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침해, 시설 중심 정책이 빚어낸 결과
탈시설화(脫施設化, deinstitutionalization)는 장애인이 개인의 온전한 존재(장애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잘못된 구석이 없는 정상적인 사람)로 인정받으면서 지역사회에서 독립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당연히 장애인 당사자와 권리 옹호자들의 오랜 숙원이기도 하다. 기저에는 시설 중심의 정책이 장애인의 사회참여를 가로막는 공고한 장벽으로 기능하며, 장애인 인권 침해에 기여해왔다는 견해가 깔려있다.
'탈시설' 용어가 낯설게 느껴질 뿐이지 그 취지와 배경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장애인 집단 거주시설, 정신요양시설, 폐쇄병동 등 지역사회와 격리된 수용시설에서 장애인에 대한 폭력과 학대는 끊이지 않고 있다. 심지어 지역사회와 어느 정도 통합되어 있지만 분리된 공간인 특수학교나 주간보호시설에서도 인권침해는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존재로 장애인을 인식하고, 지역사회와 격리시켜 분리 수용해 온 결과가 빚어낸 참담한 모습들이다.
부족한 지역사회 인프라, 시설을 '필요악'으로 만들어
장애인 탈시설 및 자립지원 요구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자는 것이다. 그 방향에 대한 합의와 공감대 형성은 장애인 자립생활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새천년 초기에 이미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방법을 모색하는 와중에도 오랜 관성에 따라 시설 중심의 장애인 정책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OECD 회원국의 조현병 환자 평균 재원기간은 2016년 기준으로 50일인데 반해, 우리나라 평균 재원기간은 303일에 달한다. '정신건강복지법' 시행에 따른 입원제도의 변화로 2017년 평균 재원기간이 215일로 감소하였으며, 8만 명이 넘었던 2013년에 비해 수가 줄었지만, 입원환자 수는 2016년 6만 9162명에서 2018년 4월 23일 기준으로 6만 6523명으로 큰 변화가 없다. 또한 선진국들은 입원병상을 줄이고 지역사회 치료로 전환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한국은 오히려 병상이 늘고 있다(정신병원 장기입원의 진단과 대안 정책간담회 자료집, 인권위, 2019).
정신병상 입원환자의 10% 정도는 그해 사망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2010년 정신병상 입원환자는 6만 4611명(실인원수 기준)이었는데 이 중 6252명이 그해 사망했다. 사망자는 이후로도 매년 6000~7000명씩 발생했지만 정신병상 입원환자는 6만 명대를 유지했다. 최근 10년간 정신병원 입원 이력이 있는 환자 사망자 수는 모두 6만 9960명이다. 정신병원 재원기간이 통틀어 10년이 넘는 정신질환자 수도 1만 4890명에 달한다(<국민일보> 2020, 5. 26).
강제입원 비율이 2005년 90.3%에서 2020년 37.1%로 꾸준히 감소해오고 있지만, '정신건강복지법'제42조에 근거해 정신질환자가 보호자의 동의를 얻어 정신의료기관에 입원하는 동의입원을 강제입원 통계에서 제외한 수치다. 올해 6월, 국가인권위원회는 정신질환자의 동의입원 제도의 퇴원결정 권한이 당사자가 아닌 가족에게 있어 기본권 침해 소지가 있으며, 합법적 장기 입원절차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고 전면 재검토 필요성을 제기했다. 법 시행 후 동의입원 비율은 2017년 16.2%, 2018년 19.8%, 2019년 21.2%로 매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보호자 동의 없이 퇴원할 수 없는 점은 '당사자 의사 존중'이라는 동의입원의 입법 목적과 모순되며, 사실상 강제입원에 해당한다는 것이 시민사회의 주장이다.
2020년 기준으로 평균연령 39.4세의 장애인, 약 2만 9000여 명은 전국 1539곳의 거주시설에서 생활하고 있다. 80.1%는 발달장애인(지적장애, 자폐성장애)이고 98.3%는 중증장애인이다. 평균 18.9년을 거주하고 있다(국무조정실 보도자료, 2021, 8. 2). 탈시설에서 말하는 시설의 범주는 장애인 가족이나 당사자의 선택 또는 시설생활 만족도와 무관하게 주거결정권과 지역사회에서 함께 생활할 권리를 제약할 여지가 있고, 학대와 폭력에 노출될 위험이 큰 시설을 포함한다.
지역사회 또는 주류정책이 다룰 수 없는 환경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강요당하는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즉, '필요악'이라는 관점도 존재하며 더 나아가 시설에서의 삶에 만족하고 그것이 그나마 최선이라고 말하는 장애인 가족, 당사자도 엄연히 존재한다. 따라서 현 상황은 탈시설 및 자립생활 지원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탈시설 및 자립생활을 지원할 수 있는 지역사회 인프라 결여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시설 개선과 기능 전환 지원을 위한 탈시설 로드맵
장애인정책조정위원회(이하 '위원회')는 이달 초 제23차 회의에서 탈시설 장애인 지역사회 자립지원 로드맵(이하 '로드맵')을 심의․확정하고, '장애인권리보장법' 제정 및 '장애인복지법' 전면 개정 추진 방안을 논의했다. '장애인복지법' 제11조에 따라 장애인복지에 관한 주요 정책을 종합․조정하기 위해 국무총리 소속으로 위원회를 설치․운영 중에 있다. 14곳의 관계 정부부처장과 장애인단체장, 전문기관 및 전문가가 등이 참여하는 명실상부한 국가수준의 장애인 정책 거버넌스의 최정점에 있는 기구다.
표면상으로 로드맵이 지향하는 바를 요약하면, 향후 20년을 추진 기간으로 설정하고'25년부터 본격적인 탈시설 지원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직전 3년 간 탈시설 및 자립지원 기반 여건을 조성하기 위한 법령을 개정하고 인프라를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방향도 맞고 장기적 관점에서 다양한 요소를 고려하면서 추진하겠다는 의지와 세심함도 보인다. 그런데 2017년 '정신건강복지법' 시행을 앞두고 일었던 논란이 주요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 판박이처럼 되풀이 되고 있다.
우선 장애시민사회 입장이다. 장애인 당사자가 조직의 최고위 수준에서 의사결정을 하고, 조직 구성원 수의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고 있어 장애인 당사자의 입장을 가장 잘 대변하고 있는 조직이라 할 수 있다. 시민사회의 문제의식은 장애인시설 운영주체의 인권의식이나 인간성, 규제와 감독 강화를 통한 시설 운영 메커니즘 개선이 아니라 시설 자체에 있다. 따라서 시설 개선과 변화는 근본적인 문제해결이 아니며, 애초에 탈시설 프로세스의 고려대상도 아니다.
이상의 관점에서 시설을 여전히 장애인이 자신의 주거를 선택하는 선택지의 하나로 남겨두고, 현 거주시설을 주거서비스 제공기관 및 퇴소 장애인을 위한 주거유지서비스 제공기관으로 전환하겠다는 로드맵을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장애인 거주시설 신규설치 금지, 장애인 학대 관련 범죄가 발생하는 시설은 즉시 폐쇄할 수 있는 'One strike-out'제도 도입을 약속하고 있지만, 탈시설 희망자에 한해서만 정책을 적용하거나 100인 미만의 시설의 장애인 집단 수용 기능은 남겨두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설을 기능 전환을 통해 탈시설 주체로 활용하겠다는 의미도 담겨있다.
다음은 장애인 부모 등 보호자 입장이다. 장애를 가진 자녀, 형제의 보육과 교육, 사회활동이 지역사회에서 가능한데, 단지 힘들다는 이유로 자녀를 시설로 보내는 부모는 세상에 없다. 시설 입소자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가정과 지역사회 인프라가 감당할 수 없는 장애정도가 심한 발달장애인이다. 그나마 거주시설에서도 감당이 안 된다는 이유로 입소를 거절하면 갈 데라곤 강박이나 약물 통제가 일반적인 정신병동 같은 수용시설이다. 즉 시설 폐쇄나 축소 전에 가정으로 돌아온 자녀를 감당할 수 있는 지역사회 인프라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가 많아서 억울한 면도 있다는 시설들도 이해관계자다. 탈시설 과정에서 낙인 등 불필요한 고통과 선의의 피해를 당할 수도 있고, 적지 않은 종사자들의 일할 권리도 고려해야 한다. 탈시설 방향을 반대하지 않지만, 이용시설 등으로의 기능 전환을 통해 시설에 미칠 수 있는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해달라는 요구가 있다. 인권침해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소규모 시설은 유지되고 주거서비스 제공기관 및 주거유지서비스 제공기관으로 전환하겠다는 현 로드맵은 시설의 요구를 전적으로 수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로드맵을 들여다보자. 시설은 남겨진다. 24시간 전문서비스가 필요한 장애인은 여전히 시설에 입소할 수 있다. 시설을 개선하고 새로운 기능을 수행하는 기관으로 전환하는 것을 지원한다. 로드맵의 실질적 내용은 시설의 요구를 수렴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시설에서 나오면 자녀는 오갈 데 없어지고, 가정은 파탄난다는 장애인 부모와 가족들의 당장의 불안도 고려했다. 결론적으로, 시설의 개선과 기능 전환을 위해 시설을 지원하고, 시설이 중심이 되는 장애인 탈시설 및 자립지원 로드맵인 것이다. 반대로 지난 20년 동안 탈시설 및 자립생활을 연구하고 선도해오면서 축적한 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역량과 지혜가 자리 잡을 공간은 보이지 않는다.
단순히 정부정책을 바라보는 장애시민사회의 온도차의 문제로 취급하기에는 방향성에 흠결이 너무 크다. 최대 쟁점은 탈시설 및 자립지원의 연착륙을 위한 지역사회 인프라 구축에 있었다. 여기에 대한 촘촘하고 세밀한 구상이 부족하고, 시설과 장애인 부모가 제기하는 당장의 문제에 집착하다 보니 20년 로드맵이 원칙과 방향성을 상실한 근시안적인 3년 로드맵이 되어버렸다.
장애인탈시설지원법 제정과정에서 고려할 사항
먼저, 탈시설이 먼저냐 지역사회 인프라 구축이 먼저냐 싸움에서 벗어나 시설에서 발생하고 있는 인권침해 심각성과 피해자 구제의 긴급성에 따라 지금 당장이라도 탈시설을 진행할 수 있는 여지를 로드맵에 반영해야 한다. 로드맵 추진기간과 무관하게 현재 실재하는 인권침해에 따른 피해자 구제를 로드맵에 통합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
두 번째, 현재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 주먹구구식으로 지원하고 있는 장애인 자립지원 프로그램을 대폭 확대하고 체계화하는 것이다. 탈시설과 지역사회 인프라 구축 사이의 시차 발생은 막을 수 없다. 그에 따른 문제를 완화할 수 있는 완충지대로 이미 시행착오를 경험하고 노하우가 쌓인 자립지원 프로그램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지역사회 인프라 구축 환경, 속도를 고려해 시기를 늦추더라도 시설 폐쇄에 대한 정책적 의지가 명확하게 표명되어야 한다. 현재는 '시설 입소 기준 강화, 시설의 소규모화 및 기능 전환 지원'을 위한 약속이 있을 뿐, 정책은 여전히 탈시설이 아닌 시설에 있다.
넷째, 시설의 기능 전환은 좋다. 하지만, 탈시설 및 자립지원 전달체계의 주체가 되는 것은 곤란하다. 복지관처럼 이용시설로 전환할 수 있고, 지역사회와의 거리가 문제라면 연수 및 교육 시설로의 전환도 있다. 로드맵에 따라 주거서비스를 제공하는 거주시설은 지금과 다를 바 없으며, 정상적인 거주시설에겐 주거서비스 제공은 새로운 것도 아니다. 시설 퇴소 장애인을 위한 주거유지서비스를 지원하는 기능은 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체험홈, 그룹홈 등을 통해 이미 제공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장애인자립생활센터 목소리에 보다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으며, 지난 20년 동안의 '장애인 탈시설 및 자립생활 운동'경험과 지혜를 십분 활용할 수 있는 역할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 현재 로드맵 상에는 전달체계의 핵심인 중앙장애인지역사회통합지원센터의 지원과 관리 대상일 뿐이다.
정부의 로드맵은 여전히 수정될 여지가 있으며, 장애인탈시설지원법(이하 '지원법') 통과로 로드맵의 추진방향과 방법의 개선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 최고 의사결정기구에서 심의·확정한 만큼 로드맵은 지원법 제정 이전에 수정될 가능성은 적다. 따라서 지원법 제정과정에서 앞선 다섯 가지 사항 외에도 장애인자립생활센터 의견을 보다 적극적으로 수렴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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