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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집 대문 앞 굶주려 쓰러진 한마리 개는 제국의 멸망을 예고한다"

[녹색평론 김종철 약전] ③ 윌리엄 블레이크와의 만남, 그리고 지구적 관점

김종철은 1965년 서울대 영문과에 합격했으나 1년 후인 1966년부터 학교에 다녔다. 아마도 건강 문제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문과 지원 동기에 대해 그는 "그 무렵의 평범한 시골 고등학생이 무엇을 알았겠는가. 필시 지금이나 그때나 한국 사회에서 압도적 위세를 누리고 있는 미국적인 것 혹은 서양적인 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어를 익히면 '큰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맹목적 믿음" 때문이었을 수 있다고 회고했다.(<대지의 상상력> 5쪽)

그러나 그는 고교 시절 빼어난 영어 실력을 가졌던 것 같다. 1960년대 중반 이후 고교생의 필수 영어 참고서였던 <성문종합영어>의 저자 송성문은 당시 김종철이 다니던 마산고 영어교사였는데, 훗날 김종철의 영어 실력이 '대한민국 최고'라고 회고했다.

김종철과 동기인 마산고 24회 졸업생들이 2005년 졸업 40주년 기념식을 마산에서 가졌는데 송성문에게 "선생님께서 우리나라에서 영어를 제일 잘 하시지요?"라고 물었더니 정색을 하면서 "아니야! 바로 여러분 동기생인 김종철 군이 우리나라에서 영어를 제일 잘 해. 내가 마산고등학교에 재직하는 동안, 김 군이 매일 날카로운 질문을 해서, 내가 김 군의 질문에 답하려고 밤새도록 공부했어. 내일 학교에 가면 김 군이 또 무슨 질문을 할까 늘 두려웠지. 그러다 보니 내 실력이 계속 늘었지. 나를 이 정도 수준으로 만들어 준 사람은 김 군이야"라고 답했다는 것이다.(허권수의 한자로 보는 세상, '(837) 교학상장(敎學相長)', <경남신문> 2020. 7. 21)

1967년 서울대 전임강사로 영문학을 가르쳤던 백낙청 선생도 김종철이 뛰어난 학생이었다고 회고했다. "강의 내용을 잘 따라오는 것만 해도 마음에 드는 일인데 이따금씩 내가 던지는 은근한 농담에 거의 혼자서 알아듣고 키득거리기까지 하니 훈장의 기쁨이 어떠했겠는가."(백낙청, '고 김종철과 나', <녹색평론> 2020년 9/10월호, 99쪽)

서울대 영문과에서 김종철에게 일어난 최대의 사건은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년)와의 만남일 것이다. 블레이크와의 만남을 통해 자본주의 근대문명이 얼마나 부조리하고 야만적인가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고, 특히 압축적인 근대화로 인해 온갖 인간적인 비극과 재난을 겪고 있는 한국 사회의 문제를 인류 사회 전체가 공통적으로 경험해온 곤경의 일부로 보는 사고습관에 다소간 익숙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대지의 상상력>(김종철 지음, 녹색평론사 펴냄) ⓒ녹색평론사

'삶-생명의 옹호자들에 관한 에세이'라는 부제가 붙은 김종철의 2019년 저서 <대지의 상상력>은 문학평론을 하던 그가 어떻게, 무엇 때문에 <녹색평론>을 창간하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드러내는 책인데, 이 책 서문에서 그는 "그와 같은 사고습관이 길러지지 않았더라면 내가 에콜로지 사상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 결과 <녹색평론>의 발간작업에 열중하는 일도 없었을 것임은 거의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즉, 자신의 관심이 문학에서 에콜로지로 옮겨간 결정적 계기는 1983년 가을~1984년 여름 뉴욕주립대학(버펄로)에서의 독서인 것은 맞으나, 그 이전 블레이크를 필두로 프란츠 파농, 리처드 라이트 등 '삶-생명의 옹호자'들에 대한 문학 공부에서 형성된 일정한 사고습관과 감수성이 자신의 생태주의적 세계관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다.

김종철은 대학 초년생 때 블레이크를 발견한 뒤 그에게 완전히 사로잡혔으며 이후 오랜 시간의 공부 끝에 블레이크에 관한 석사논문을 썼다. 이 논문은 백낙청 선생의 권유로 그 축약본이 <창작과 비평> 1974년 봄호('예언자적 지성의 한계 - 블레이크의 시적 노력')에 실렸다. 이후 1983년 논문 '블레이크와 민중문화(William Blake and Popular Culture)'과 책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서구근대문학론집>(백낙청 엮음, 창작과비평사 펴냄)으로 진화했고, 이를 수정 보완한 것이 <대지의 상상력> 첫 글로 실린 '블레이크의 급진적 상상력과 민중문화'이다. 그는 블레이크와의 첫 만남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생각해보니 내가 블레이크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에 들어가서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그때 우리가 다니던 학교에는 중앙도서관 외에 학부의 학생들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합동연구실이라는 것이 학과마다 딸려있었는데, 어느 날 그 연구실의 서가에 비치되어 있던 고풍스러운 시집 한 권을 별생각 없이 꺼내 뒤적거리다가 나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 마주쳤다.

새장에 갇힌 한 마리 로빈 새는

온 하늘을 분노로 떨게 한다.

주인집 대문 앞에 굶주려 쓰러진 한 마리 개는

제국의 멸망을 예고한다.

이 강렬한 언어가 내게 준 충격은 컸다. 소년시절 이후 시를 읽어왔지만, 시가 이토록 격렬히 세상의 어둠에 부딪칠 수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기에 나는 너무나 놀랐다. 그리고 그날 우연히 접한 블레이크라는 시인의 '벌거벗은' 정신에 완전히 사로잡혀버린 나는 이후 많은 시간을 블레이크를 읽고 이해하려는 노력에 바쳤다."(<대지의 상상력> 13~14쪽)

'영국 문학사에서의 가장 혁명적인 반항아'로 불리는 블레이크는 런던의 한 소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부터 시작에 정열을 쏟았다. 그는 정규 학교 교육을 받지 않고 한 판화가 밑에서 도제 생활을 통해 익힌 그림과 판화 기술로 생계를 꾸렸다.

블레이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벌거벗은 정직성"인데, T.S. 엘리엇에 따르면 블레이크의 정직성은 학교 교육이 부과하는 엄격한 요구와 훈련을 벗어나서 자유로이 원하는 것만을 읽을 수 있었던 처지와, 자기희생과 타협이 요구되는 일정한 직장 생활을 안 해도 좋은 생계 수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것을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예언자이며 시인"이라는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했다. 그의 예술은 동시대 다수 지식인 예술가들을 '불쾌하게 만드는 솔직함'을 소유했으며, 그는 개인적으로 고립되었다. 기층 민중의 입장에서 당대의 산업화에 철저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일찍 산업사회가 제기할 수 있는 치명적인 해독에 주목했다.

당대에 존재하는 삶의 양식, 경제 법칙의 고유한 자기 논리에 따라 인간이 주인이기는커녕 노예로 전락하게 되는 과정이 그에게는 결코 긍정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노동의 기계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비인간화를 주목하면서 수레나 맷돌의 이미지를 사용했다. 그가 공격한 것은 삶의 기계화 과정이었다.

그의 또 다른 특징은 철저한 민중성이었다. 민중계층이야말로 그 자신이 속하여 살아왔고 일해 온 계층이었다. 블레이크는 한 번도 공화주의적·자코뱅적 정치 신념을 버린 일이 없고, 토지계급이나 상인계급을 포함한 여하한 계급의 지배권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작품들은 근대 자본주의 발흥으로 뿌리로부터 뒤틀려온 인간 생존의 현실에 관한 가장 근원적이며 포괄적인 지적·도덕적·정신적 성찰에 토대를 둔 것이며, 그의 시적 노력은 언제나 '억압받고 있는 자들의 해방'이라는 또렷한 목표를 겨냥했다.

블레이크는 인류 사회의 타락의 기원을 인간이 사적 이익을 배타적으로 추구하기 시작한 데서 찾고 있다. 이기적인 욕망의 추구가 전락의 단초이며, 이기적인 탐욕과 그것을 제도화하는 사회체제야말로 악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선도국가 영국에서 그 단초는 인클로저(Enclosure)였다. 청교도 혁명기(1640년대)의 급진적 민중사상가 제라드 윈스턴리는 다음과 같이 인클로저를 통박했다.

"태초에 위대한 조물주, 이성은 이 대지를 하나의 공동의 보물로 만들었다. (중략) 태초에 인류의 일부가 다른 일부를 지배해야 한다는 말은 단 한 마디도 말해지지 않았다. (중략) 그러나...이기적인 상상력은...하나의 인간이 다른 인간들을 가르치고 지배하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인간은 속박 속에 묶이게 되고, 야생의 짐승들이 그에게 노예로 되는 것보다 더 크게 그는 그의 동료 인간에게 노예로 되었다. (중략) 태초로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중략) 가장 가난한 인간도 가장 부유한 인간에 못지않게 토지에 대한 진정하고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중략) 참다운 자유는 대지를 자유롭게 향수하는 데 있다."(<대지의 상상력> 53쪽)

블레이크가 문제로 삼는 것은 인클로저 그 자체이기보다는 이로 인한 삶의 근본적인 변화, 즉 사적 소유의 배타적인 권리 행사가 민중 생활과 인간 실존에 끼치는 광범위하게 파괴적인 영향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시구를 통해 사람 사이의 우애와 사랑의 가치를 내팽개치고 각자의 폐쇄적 공간 속에 갇혀버린 근대적 인간 상황을 묘사하고 경제 생활에서의 공동체적 윤리의 상실을 개탄했다.

'사탄은 인간적인 생존이 아닌 죽음의 상태

그것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인간의 적이 되는 세계이다'

김종철에 따르면 "블레이크가 지향하려고 한 것은 결국 심리적 사회적 억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자발적인 충동으로부터 인간의 가능성을 완전히 실현하면서 또 동시에 남의 가능성을 북돋우어 주는 한 커다란 가족적 질서에 대한 이상. 자유로운 인간들이 상호 주체적으로 아무런 금제 없이 기꺼이 참여하여 이루는 사회, 즉 이상적인 의미에서의 민주적 가치가 실현되는 사회였다".('예언자적 지성의 한계', <창작과 비평> 1974년 봄호, 118쪽)

다음과 같은 블레이크의 시구에 이러한 이상이 잘 드러나 있다.

한 알의 모래 속에 하나의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 천국을 본다

그대의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의 시간에 영원을 보라

또는 "블레이크가 원했던 것은 보다 깊은 의미에서의 혁명, 즉 인간의 상호 관계와 일상 생활의 욕망의 구조 속에서의 질적인 변혁을 수반하는 '총제적인' 혁명"이었다.(<대지의 상상력> 76쪽)

결론적으로 김종철은 블레이크가 "억압적 부르주아체제에 대하여 가장 근본적인 비판에 도달한 근대 최초의 지식인·사상가"라고 평가했다. 블레이크의 시대는 산업혁명, 미국 독립혁명과 프랑스혁명, 그리고 이에 대한 반혁명(영불전쟁과 비엔나체제)이 진행되던 시기로 블레이크는 기층 민중의 입장에서 인간 해방을 옹호하고 자본주의 산업문명의 비인간성에 단호히 맞섰다. 칼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에서 산업혁명 당시 영국 노동자들의 비참한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악마의 맷돌(Satanic Mills)'이란 표현은 바로 블레이크의 시구였다.

한마디로 블레이크는 영국 주도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확립되어 가던 시기, 바로 그 현장의 최전선에서 영국 노동계급의 비참함은 물론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등 제3세계 민중의 고통에 대해서도 눈 감지 않은 예언자적 지성이었다.

예컨대 블레이크는 자신의 시와 관련된 그림도 자신이 직접 그렸는데, <앨비언의 딸들에 관한 환상>이란 시 작품에 등장하는 한 여인, 즉 폭력적 남성에게 겁탈 당하고 애인에게 버림받는 여인은 아메리카 인디언처럼 묘사되었는가 하면, 자신이 제작한 동판화에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에 의해 지탱되는 유럽'이라는 표제를 달았고, 마지막 단계에 해방된 노예들이 부르는 노래는 다름 아닌 아프리카 검둥이가 지은 노래였다. 김종철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블레이크는 유럽문명의 억압적 본질과 그 성적 억압, 가족관계의 억압이 본질적으로 유럽의 비서구지역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탈과 연속적인 관계에 있음을 지적하고 그럼으로써 유럽문명의 감추어진 역사와 구조를 드러내려 한 것이 아닐까?"(<대지의 상상력> 61쪽)

"해방의 노래로 하필이면 '아프리카 검둥이'가 지은 노래를 지목한 시인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거기에는 자본주의체제의 전개 과정에서 유럽인들의 노예가 되고, 전통적인 부족 중심의 공동체가 파괴되어온 비서구지역의 민중이야말로 그 가혹한 시련과 고난의 경험 때문에 누구보다도 새로운 시대와 사회에 대한 가장 강력한 열망을 품고 있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대지의 상상력> 62쪽)

블레이크 연구를 통해 김종철은 그가 후에 말한 '지구적 관점'을 획득한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한국 지식인들이 한국의 곤경을 일본의 식민통치나 북한의 위협, 미국의 간섭 정도에서 찾는 데 비해 자본주의 산업 문명 그 자체를 문제의 근원으로 지목하는 김종철의 '지구적 관점'은 블레이크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닐까.

예컨대 김종철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쏜 폭탄으로 팔레스타인 어린이들이 죽을 때, 또는 미국의 무차별 폭격으로 아프간이나 이라크의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당할 때, 이를 남의 땅에서 일어난 단순한 불상사가 아니고 내 생명에 막대한 손상을 입는 것이라고 느끼는 것이 생태적 감수성이며 우리는 마땅히 이러한 생태적 감수성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만물은 일체이며 형제이기 때문이다. 다른 생명의 훼손은 곧 내 생명의 훼손이며, 다른 사람의 삶이 편안해져야 내가 잘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서구식 근대 자본주의 문명이란 유한한 화석연료의 엄청난 낭비와 비서구 세계에 대한 침략과 약탈의 소산"이고, 2차 대전 후 미국이 제3세계에게 약속한 경제 개발(즉 미국, 서유럽이 누려온 생활수준을 전 인류에게 확대)은 애당초 실현 불가능한 약속이라는 점에서 근대 산업문명은 지속 불가능하며 모두가 고루 가난하게 사는 방법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한국이 산업화를 이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것을 기뻐하기보다는 근대 산업문명이라는 것이 대다수 제3세계 민중의 희생과 지구 생태계 파괴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지속 불가능 하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대지의 상상력>에서 김종철은 블레이크와 또 다른 혁명적 지식인 존 밀튼, 토마스 페인, 장 자크 루소와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즉 블레이크보다 150년 앞서 청교도혁명(1642-49년) 당시 활약했던 밀튼은 블레이크와 같이 예언자적.공화적 혁명성을 가졌으나 민중에 대한 경멸과 불신으로 중산계급이 혁명을 주도해야 한다고 믿었고, 블레이크의 친구이며 미국 독립혁명의 도화선이 된 <상식>의 저자 토마스 페인은 인간의 천부적 권리, 즉 정치적 평등은 옹호했으나 기성 체제의 사회적 물질적 토대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가진 자들의 배타적인 소유권 자체에 대해서는 확실한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다.

루소는 자기 시대의 부르주아체제에 대한 비판에 정열을 기울였으나, 그의 인간관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즉, 루소가 고립된 인간을 자연적 상태의 인간으로 간주하고, 이를 기준으로 자기 시대의 '문명화된' 인간을 거부하려고 한 점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루소의 이상적인 인간은 혼자 내버려진 존재, 타인과의 교통이 차단된 외롭고 고독한 존재이다. 따라서 그가 꿈꾸었던 이상적인 사회는 기본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이 두절된, 일종의 닫힌 사회일 수밖에 없다. 요컨대, 루소의 대안은 프티부르주아 지식인의 좁은 관념에 갇힌 것이었다. 반면에, 블레이크가 생각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인간은 공동체의 유기적이고 개방적인 연대 가운데 존재하는 자율적인 개인이었다."(<대지의 상상력> 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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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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