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훈의 <광장>. 1961년 4‧19혁명 직후에 나왔으니 이미 60년이 지났지만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걸작이다. 최인훈은 남한은 개개인들의 사적인 공간인 '밀실'은 넘쳐 나면서도 모두를 위한 공적 공간인 '광장'은 황폐한 곳으로, 반면에 북한은 모든 것이 광장이며 개인의 시적인 영역인 밀실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그렸다.
소설 제목처럼 그리스의 '아고라'에서 유래한 광장은 민주주의의 꽃이고 시민들의 공간이다. 최인훈의 고발처럼,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체제 하에서 광장은 황폐한 '불모의 공간'이었다.
다만 예외적으로 삼엄한 공권력의 저지 속에서도 게릴라처럼 광장이 생겨났다. 1960년 4월 19일 광화문에는 일시적으로 시민들의 투쟁에 의해 광장이 생겨나 이승만을 몰아냈고, 1980년 봄 서울역에는 유신철폐와 민주화를 바라는 학생들이 모여 새로운 광장이 만들어졌지만 지도부의 회군 결정으로 신군부의 집권을 막을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1987년 6월에는 명동성당 등 전국 주요도시에 광장이 만들어져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를 획득해냈다.
1987년 이후 민주적 공간이 확대되고 집회의 자유가 늘어나면서, 광장이 풍성해지고 광장민주주의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1987년 명동에서 시작된 광장민주주의는 노태우 정권의 공안정국에 반대하는 처절한 분신투쟁에도 불구하고 김지하 시인의 '죽음의 굿판' 비판과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조작 등으로 인해 패배로 끝난 1991년 투쟁 등 우회곡절을 거쳐 2002년 말 광화문의 촛불시위로 발전했다.
"오 필승 코리아!" 2002년 6월, 월드컵 열기로 들끓고 있는 가운데 여중생 김효순, 심미선은 의정부로 놀려가려고 좁은 2차선 도로를 걸어가다가 폭이 넓은 특수장갑차에 눌려 죽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미군이 사고를 낸 미군들에게 무죄를 선고하자 그해 11월에 수많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광화문으로 달려 나왔다. 촛불시위의 신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특히 이 시위는 인터넷의 발달과 맞물려 이름 없는 시민들이 인터넷을 통해 광장으로 몰려드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 밤에, 저는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 끝없이 이어진 촛불을 바라보았습니다. 시위대의 함성과 함께 제가 오래전부터 즐겨 부르던 '아침이슬' 노래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시위가 이후 2004년 광화문에서 열린 노무현 탄핵 반대 촛불, 2008년 시청 앞에서 벌어진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광우병 반대 촛불시위로 발전했고, 이명박은 결국 항복을 선언해야 했다.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아나키스트이자 페미니스트였던 엠마 골드만의 유명한 말이다. 과거 우리의 민주화운동과 시위는 '운동권'의 '근엄주의'와 '헌신주의'에 기초해 있었다. 촛불과 광장민주주의는 이 같은 근엄주의를 넘어서 유모차를 끄는 젊은 엄마들이 참여하는 축제분위기의 '즐거운 혁명'이라는 새로운 문화에 기초해 있었다.
개인적으로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까지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상임대표를 하면서 수많은 집회에 참가했다. 집회에서 나는 민교협 상임의장으로 단상에 앉아 있다가 연대발언을 하곤했다. 이처럼 집회에서 주요 사회운동단체의 단체장들이 단상을 차지하는 '단상권력', '운동권력'을 해체하고 일반 시민들도 누구나 단상에 오를 수 있는 '단상혁명', '운동혁명'을 가져온 것이다.
이는 우리 민주주의의 자랑스러운 성과다. 그러나 "세계 민주주의사상 유례없는 새로운 시민운동의 전형"이라는 일방적인 낙관론은 잘못된 것이다. 이제는 코로나19로 텅 비어있지만, 10여 년 전 광우병 촛불의 중심지였던 시청 앞 광장(서울광장)에 서자, 2008년 봄 광우병 촛불집회의 낙관적 분위기에 반하여 내가 한 신문에 쓴 글이 생각났다. "지나친 낙관론은 금물이다. 촛불이 '정치적으로 주체화'되지 않는다면 결국 일회성 촛불로 끝나고 말 것이다 촛불은 계속될 수 없다." 예를 들어, 효순·미선 촛불과 노무현 탄핵 반대 촛불이 있었지만 "이 촛불들은 정치적으로 주체화되지 못했고 시간이 지나자 꺼졌다. 그리고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이 승리했다."
나의 우려대로 광우병 반대 촛불은 꺼졌고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가 승리했다. 얼마 뒤인 2014년 4월 16일 비극적인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고 이의 진상규명과 추모를 위한 촛불과 4.16연대의 광화문 농성이 이어졌다.
촛불과 광장민주주의의 절정은 박근혜 탄핵 시위였다. 최순실 사건으로 2016년 말에 촉발되어 2017년 봄까지 계속된 역사적인 박근혜 탄핵 시위는 광화문 등 전국 주요도시에서 주 1회, 총 20회가 벌어져 전체인구의 30%가 넘는 1588만 명이 참가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반드시 자랑스러운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처럼 광장민주주의가 발전하고 거리의 정치가 폭발하는 것은 우리의 제도정치가 제 기능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의 기능은 '다양한 사회적 갈등을 정당과 국회 등 제도정치 틀 내에서 평화적으로 조정하는 것'인데 우리의 제도정치는 보수양당이 지배하면서 다양한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가 제도정치에 반영되지 못하면서 거리로 달려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촛불과 광장민주주의는 한국 대의민주주의가 실패한 결과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뉴라이트가 보여주듯이 모든 시민운동이 진보적이지 않듯이, 모든 촛불과 '광장민주주의'가 진보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실 '광장민주주의'를 극적으로 이용한 것이 바로 히틀러의 '극우 포퓰리즘'이었다. 현대의 대표적인 극우 포퓰리즘 정치가인 트럼프도 SNS과 직접연설을 통해 극우대중을 광장으로 끌어내 의회를 공격하고, 점령하게 만들기까지 했다.
이는 문재인 정부 들어 나타나고 있는 촛불과 광장민주주의의 변화가 잘 보여주고 있다. 이전까지 촛불이 민주화운동 진영 내지 '개혁·진보진영'이 주도하던 것이었다면, 코로나19에 따른 집합금지 등으로 잠잠해졌긴 하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 촛불시위를 주도해 온 것은 태극기부대로 상징되는 '냉전적 보수' 진영이다.
특히 2019년 조국 서울대 교수를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하면서 터져 나온 조국 사태 후, 조국의 지지자들이 검찰의 조국과 부인 정경심 교수 조사에 항의해 검찰청이 있는 서초동에서 촛불집회를 열자,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의 현장이자 한국 광장민주주의의 중심인 광화문을 태극기부대가 차지하고 말았다.
나아가 촛불과 광장민주주의가 대의제라는 간접민주주의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한 직접민주주의를 의미한다면, 이들 집회들은 직접민주주의가 아니라 기존 제도 정치권의 지지세력 모임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예를 들어, 장덕진 서울대 교수는 이들 집회들을 "직접민주주의의 발현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비판했다.
"이게 나라냐!" 코로나19로 이제는 비어있는 광화문 광장에 서자 박근혜 탄핵 시위 당시 외치던 수많은 이름 없는 시민들의 함성이 들려오는 것 같아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이 같은 환희가 지나가자, 코로나19로 잠시 잠잠해졌지만, 정부의 집회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 있었던 극우기독교도들의 광화문 장외예배가 보여주듯이, '조만간 다시 타오를 우리의 촛불과 광장민주주의가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가' 하는 걱정이 나를 엄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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