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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태극기 부대'를 이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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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태극기 부대'를 이해할 수 있을까?  

[김창훈 칼럼] 태극기 군중의 심리 고찰

몇 년 전 국회 앞에서 일인 시위를 하던 중에, '태극기 부대'인 60대 여성과 대화를 한 적이 있다. 그와 대화를 하고 나서 많이 놀랐다. 당시만 해도 태극기 부대를 특정 세력이 돈으로 동원한 정치용역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박근혜에 대한 지지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듯했다. 또한 나름의 식견도 있었다. 한동안 필자는 부유하게는 전혀 보이지 않는 중년 여성이 이념적 박근혜 지지자로 등장한 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한국 사회에서 최초로 등장한 대중적 우익세력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태극기 우익에 대해서 여러 측면에서 분석될 수도 있다. 먼저 사회경제적 곤경이 사람들을 우경화시킨 핵심요인으로 보는 입장이다. 힘든 사람들이 우경화되는 현상은 역사에서 종종 발생하는 일이다. 그러나 힘들기 때문에 좌경화되는 경우도 많기에 경제적 분석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철학자 문성훈(서울여대)은 논문 '태극기 군중의 탄생에 대한 사회 병리학적 탐구'에서 태극기 군중이 보이는 행동을 '심리적 징후'라고 해독한다. 단순한 물질적 보상에 대한 좌절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들은 "국정농단이 밝혀져도, 헌법재판소가 대통령직을 파면하고 그 죄상이 법정에서 낱낱이 드러나도" 지지를 철회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경제가 안 좋아서 자신의 삶이 별로여서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수준이 아닌 것이다. 이들의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 문성훈은 에리히 프롬의 '근대화의 역설'이란 개념을 끌어들인다. "인간은 근대에 이르러 전통 사회를 지배했던 모든 구속과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영위할 수 있는 독립적 개인이 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개인은 자유를 만끽하며 자신의 모든 잠재력을 개발하고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절대적 권위체에 복종하려는 성향을 보인다. 이것이 근대화의 역설이다."

제도와 환경으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인간은 다시금 스스로를 절대적 존재에 복속시킨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 자유를 넘어서는 불안감이 개인을 엄습해 왔기 때문이라는 것이 프롬의 분석이다. 상기 논문의 한 문장이다. "중세의 인간은 신분제도, 봉건제도, 교회 제도가 만들어낸 사회질서의 일부로서,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이미 사회적 권위에 따라 결정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다." 구속은 존재했지만 인간은 자신이 어떻게 살아갈지 알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불안감은 크지 않았다.

구속은 존재하되 나름 안정적이었던 사회는 자본주의 발전, 종교개혁, 시민혁명 등을 거치면서 붕괴한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존재적 정당성을 하나님이 아니라 이윤에서 찾게 했다. 종교개혁은 특히 교회라는 공동체의 매개를 인정하지 않고 신과의 단독대면이라는 상황을 만들었다. 시민혁명이 촉발한 사회적 격변은 더욱 개인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발전이기도 했지만 개인이 감당하기에 너무 힘든 상황의 연속이었다. 문성훈의 분석이다. "근대 사회에서 각 개인이 경제적 자유를 획득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자신의 능력만으로 경제적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지만, 다른 한편 근대의 개인들은 중세사회에서 얻을 수 있었던 인간적 유대와 안정감을 상실하고 고독과 불안에 빠지게 되었다." 근대의 등장은 자유와 불안감이 동시적으로 증가하는 이중의 과정이었다.

프롬에 따르면 인간은 불안에 대해 두 가지 방식으로 대응한다. 사랑과 연대를 통해 불안감을 극복하고 안정감을 확보하는 방식과 자유를 던져버리고 새로운 의존과 복종을 추구하는 방식 두 가지다. 후자의 방식은 권위주의적 종교와 나치즘의 등장을 초래했다. 이 방식은 자신을 부정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신에 의해 정해져 있다는 캘빈의 예정론은 개인의 무력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이런 무력감 위에 교회와 종교개혁가에 대한 절대적 권위가 확립되었다. 캘빈이 장악한 도시에서는 사랑 대신 무서운 형벌이 횡횡했다. 웬만한 잘못도 중형으로 처벌받았다. 한국 교회 내부에서 순종의 미덕이 강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신에 대한 부정과 강한 타자에 대한 복종은 새로운 성격유형으로 나타난다. '마조히즘'이다. 문성훈의 설명이다. "마조히즘적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은 그게 어떤 것이든 이런 힘센 존재에 복종하면서 자신도 이 힘의 일부가 된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되며, 이를 통해 자신의 삶의 의미를 확신하게 됨으로써 모든 불안감에서 벗어나게 된다." 또한 사디즘도 다르게 보일지라도 고립감, 무력감을 벗어나 타인과 일체화되려는 욕구라는 점에서 마조히즘과 동일한 기원을 갖는다. 사도 마조히즘은 기득권으로부터 배제된 계층에게 더욱 확고하게 자리 잡는다. 결국 이런 심리적 성향의 사람들은 전체주의의 토양이 된다.

▲ 박근혜 전 대통령 사저가 있는 대구 달성군 유가읍 쌍계리에서 지난 3월 18일 열린 '박근혜 대통령 귀향 환영회' 모습. ⓒ연합뉴스

'근대화의 역설'은 한국의 경우 산업화가 본격화된 70년대부터 발생하기 시작했다. 일자리를 찾아 시골 공동체로부터 나온 개인들이 도시에 모여들었다. 이들은 연고가 거의 없는 도시에서 혼자만의 힘으로 불안과 고립감을 감내하며 생존해왔다. 농촌 마을과 달리 도시는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사회였다. 한눈팔면 생존이 불안해졌다. 따라서 불안감도 극적으로 높아졌다. 이런 불안감은 종교적 권위에 대한 철저한 순종을 외치는 대형교회, 사도마조히즘이 일상의 영역으로 침투한 기업, '유신'과 '5공'으로 대표되는 전체주의를 배양했다.

이런 억압적인 위계질서를 개인들이 왜 받아들였을까? 다시 문성훈의 말이다. "사회 전체가 명령과 복종의 체계로 위계화되고 지속적 순환체계를 만들어낸다. 물론 이러한 위계 관계가 지속적으로 확대될 수 있었던 까닭은 이를 통해 개개인이 자기 혼자 행동할 때 갖는 내적 불안감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맹목적 복종과 가학적 지배가 결합되었다.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 절대적 대상은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적 신(神), 박정희와 미국이었다. 태극기 군중이 십자가와 성조기를 들고 군복을 입고 있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역설적인 사실은 산업화가 주는 혜택에서 배제된 사람들조차 이 위계의 질서에 편입되기를 강력히 원한다는 사실이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누군가를 증오하면서 지배 체제에 편입된듯한 만족감을 누리는 것뿐이다. 이들에게 지역 차별, 소수자 차별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의미 있는 작업이다. 이들의 정체성은 그냥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절대자와의 가족 로망스를 통해 형성된 정체성이다.

미디어아트 연구자 박현선은 논문'<태극기 집회의 대중 심리와 텅 빈 신화들'에서 그들의 정체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프랑스혁명 시기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계급 갈등을 새로운 문화사의 관점에서 풀어낸 <프랑스혁명의 가족 로망스>에서 린 헌트(Lynn A Hunt –역사학자)는 '가족 로망스'를 통해서 국민들이 가족이 확장된 형태로 국가 체제를 이해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정신분석학에서 도입된 가족 로망스라는 용어는 본래 '자신이 낮게 평가하게 된 부모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대체적으로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지닌 다른 사람들로 부모를 대체하고자 하는' 신경증환자의 환상을 일컫는 것이지만 여기에 국한되지 않고 사람들이 현실의 불안을 메우고 허구적인 자기정체성을 구성하는 정치적 환상의 기제로 작동한다." 박정희와 딸 박근혜에 대한 지지는 이런 환상에 기인하는 면이 크다. 그들에게 박정희, 박근혜는 남이 아닌 가족과 다름없는 존재인 것이다.

가족 로망스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한 태극기는 멜랑콜리아 과정으로 빠져든다. 프로이트의 멜랑콜리아는 죽은 자에 대한 극도의 슬픔으로 죽은 자를 개인의 삶에서 떠나보내지 못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죽은 자에 대한 애정만이 아닌 증오도 동시적으로 존재할 때 이런 양가감정적 증상이 발현한다고 한다. 다시 박현선의 말이다. "보수우익들이 과거를 애도하는 방식은 멜랑콜리아의 병리적 과정과 닮아있다. 프로이트는 <애도와 멜랑콜리아>에서 어떻게 상실을 경험한 사람이 우울증에 빠지는가를 분석한 바 있다. 정상적인 애도가 상실한 대상의 빈자리를 새로운 대상-사랑으로 채워나가며 그 아픔을 극복한다면 멜랑콜리아는 그 빈자리를 옛 것에게 바치며 잃어버린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 사회적 병리를 이해하고 극복할 수 있을까? 철학자 악셀 호네트는 상호인정의 원리를 도입해 사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하자고 한다. 대표적인 공동체주의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사회의 파편화를 가속화하는 개인주의 원리를 재편성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일본의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은 정치적, 윤리적으로 깨어있는 작은 단위의 살아있는 공동체 어소시에이셔니즘(associationism 결사체주의, 필자 주)으로 사회를 재구조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상가마다 자신의 비전을 제시하지만 그들의 비전은 너무 고원해서 우리가 지금 당장 실현해 가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태극기 군중을 이해하고 이 사회적 현상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만약 실패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더욱 어두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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