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경영과 관련하여 CSR, 즉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몰락하고 있다. 대신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를 뜻하는 ESG란 말이 유행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업의 사회적 공헌'이라는 왜곡된 번역어로 유통되어온 CSR에 대한 국제노동계의 평가는 냉정하다.
CSR은 실패했다! 왜?
얼마 전 회의에서 만난 인더스트리올 글로벌노조(IndustriALL Global Union) 케말 오즈칸 사무차장은 "전 세계적으로 CSR은 실패했다. 왜냐하면 기업의 자율에 맡겨 놓았기 때문이다"고 단언했다. 인스트리올 글로벌노조는 전 세계 제조업노조들의 국제 연합체로 조합원 5천만명을 둔 세계 최대 규모의 글로벌노조다.
지금까지 CSR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기준은 국제연합(UN)이 주도한 CSR 캠페인인 '유엔글로벌콤팩트(UN Global Compact)'였다. 이에 따르면, CSR은 네 가지 기둥 위에 서 있다. 인권, 노동기준, 환경, 반부패가 그것이다. 여기서 노동기준은 국제노동기구(ILO)의 8개 기본협약을 뜻한다.
제87호 '결사의 자유' 협약, 제98호 '단체교섭권' 협약, 제29호 '강제노동' 협약, 제105호 '강제노동 철폐' 협약, 제138호 '최저 연령' 협약, 제182호 '최악 형태의 아동노동' 협약, 제100호 '동일 임금' 협약, 제111호 '차별 금지' 협약이 그것이다.
'상류층의 사교장'으로 전락한 유엔글로벌콤팩트 한국협회
전국경제인연합회와 한국경영자총협회는 문재인 정부에서 추진한 ILO 기본협약 비준을 앞장서 반대했다. '결사의 자유'와 '단체교섭권' 협약이 비준되면 기업이 어려워진다고 선동했다 하지만 두 자본가 단체의 '대주주'들인 한국의 재벌은 '결사의 자유'와 '단체교섭권'을 약속한 유엔글로벌콤팩트에 참여한 지 오래다.
롯데칠성음료, SK E&C, 한화생명보험, KCC Glass, GS리테일, 현대글로비스, 카카오, 효성화학, SK가스, CJ 대한통운, 태광산업, LS Electric, 네이버, CJ제일제당, LG화학, 두산인프라코어, 포스코, GS칼텍스, GS건설, LG전자, SK하이닉스, 국민은행, 고려대 경영대학, 모비스, 기아자동차, 아모레퍼시픽, 신한은행, SK이노베이션, SK텔레콤, 한국가스공사, 롯데쇼핑, 우리은행, 한국전력, 대한항공, KT를 비롯해 모두 283개의 기업과 기관이 한국에서 유엔글로벌콤팩트에 참여하고 있다.
유엔글로벌콤팩트는 한국에 협회를 두고 있다. 하지만, 협회는 유엔글로벌콤팩트에 담긴 원칙과 정책을 실행하는 데 관심 없고, '유엔과 CSR'을 빙자한 상류층 사교장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한국협회는 ILO 기본협약이 사회적 관심사로 떠올랐을 때 성명서 한 장 내지 않았다.
CSR의 핵심가치, '노동기준'에 침묵한 반기문
유엔글로벌콤팩트 한국협회 홈페이지를 보면 이동건 부방그룹 회장이 한국협회장을, 반기문 제8대 유엔사무총장이 명예회장을, 이태식 전 외교부차관이 부회장을 맡고 있다.
이사로는 최신원 SK네트웍스 회장, 현천욱 김앤장 대표변호사, 우태희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 양일선 학교법인 연세대학교 이사, 권태신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 구자열 한국무역협회 회장, 문형구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박경서 전 대한적십자사 회장, 윤영선 법무법인 광장 상임고문, 진재승 유한킴벌리 대표이사, 추호석 대우학원 이사장 등이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감사로는 전창원 김앤장 변호사와 김교태 삼정KPMG 대표이사가 활동하고 있는데, 유엔글로벌콤팩트 한국협회의 '거버넌스'를 책임지는 이들 대부분은 유엔글로벌콤팩트의 핵심가치인 ILO 기본협약 비준에 반대하거나 침묵하던 이들이다.
노사정 3자로 구성된 ILO는 유엔 산하 기관으로 ILO 기준은 다름아닌 유엔 기준이며, 노동자만을 위한 기준이 아니라 3자 합의로 채택된 노사정 모두를 위한 기준이다. 하지만, 유엔사무총장을 지낸 반기문 씨가 ILO 기본협약 비준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목소리를 들은 적 없다.
한국협회 '거버넌스'의 일부는 CSR의 핵심가치인 '반부패'를 훼손하는 불법 행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계열사 6곳에서 2235억원을 횡령하고 배임한 불법을 저질러 감옥에 갔던 최신원 SK네트웍스 회장이 대표적이다. 그는 최태원 SK회장의 친족이다.
CSR의 핵심가치, '반부패'를 깔아뭉갠 최태원 SK회장
유엔글로벌콤팩트를 개인의 입신양명을 위한 사교장이나 범죄를 감추기 위한 면죄부로 활용한 사례는 최태원 SK회장에게서도 확인된다. 그는 미국 뉴욕 유엔본부의 유엔글로벌콤팩트의 이사로 활동하면서 동생인 최재원 SK부회장과 공모해 회사 자금 465억원을 빼돌리는 불법(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상 횡령)을 저질러 2014년 감옥에 갔다.
그 전인 2008년 5월 29일에도 대법원은 1조5000억원대의 SK글로벌 분식회계 사태와 관련하여 업무상 배임을 유죄로 인정하여 최태원 회장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때린 바 있다. 당시 대법원 1부(주심 양창수 대법관)는 거액의 배임 혐의가 인정되지만 개인적 이득을 취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었다는 변호인의 논리를 받아들였다.
최태원 SK회장은 유엔글로벌콤팩트의 핵심가치인 '반부패'를 유린하는 불법 행위를 저질러 법의 심판을 받던 중인 2008년 5월 13일 유엔글로벌콤팩트의 글로벌 이사에 선임되었다. 그리고 이사 선임 이후에도 회사 자금을 횡령하는 부패 행위를 버젓이 저질렀다. 최태원 SK회장이 뉴욕 유엔본부의 유엔글로벌콤팩트 글로벌 이사로 선임되었을 때 유엔 사무총장은 반기문이었다.
당시 관련 재판에서 그를 도왔던 변호사 다수가 검사와 판사 출신으로 대형 로펌인 김앤장이나 세종과 율촌 소속이었다. 1심과 2심에서는 검사 출신 변호사들이, 그리고 형이 최종 확정되는 3심에서는 판사 출신 변호사들이 부패한 재벌 총수를 변호했다.
그때 앞장섰던 김앤장 같은 대형 로펌에 속한 변호사들이 유엔글로벌콤팩트 한국협회의 지도부로 활동하는 현실은 CSR의 몰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OECD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 위반한 샤넬 코리아
기업에 의해 CSR의 근본 가치가 훼손되는 사례는 국내 기업만이 아니라 한국에 진출한 다국적기업들에서도 발견된다. 지난 주 샤넬 코리아가 '경제협력개발기구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OECD Guidelines for MNEs)'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OECD 국내연락사무소에 '제소'되었다.
'OECD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은 구속력 없는 자발적 규범이지만,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OECD가 직접 관장하는 국제기준이다. OECD는 다국적기업을 규제하는 “자발적 원칙과 기준”이자 “구속력 있는 약속”이라고 가이드라인을 평가한다.
모두 11장으로 이뤄진 가이드라인에서 샤넬 코리아가 위반했다고 문제가 제기된 조항은 제3장 '기업 정보의 공개', 제4장 '인권', 제5장 '고용 및 노사관계'에 관련된 것이다.
CSR의 출발점인 '정보 공개'를 거부하는 샤넬 코리아
OECD 가이드라인 제3장 '기업 정보의 공개(Disclosure)'에 따르면 "기업의 활동, 구조, 재무상태, 실적, 소유권, 지배구조와 관련된 모든 중대한 사항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적시에 공개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기업이 공개해야 하는 정보에는 "기업의 재무 및 경영 실적, 기업 목표, 기업의 구조와 내부 관계, 대주주 소유권 및 의결권, 이사회 구성원의 자격과 선임 과정 등 이사회 구성원 정보, 특수관계자 거래, 예측 가능한 위험요소, 종업원과 기타 이해관계자에 대한 사항, 기업지배구조 규정이나 정책" 등이 들어간다. 여기에는 "핵심 임원의 보수에 대한 정보"와 "사회 문제나 환경 문제와 관련된 비재무적 정보"도 포함된다.
OECD 국내연락사무소에 문제를 제기한 샤넬 코리아 노조에 따르면, 사측은 가이드라인 제3장에서 명시한 재무적 정보를 비밀에 붙여왔다. 또한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직장 내 성폭력 사건과 관련해서도 가해자에 대한 징계 결과는 물론 직장 내 성폭력 예방 체제 수립에 관련된 비재무적 정보까지도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조합원을 비롯해 전체 직원에게 영향을 미치는 회사의 결정 사항도 그 결과만을 달랑 통지하는 등 노동조합이 요구하는 투명한 정보 공개와 이를 위한 노력, 회사의 결정 과정과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은 외면하고 있다"고 샤넬 코리아 노동조합은 '불만'을 제기했다.
CSR의 기둥인 '노동기준'을 위반한 샤넬 코리아
노조는 샤넬 코리아가 OECD 가이드라인 제5장 '고용 및 노사관계'에 명시된 단체교섭권 보장과 차별 금지를 위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연장 근무와 휴일 근무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폐해를 시정하기 위해 이 문제를 단체교섭에서 다루자는 노조의 요구를 사측은 거부하고 있다.
또한 본사에 속한 "사무직(비조합원)은 법정 휴일에 쉬는데 어려움이 없으나 조합원이 많은 현장직은 회사의 방침 때문에 법정 휴일에 쉬지 못하는데, 이는 고용상 지위를 이유로 한 차별에 해당한다"고 노조는 판단한다.
기업 정보의 공개, 성폭력 예방 체제의 구축, 연장 근무와 휴일 근무의 협의 등에서 노동자대표의 참여를 배제하고 일방적인 경영방식을 고집하는 사측의 태도가 OECD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에 대한 심각한 위반이라는 것이다.
샤넬 코리아의 노동조합 배제
지난 20년을 풍미했던 CSR이 실패한 것은 CSR과 관련된 국제기준이나 회사 정책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앞서 살펴본 유엔글로벌콤팩트와 OECD 다국적 가이드라인에 더해 '기업활동과 인권에 관한 유엔 지도 지침(UNGP)', ILO의 '다국적기업과 사회정책의 원칙에 관한 노사정 3자 선언', 국제표준화기구가 만든 'ISO 26000' 등 다양한 국제기준이 마련되어 있다.
또한 많은 다국적기업들이 유엔과 ILO가 제시하는 국제적 의무와 원칙에 기반해 회사를 운영하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위험요소를 예방하기 위해 'OECD 책임경영을 위한 기업실사 지침(Due Diligence Guidance for Responsible Business Conduct)'에 부합하는 회사 정책과 제도를 만들겠다고 약속한 샤넬이 대표적이다.
OECD 기업실사 지침은 노동, 환경, 인권에 관련된 위험요소의 평가와 그에 대한 감사 결과를 노동조합과 공유할 것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문제들이 기업 현장에서 제대로 처리되는지 여부에 대한 피드백을 노동자대표와 노동조합에게 받을 것을 명시하고 있다.
특히 OECD 지침은 노사관계, 안전보건, 인권에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기업실사(due diligence)를 실행할 때 노동자대표 및 노동조합과 정보를 공유하고 중요한 문제에 관한 논의와 협의에 이들을 참여시키고 단체교섭에서 기업에 불만을 제기할 수 있는 절차를 수립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샤넬 코리아는 인권의 핵심 문제인 직장 내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처벌과 성폭력 예방 체제 수립에서조차 노동자대표의 참여를 허용하라는 노조의 요구를 일관되게 거부하고 있다.
노동조합 배제는 ESG의 실패로 이어질 것
SK그룹과 샤넬 코리아의 사례는 CSR이 기업의 지속 가능 경영에 기여하지 못하고 소유주나 경영진을 위한 장식품으로 전락했음을 잘 보여준다.
이들 기업은 UN과 OECD가 만든 국제기준을 기업 정책에 반영시키고 있다고 자랑한다. 하지만 현장의 사정은 딴판이다. 그 주된 이유는 기업 정책의 설계와 실행, 그 보고와 평가에서 기업의 가장 중요한 이해관계자인 노동자대표와 노동조합을 구조적으로 배제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CSR을 대신하여 떠오르는 ESG의 운명도 마찬가지다. 위험요소(risks)를 조사하고 문제점을 처리하는 기업의 거버넌스에 노동자대표와 노동조합을 참여시키지 않은 채, 회사 돈으로 포섭한 김앤장 소속 변호사같은 법기술자에만 의존한다면 ESG도 조만간 빛 좋은 개살구의 처지를 벗어날 수 없을 게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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