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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독재의 시초, 국회 프락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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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독재의 시초, 국회 프락치 사건

[프레시안 books] 김정기의 <국회 프락치 사건의 증언>

반민특위 습격, 국회 프락치 사건, 김구 암살

1949년 6월 6일 일단의 친일 경찰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 활동을 무력화시켰다. 이후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 10월 친일 매국노 처단을 위한 특별검찰과 특별재판부가 해산되면서 반민특위는 때 이른 종말을 맞았다. 신생 대한민국의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려던 국민들의 염원은 정부 수립 후 1년여 만에 허무하게 좌초됐다.

그런데 반민특위 습격을 전후해 이승만 장기집권을 위한 일련의 정치 테러가 자행된다. 바로 국회 프락치 사건과 김구 암살이다. 1949년 5월 이문원, 이구수, 최태규 등 이른바 소장파 국회의원 3명이 체포된 이후 6월 21일 소장파 의원의 리더격인 노일환과 김옥주 등 6명의 국회의원이, 25일에는 소장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약수 국회 부의장이 검거됐다. 다음날인 26일 김구 선생이 안두희의 총탄에 희생됐다. 이어 8월에는 신성균 등 소장파 의원 6명이 체포됐다.

3차례에 걸쳐 체포된 소장파 의원 15명 중 13명은 '남로당 프락치'라는 혐의로 기소돼 11월 17일부터 이듬해 2월 13일까지 15차례의 공판 끝에 3월 14일 모두 3-10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남로당의 사주를 받아 외국군 철수를 요구했고, 북진통일에 반대하고 평화통일을 요구했다는 것이 유죄 선고의 이유였다. 2심 재판을 기다리던 이들은 6.25 이후 북한 군에 의해 석방됐고, 이들 중 서용길을 제외한 12명은 9.28 서울 수복 직전 북한 군과 함께 북한으로 넘어갔다.

이들의 북한행이 납북인지 월북인지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북한으로 넘어갔다는 사실 자체로 공산당 프락치라는 대중의 인식이 굳어졌고, 이후 국회 프락치 사건의 진상은 묻히고 말았다. 제주 4.3항쟁이나 여수·순천 민중항쟁과 같이 유족들의 공개적인 진상규명 또는 명예회복 요구도 없었다.

그러나 국회 프락치 사건은 헌법기관에 대한 최초의 조직적 정치 테러라는 점에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퇴행시킨 결정적 한 방이었고, 이후 40년간 빨갱이를 내세운 반공독재의 시초가 되었다. 따라서 그 진상 규명은 결코 미룰 수 없는 중차대한 정치적 과제다.

▲ <국회 프락치 사건의 증언>(김정기 지음, 한울 펴냄)ⓒ한울

이 책은 어떻게 나오게 되었나

최근 김정기 한국외대 명예교수가 펴낸 <국회프락치사건의 증언>(한울 펴냄)은 1949년 국회 프락치 사건의 진상은 무엇인가, 이후 이 사건은 한국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그리고 이 사건이 유족들에게 어떤 희생과 피해를 강요했나를 종합적으로 파헤친 역저다.

김 교수가 이번 책을 내게 된 배경에는 기막힌 사람들의 인연이 얽혀있다. 김 교수는 이미 2008년 9월 <국회 프락치 사건의 재발견 1> <국회 프락치 사건의 재발견 2> <국회 프락치 사건 재판 기록 : 미 국무부 외교문서>(한울> 등 모두 3권, 1000쪽이 넘는 방대한 연구서를 발간했다.

김 교수는 역사학자도 법학자도 아니다. 한국 언론학회 회장과 방송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정치커뮤니케이션 전공의 원로 언론학자다. 그런 그가 국회 프락치 사건에 매달리게 된 것은 한국의 민주화를 진정으로 염원했던 한 미국 외교관과의 인연 때문이다.

외국인이 쓴 최초의 본격적인 한국 정치 연구서인 <소용돌이의 한국 정치(Politics of Vortex : 초판 1968년, 한울에서 번역 출간)>의 저자 그레고리 헨더슨(1922-88년)이 그 사람이다. 1948년 주한 미 대사관 3등 서기관으로 외교관 생활을 시작한 그는 사건 당시 일찌감치 국회 프락치 사건 재판의 중요성에 주목해 15회 공판 과정 전체를 기록했고, 이 사건의 정치적, 법적 정당성에 대한 자신의 논평을 덧붙여 국무부에 보고했다.

이 사건이 이승만 반공독재를 강화하는 반면 신생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는 결정적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봤던 그는 1963년 예기치 않은 외교관 퇴임 후에도 이 사건에 파고들어 1972년 관련 예비논문을 발표했고, 그해 7월 한 달간 한국을 방문해 오제도, 사광욱 등 당시 재판을 진행했던 검사와 판사 등 관련자들을 인터뷰했다. 헨더슨은 이후 한미 관계 전반을 다룬 책을 내기로 하버드대 출판부와 계약하고 연구를 계속하다가 1988년 10월 16일 불의의 사고로 별세했다.

1986년 12월 컬럼비아대학에서 열린 한국의 언론자유에 관한 세미나에서 발표자와 방청객으로 만난 김정기 교수와 헨더슨은 이후 2년 가까이 교유했고, 헨더슨의 별세 이후 김 교수가 그의 연구자료를 모두 물려받아 국회 프락치 사건의 전모를 파헤친 것이다.

하지만 2008년 9월 김정기 교수의 연구서가 발행됐을 당시 학계나 대중들의 관심은 미미했던 것 같다. 그 무렵, 필자도 김 교수로부터 '헨더슨 자료 입수' 얘기를 들었으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김 교수의 연구가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프락치로 낙인찍혔던 소장파 의원의 유족들이 그의 저서에서 발언의 용기를 얻은 것이었다. 책 발간 5년 후인 2013년 9월 28일 신성균 제헌의원의 막내아들 신현국 씨가 김 교수에게 이메일을 통해 자신이 쓴 원고 <아버지를 위한 변론>(에세이스트사 펴냄)을 보내면서 <국회 프락치 사건의 재발견>이 원고를 쓰게 한 결정적 동기가 됐다고 고백했다. 이 원고는 2018년 같은 제목으로 출판됐다. 이에 앞서 2012년 김옥주 의원의 조카 김진휴 씨가 <산하, 은혜의 삶: 김진휴 회고록>(정민사 펴냄)을 펴냈다.

그리고 2019년 11월 김옥주 의원의 아들 김진원 씨가 한울 출판사를 찾아와 김정기 교수의 저서 세 권을 한 권의 축약본으로 만들어 국회 프락치 사건을 재조명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이후 김진원 씨를 몇 차례 만나면서 김 교수는 뜻밖의 사실을 발견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쓴 책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즉 자신이 쓴 "프락치 사건의 '재발견'이 (피해자 유족의) '증언'으로 진화"한 것이다.

특히 김진원 씨는 노일환 의원의 조카 노시선 씨가 남긴 장문의 유고(2019년 1월 별세)를 전하면서 다음과 같은 노 씨의 말을 전했다.

"내가 <국회 프락치 사건의 재발견>이라는 책을 우연히 발견했네. 그때 나의 마음은 깊이 숨은 용광로가 폭발하는 기분이었네. 내가 반드시 백부님의 진실을 밝히겠네."

반공신화 속에 억눌렸던 진실 규명의 욕구가 폭발했다는 뜻이리라.

결국 김 교수는 신성균, 김옥주, 노일환 등 이른바 '프락치 의원' 가족들의 피어린 증언을 차례로 접하면서 새로운 책을 쓰게 된 것이다. 이들이 겪은 수모와 고통을 기록하는 것은 물론 이들 가족사의 비극이 신생 대한민국이 겪은 민주주의 퇴행과 반공독재의 역사와 깊은 접점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여기에 김 교수 자신이 지인의 밀고로 6.25 당시 납북된 민세 안재홍 선생의 손녀사위라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전작 <국회 프락치 사건의 재발견>이 사건 자체의 진실 규명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 <국회 프락치 사건의 증언>은 '프락치 의원' 가족들이 이후 겪었던 고통에 중점을 두며 이 사건이 한국 민주주의에 미친 악영향을 파헤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국회 프락치 사건의 증언>(김정기 지음, 한울 펴냄)에 수록된 사진. ⓒ한울

소장파 의원 13명, 그들은 남로당 프락치였나

이문원, 노일환 등 소장파 의원들은 왜 이승만 정치 테러의 대상이 되었을까? 그것은 제헌의회에서 이들이 진정으로 민의를 대변했기 때문이다. 반민특위 설치, 외국군 철수 결의안, 평화통일 촉구 등이 그것이다.

1948년 5월 10일 치러진 총선에 김구, 김규식 등 남한 단독정부 반대세력은 참여하지 않았다. 그 대신 젊은 정치 지망생들이 대거 참여했다. 총선 결과 이승만 계열의 대한독립촉성회 55명, 한민당 29명이 당선된 반면 이들 젊은 정치 지망생들은 무려 85명이나 당선됐다. 바로 이들 소장파 무소속 의원들이 국회 내 최대 세력을 형성하면서 반민족행위자처벌법 제정, 외국군 철수 결의안 등을 주도했다. 결국 이승만의 최대 정적으로 등장한 소장파 의원들을 제거하기 위해 단행된 것이 국회 프락치 사건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국회 프락치 사건은 사법재판을 가장한 정치 테러이자 의회에 대한 쿠데타에 다름 아니었다. 우선 현역 국회의원이었던 이들을 경찰이나 검찰이 아닌 헌병대에 가두고, 변호사 접견과 가족 면회 등을 일체 불허한 채, 전기고문 등 가혹한 고문에 의한 자백만을 바탕으로 이들의 유죄를 확정했기 때문이다.

김옥주 의원의 조카 김진휴는 20일간 계속된 고문의 실상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전한다.

"방첩대, 헌병까지 포함된 군, 검, 경 합동조사단이 구성되어 필동 헌병사령부에서 본격적인 개별조사를 강도 높게 받았다. '명색이 이 나라 헌법을 기초한 내가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가' 하는 회의로 저항도 해보고, 계엄령 하도 아닌데 군이 조사에 개입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요 위법한 짓이라고 항변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매찜질이었고, 수시로 당하는 전기고문은 인간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도 남음이 있었다 한다.

여름철이라 활딱 벗기고 나신으로 콩크리트 바닥에 꿇어앉히고 물고문 등을 가하는 것을 당하고 나니 인간이 이렇게 잔인할 수 있는가, 인간은 동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고 한다. 그러면서 "형수님, 저는 이제 아이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는 말에 어머님은 펑펑 우시고 말았다."(<산하, 은혜의 삶> 719쪽)

당시 이승만 행정부는 남로당 특수공작원 정재한이라는 여인이 자신의 음부에 국회 프락치의 실체가 담긴 암호 문서를 숨겼다가 개성에서 체포, 발각됨으로써(6월 16일) 소장파 의원들이 남로당 프락치라는 증거를 확보했다는 엽기적 시나리오를 제시해 대중들을 충격과 경악에 빠뜨렸다(증제1호). 그러나 김정기 교수는 이는 한 편의 저질 정치 코미디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한다.

우선 결정적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정재한은 프락치 의원 공판에 단 한 번도 출석하지 않았다. 1950년 2월 의원 측 변호인이 정재한에 대한 증인 신청을 했을 당시에는 이미 총살형을 당한 뒤였다. 당시 오제도 검사는 정재한의 증인 채택을 극력 반대했고 사광욱 판사는 이를 받아들였다.

1972년 7월 국회 프락치 사건 조사를 위해 서울을 방문한 헨더슨은 정재한 등에 대한 사형 명령서 문건을 확보했다. 신태영 육군 참모총장 대리 명의로 된 이 처형 명령서에는 1949년 9월 3일 정재한이 다른 두 명의 남로당 연락책과 함께 별도의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11월 28일 사형 명령이 하달됐으며 12월 6일 실제 총살이 집행된 것으로 돼있다. 6회 공판(12월 4일) 이틀 뒤였다.

그런데 담당 검사였던 오제도는 1972년 헨더슨과의 인터뷰에서 태연히 새빨간 거짓말을 했다. 즉 정재한이 증인으로 출석하지 않은 것은 그녀가 암호 문서의 운반자에 불과해 판사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면서 "정재한이 전향해 풀려났을 것이며 아마도 보도연맹에 넘겨져 지금 한국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또한 담당 판사 사광욱은 "증제1호(정재한)를 믿은 근거는 무엇인지" "정재한을 증인 채택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지"라는 헨더슨의 질문에 대해 "그대로는 기억나지 않지만" "증제1호의 신빙성을 확신했기에 (증인으로) 부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대답했다.

정부가 주장한 가장 중요한 증인을 그 윗선인 두 명의 남로당 간부와 함께 국회 프락치 사건 재판이 진행되는 도중에 군법회의를 통해 비밀리에 처형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김정기 교수는 정재한 등을 증인으로 출석시킬 경우 변호인의 반대신문 등에 의해 사건 조작이 드러날 것을 우려해 제거해 버린 것으로 추정한다.

특히 2019년 입수된 노일환의 조카 노시선의 유고에는 14회 공판(2월 4일)에서 검찰측 증인 김경호(증제2호)가 '노일환은 남로당 당원'이라는 취지의 거짓 증언을 했다가 노일환의 추궁에 "오 검사님이 시키셨어요"라고 실토했으며 이에 화가 치민 오제도가 증인의 귀뺨을 올려붙였다는 현장 방청객 김홍기의 목격담이 실려 있다. 김홍기는 이 장면을 보고 '노일환 재판은 조작'이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또한 재판 당시 소장파 의원들은 자신들의 자백이 살인적인 고문에 의한 거짓 자백임을 거듭 호소했으나 사광욱 판사는 이들의 호소를 무시했다. 사전에 짜인 각본대로 재판을 강행했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당시 재판을 현장에서 관측했던 헨더슨은 사건 희생자들인 13명의 제헌의원들이 "사건 아닌 사건(non-event)", "역사 아닌 역사(non-history)"에 연루되어 "역사적 무명인간(historical non-person)"으로 사라졌다고 짚었다.(1972년 4월 21일 컬럼비아대학에서 열린 한국 세미나에서 주제발표)

헨더슨은 1950년 11월 30일 한국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새 임지인 독일로 떠나면서 '한국에서의 미국의 정치적 목적에 관한 비망록'이라는 장문의 문서(60쪽)를 남겼는데, 여기에서 그는 "민주주의 정부를 세운다는 미국 대한정책의 목표는 실패"했으며 특히 국회 프락치 사건은 의회주의에 대한 쿠데타였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이 쿠데타를 방치했다고 비판했다.

또한 김정기 교수는 제헌의회가 헌법 제정을 시작으로 대통령(이승만) 부통령(이시영) 선출과 국무총리(이범석) 인준 등 초대 행정부를 탄생시킨 어미라는 점에서, 국회 프락치 사건은 기형적으로 커진 자식(이승만 행정부)이 어미(제헌의회)에게 발길질을 거듭해 반신불수로 만든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이어 국회 프락치 사건은 "반공을 빙자한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이었으며 신생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퇴행하는 분수령"이었고 이후 "반공 신화를 우리 사회에 고착시키는 텍스트가 되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이승만 이후 전두환 정부 때까지 고문과 협박으로 확보한 거짓 자백을 바탕으로 정치적 반대자를 빨갱이로 만들어 제거하는 반공독재는 우리 정치의 유구한 전통이 되고 만다. 부산 정치파동, 조봉암 법살, 인민혁명당 사건, 학원 프락치 사건 등이 그것이다.

예컨대 이승만은 1952년 여름 부산 정치파동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관철시키면서 재선에 성공한다. 국회 선출로는 재선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1952년 1월 직선제 개헌을 시도하지만 찬성 18 반대 143의 압도적 표차로 개헌에 실패한다. 하지만 그해 여름 계엄령 선포와 함께 일부 의원이 국제공산당과 결탁했다는 거짓 소문과 함께 의원 50명을 버스로 강제 연행하는 등 협박과 회유 끝에 7월 4일 찬성 163 반대 0 기권 3의 압도적 찬성으로 직선제 발췌개헌을 관철한 것이다.

'프락치' 의원들은 왜 북한행을 택했나

6.25 이후 이른바 '프락치' 의원들의 북한행에 대해 저자는 "생존을 도모한 불가피한 월북이라는 인상"을 받는다고 밝혔다. 월북이라 하면 자발적 선택이라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프락치 사건으로 살인적 고문을 당해본 소장파 의원들로서는 서울이 수복될 경우 이승만 정부가 자신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란 공포 때문에 북한행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예컨대 김옥주 의원은 "북으로 가지 말고 여기 남아 자수하고 가족하고 살면 좋겠다"는 형수의 권유에 대해 "이 박사가 나를 잡으면 또 죽일라 할 것이니 가야 한다"며 북으로 떠났다고 한다.

당시 이승만의 광기 어린 정치 테러에 대한 중도파 정치인들의 공포는 대단한 것이었다. 일례로 강원용 목사 회고에 따르면 9.28 수복 이전 안재홍은 서울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안재홍의 비서 조규회는 그 이유에 대해 "피난 가고 싶어도 이승만이 전쟁이라는 기회를 이용해서 자신의 정적을 모조리 공산당으로 몰아 총살한다는 얘기가 있어 내려가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피난도 못 가고 숨어 계신답니다"라고 말했다 한다.

가족, 후손들의 고통

독재 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에 의해 '남로당 프락치'로 낙인찍혔던 제헌의원 13명 중 12명은 6.25 이후 북한행을 택함으로써 스스로 북한 편임을 입증한 꼴이 되고 말았다.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나 남한에 남은 가족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무고함을 주장할 근거가 사라진 셈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노일환은 전북 순창의 만석꾼 집안 출신이자 <동아일보> 기자를 거친 한민당원으로 결코 공산당이 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프락치 사건 최후 진술에서 "나는 사상적으로도 민족주의자며 정치적으로도 민주주의자며 인간적으로는 자유주유자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북한행 뒤 동생 노국환은 사흘간 고문을 당했고 사촌형이자 집안의 종손은 고문 후유증으로 결국 다리 한쪽을 절단했다.

김옥주 의원의 아들 김진원은 하버드대 건축학과 입학허가를 받았으나 신원 조회에 걸려 유학을 포기해야 했다. 이후 건설기업에게 취직한 그에게 박정희 정부는 예멘 진출을 권고했다. 조건은 북한 대사관과 접촉하라는 것, 즉 이중 첩자 노릇을 하라는 것이었다. 프락치로 조작한 사람의 아들을 진짜 프락치로 활용하려 한 것이다. 1980년대 학원 프락치의 선구라 할 수 있다.

김병회 의원의 장남은 사법고시 1차에 합격했으나 신원 조회에 걸려 탈락, 자살을 시도했고 셋째 아들은 아예 법대 진학을 포기하고 서울공대에 진학했다.

국회 프락치 사건은 한국전쟁 이후 '법원 재난에 기인한 민형사사건 임시조치법'에 의해 사건에 대한 검찰의 공소 자체가 멸실되었다. 법적으로 진실을 규명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이 미완의 정치재판 사건을 덮어둔 채로 그냥 방기해도 되는 것일까? 저자 김정기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프락치' 피고인들이 수사기관에 고문당한 실상이 여실히 드러나고 그 재판마저 엉터리 재판임이 밝혀진 이상 민주화된 대한민국은 국가 폭력에 무참히 희생당한 가족과 후손에게 어떤 보상을 해줘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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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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