 네덜란드 0.5, 영국 0.3이 대표적이다. 후자로는 폴란드 1.1, 미국 3.7, 스위스 1.4, 이스라엘 2.0, 이탈리아 2.1이 대표적이다.
국제 비교로 드러난 대한민국의 현실은 세 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첫째 정부와 노동법학계가 주장해온 '선 입법-후 비준' 주장과 달리 입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는데도 비준을 감행했을 가능성, 둘째 입법을 제대로 하고 비준을 했지만 입법된 내용이 현장에 제대로 집행되지 않았을 가능성, 셋째 비준만 이뤄진 채 입법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집행도 제대로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그것이다.
협약과 법률과 집행의 일치가 필요
'화물연대 파업'이라는 중요한 현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쁜 시간을 쪼개 제네바를 다녀온 이정식 장관의 ILO 총회 연설이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빛을 발하려면 대한민국 정부가 2008년 2월 비준한 155호 '직업안전보건' 협약과 187호 '직업안전보건 체계증진' 협약에 맞게 입법이 제대로 이뤄졌는지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비준된 협약과 입법된 법령의 내용에 맞게 현장에서 집행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도 점검해야 한다.
고용노동부가 발간한 '2020 산업재해현황분석'을 토대로 업무상 사고로 인한 사망률 4.6에다가 업무상 질병으로 인한 사망률 6.2를 합치면, 대한민국의 10만 명당 산업재해 사망률은 10.8로 OECD 회원국 중에서 최악의 수준이다.
OECD 회원국의 업무상 사고로 인한 사망률 평균은 대한민국 4.6의 절반 수준인 2.7이다.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 문제에서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앞서라는 요구는 하지 않겠다. 하지만 OECD 평균 수준으로 산업재해 사망률을 떨어뜨릴 수 있는 실질적 방안을 찾는 것이 시간을 쪼개 ILO 총회를 다녀온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의 정책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