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로 이회창이 결정됐으나 경쟁 후보였던 이인제의 지지율이 오르면서 후보교체론이 대두됐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탈당하여 국민신당을 창당해서 출마했고, 500만 표 가까이 득표함으로써 이회창 패배의 주요 원인을 제공했다.
당시 '이인제를 찍으면 김대중이 된다'고 했던 한나라당의 우려는 현실이 됐고, 김대중이 1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물론 김대중의 승리, 즉 이회창의 패배에는 지역연합이라는 DJP 연대나 이회창 아들 병역 비리 등의 요인이 있었지만 국민신당의 출현이 보수 분열로 이어진 것이 한나라당의 결정적 패인이었다.
2002년에도 노무현이 민주당의 대선후보로 결정된 이후 월드컵 축구 열기에 힘입은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가 부상하면서 단일화가 주요 이슈로 제기됐다. 민주당내 후단협(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이 결성되고 의원들이 탈당 하는 등 후폭풍이 만만치 않았다. 15대, 16대 대선에서 후보교체는 성사되지 않았지만 1997년 후보교체의 대상이었던 이회창은 지고, 2002년 노무현은 이겼다.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재명 경기지사가 누적 합계 과반을 얻음으로써 결선 없이 본선에 직행하게 됐다. 이낙연 전 대표 측이 경선 과정에서 사퇴한 후보가 득표한 표의 무효 처리에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했으나 당무회의에서 거부되었다. 그러나 3차 슈퍼위크 선거인단 투표에서 이낙연 후보가 62%, 이재명 후보 28%의 결과는 예상을 넘는 충격이었다. 여러 해석이 있지만 대장동 사건이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게 상식이다.
물론 서울지역 순회 경선에서는 이재명 후보가 과반을 넘겼지만 선거인단 투표에서의 이낙연 후보의 압도적 승리는 본선 승패와 대장동 게이트 등 대선의 주요 결절과 변곡점을 짚는데 간과할 수 없는 지점이다.
만약 결선투표가 실시될 수 있었다면 최종 승리 후보는 절차적 정당성에 더해 실질적 명분을 확보함으로써 최강의 후보의 면모를 지닐 것이다. 그러나 무효표를 둘러 싼 논란을 뒤로 하고 본선에 직행하게 된 이재명 후보의 경쟁력은 상대적으로 위축될 수 있다. 게다가 3차 선거인단 투표에서의 참패가 대장동 의혹과 연동되어 있다면 민주당의 본선 경쟁력의 약화는 불가피하다. 물론 국민의힘 후보의 경쟁력과 연계되어 있으나, 민주당 전력에 대한 절대평가의 수준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외관상 정당 차원의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민주당 내 원팀의 구성은 이루어질 것이다. 이낙연 전 대표의 이의신청이 당의 공식기구에 의해 거부되는 상황에서 이 전 대표가 경선 승복 선언을 명시적으로 표명함으로써 결국 이낙연 전 대표 측의 반발은 '찻잔속의 태풍'으로 끝났다. 하지만 민주당을 지지하는 유권자간의 연대에 심각한 균열이 생길 수 있다.
이번 대선은 경쟁했던 후보의 탈당 후 출마는 공직선거법 규정에 의해서 불가능하다. 이른바 '이인제 방지법'에 의해서다. 공당에서 권리당원과 일반당원, 대의원, 선거인단에 의해 결정된 후보를 바꾸는 일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명분도 없다. 외관상으로는 민주당 후보 간의 갈등이 봉합됐으나 민주당내에서 경쟁자 및 지지자들의 화학적 결합은 100퍼센트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
이재명 후보에게는 국정감사에서의 국민의힘 의원들과의 창과 방패의 일대 회전이 남겨져 있다. 물론 검찰 수사는 별개다. 이를 여하히 돌파하느냐가 이 후보의 대선 가도에 치명적 분수령이 될 것이다. 난관과 고비마다 특유의 돌파력과 강공 드라이브로 상황을 자신에 유리하게 반전시킨 이 지사의 승부사적 기질이 이번에도 뇌관들을 제거할 수 있을지 기다려볼 일이다.
그러나 강한 멘탈과 캐릭터, 불굴의 의지보다 강한 것은 투표이자 민심이다. 보다 현실적 선거지형에서는 중도층의 향배다. 10월 10일 선거인단 투표에서의 이낙연 대 이재명의 62 대 28의 결과는 선거의 불가측성과 한국정치의 다이내믹스를 또 한 번 입증했다.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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