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걸린 아버지를 홀로 돌본 9년을 기록한 책 <아빠의 아빠가 됐다> 저자 조기현 씨가 '간병 청년' 강도영을 위한 글을 <셜록>으로 보내와서 싣는다.
안녕하세요, 강도영님. 저는 조기현이라고 합니다. 기사를 접하고 도영님에게 말을 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쓰러지면서 도영님이 겪었던 일들과 10년 전 제가 겪었던 일들이 참 많이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사를 읽는 내내 도영님이 겪은 일의 묘사와 묘사 사이에서 자주 길을 잃었습니다. 제가 겪은 과거의 어느 한 때를 계속 떠올렸습니다.
당신은 스물한 살, 저는 스무 살, 비슷한 나이에 돌봄으로 위기를 맞닥뜨렸습니다. 그 시기 남성에게 닥치는 병역 문제도 같았고 보증금과 월세의 숫자까지 본 뜬 것처럼 닮아 있었습니다. 돈이 없어서 퇴원하고 집에 온 날의 공기가 코끝에 맴도는 듯했고, 도영님이 꾼 꿈, 현실과 정반대편의 풍경을 재생하는 꿈은 저도 자주 꾸던 꿈이었습니다.
세간에 도영님에게 모여든 관심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도리를 어긴 패륜’이라는 비난이든, 연민과 동정 섞인 말이든, 도영님을 둘러싼 말들이 도영님에게 전달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도영님이 이제까지 겪었던 일들을 어떻게 소화하고 있을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쓰러진 후 고군분투하던 그 시간이 무엇이 되어있을지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도영님에게 그 시간의 의미를 스스로 되짚을 기회조차 사라진 건 아닌가 하는 우려도 들었습니다.
우선 제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제가 도영님이 겪은 일들을 읽으며 도영님께 말하고 싶었던 부분들은 결국 제가 겪었던 일이었을 테니까요. 제가 스무 살이던 어느 날 저는 전화를 받고 대학병원 응급실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헤매다가 겨우 입구를 찾아 들어가서 누워있는 아버지를 마주했습니다. 아버지는 건설현장 일터에서 쓰러졌습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아버지와 둘이 살았으니, 아버지의 유일한 보호자는 저였지요.
치료를 받고 퇴원했지만 아버지는 많이 허약해 졌습니다. 다시 예전처럼 일을 나가지 못하는 아버지는 매일 술로 모든 걸 잊으려 했습니다. 환각에 시달리기도 하고 동네 골목길을 배회하기도 했습니다. 또 쓰러졌습니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현재와 저의 미래가 대립하고 있다는 걸 느꼈던 것 같습니다.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는 간병이 두려웠습니다. 평생 돈 벌어서 병원에 바쳐야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고, 제가 원하는 삶을 시도해보지도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치료를 받으며 아버지의 신체적 건강은 많이 회복됐지만, 이후 알코올성 치매가 찾아왔고 발등에 큰 화상을 입었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요양병원에 입원했습니다. 3년이 다 되어갑니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참 많이 떠올렸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에 직접 기여하는 게 죄책감이 덜할까, 아버지의 죽음에서 멀어지는 게 죄책감이 덜할까. 아버지의 죽음은 저에게 너무 거대한 것이었는데, 이 사회에서 너무 하찮은 것으로 취급하는 것 같을 때 할 수 있는 건 그런 고민뿐이었습니다.
참 많이 상상했습니다. 아버지가 죽든 제가 죽든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후 언론에 보도될 문구들을 말입니다. 복지를 강화해야 한다고 뒤늦게 술렁일 세상이 참 미웠습니다. 거기에 뒤따를 연민과 동정도 떠올려보았습니다. 그게 억울했습니다. 분명 저는 이 세상이 책임지지 않으려는 한 사람과 더불어 살기 위해 안간힘을 다한 사람이었는데, 세상은 그런 노력에 대한 인정은커녕 안쓰러워하기만 할 것 같았습니다.
바로 돌봄과 부양의 ‘가족책임’입니다. 무조건 가족이 책임져야 한다는 전제는 살아남는 이유를 우연에 맡기는 전제이기도 합니다. 어떤 가족 조건이냐에 따라 생존이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돌봄 위기를 겪은 후 누군가 살아남은 이유를 우연으로만 두지 않고 이 사회의 필연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돌봄과 부양의 가족 책임부터 벗어나야만 합니다.
가족에게 맡기고 사회가 부담을 덜어준다는 식의 해법은 오래 전 시효가 끝났습니다. 그럼에도 계속 유지된다면 강도영이 겪은 일은 강도영만의 일이 아니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돌봄과 부양의 가족 책임을 떠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픈 가족을 돌볼 사람이 혼자 뿐이고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했다면, 우리 모두가 강도영입니다.
요즘 저는 아픈 가족을 돌보는 청년들의 모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시작한 지 몇 달 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가족 돌봄은 혼자만 겪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 같이 만나니 여러 불행이 겹치는 ‘운명의 장난’ 같은 상황들을 설명할 언어를 구태여 찾아다니지 않아도 됐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언어에 포개져 서로의 상황을 드러내주었습니다. 돌봄을 한다고 불쌍해 보이지 않아도 됐고, 효자나 불효자라는 말들에 시달리지 않아도 됐습니다.
남들처럼 커리어를 쌓지 못하고 시간을 허비한 것이라고 느껴지던 돌봄 경험이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밑천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를 통해 돌봄 경험을 가지고 잘 살아갈 수 있는 자긍심도 생겼습니다.
어쩌면 도영님이 혼자만 겪는다고 느꼈을지 모르는 돌봄과 부양의 무게를 많은 이들이 겪었고, 겪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 존재의 위안이 얻었듯이, 도영님에게도 이 사실이 위안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지금 진행하는 모임으로 점점 더 다양한 돌봄 경험이 있는 청년, 청소년들을 만날 예정입니다. 제가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도영님이 서 있는 자리까지 닿기 위해 노력하려고 합니다. 어디선가 숨죽이며 버티고 있을 이 세상 모든 강도영들에게 가 닿았으면 좋겠습니다.
11월 10일 나오는 2심 선고에서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도영님을 둘러싼 이 모든 소란이 종료된 이후 한 번 얼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도영님도 지금의 경험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고 관계 맺어야 하며 자립해나가야 할 테지요. 이제야 서로 존재를 확인하며 다양한 고민을 나누는 돌봄 경험이 있는 청년들이 그러고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때가 되면 서로가 서로의 삶을 참조점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 몸도, 마음도 건강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 기사는 <프레시안>과 <셜록>의 제휴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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