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지 불과 보름여가 지났을 무렵.
남하하는 인민군의 파죽지세에 밀린 국군은 7월 초순께 전주고(당시 6년제 전북중학교) 교정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15~18세의 재학생들을 긴급 소집했다.
일부는 자원으로 대부분은 소집명령에 따라 응소한 이들은 교복 그대로 군번조차 없이 전장에 투입된 '학도의용병'이었다.
남하하는 국군을 따라 이동하던 학도의용병들은 주둔하는 도시에서 틈틈이 군사훈련과 사격술 등을 익혔다.
전주에서 순천을 거쳐 진주, 창원, 김해, 부산에 도착한 이들은 다시 기차를 타고 대구로 이동해 약 한 달 여만에 개인화기인 M1 소총을 지급받고 전장에 배치됐다.
학교를 떠나 올 때 입었던 교복과 운동화, 교모가 이들이 갖춘 복장의 전부였다.
이렇게 참전한 전북의 학도병은 3000여명으로 전주고, 북중 학생들은 약 400여명에 달했다.
이들 가운데 전장에서 무사히 돌아온 이들은 350여명. 나머지 52명은 끝내 전쟁터에서 산화했거나 실종,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인민군에 밀리던 국군이 UN군과 함께 반격을 시도해 서울과 전주를 되찾은 9.28수복 이후 다시 학교로 돌아온 학도병들은 전사로 확인된 38명의 동문들을 잊지 않기 위해 교정에 충혼비를 세웠다. 1951년 9월28일, 포성이 멎지 않은 9.28수복 1주년 때였다.
전주고의 충혼비 앞면에는 당시 대통령인 이승만의 글씨가, 뒷면에는 신익희 국회의장의 휘호를 새겨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당시까지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던 나머지 14명의 이름은 충혼탑에 새길 수가 없었다. 어쩌면 살아돌아 올 수도 있었던 동문의 이름을 새길 수 없어 빈 공간으로 두고 생환하기만을 간절히 염원했다.
그렇게 세월은 무심히 흘러 70년.
전주고·북중총동창회(회장 이강국 전 헌법재판소장)는 2019년 개교100주년을 준비하면서 사료를 모으는 과정에 전국 학도호국단 연합체인 ‘중앙학도호국단’이 60년대 초에 발간한 책자를 입수했고 면밀히 대조한 끝에 충혼비에 빠져 있던 8명의 동문 전사자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중학교 6학년(지금의 고3)이던 안근희, 이종렬, 최문갑, 허봉규를 비롯해 5학년인 김남주, 김대술, 3학년인 박규완, 이철근 등이었다.
이들은 각각 포항과 인천, 강경, 낙동강 등지에서 벌어진 격전의 과정에 안타깝게 산화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총동창회와 전주고등학교는 1일 오전 충혼탑 앞에서 '6.25 전몰동문 8인 추각 고유제'행사를 열었다.
뒤늦게나마 충혼탑에 이름을 새기는 사연을 고하고 산화한 넋의 명복을 비는 취지로 마련됐다.
이날 행사에는 당시 전주고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전종환 전 군산 시장(90)과 임명환 전 완주군수(90)를 비롯해 유족 대표, 전주고 박진홍 교장과 재학생 등이 참석했다.
전종환 전 시장은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당시 상황을 어제 일처럼 소상하게 소개하며 "후세 사람들이 앞선 사람들의 희생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당시 2명의 동기생이 희생됐는데 오늘 확인해보니 명단에서 빠져 있다"며 "이번에 추각하는 명단에 포함돼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김영선 전주고 총동창회 사무처장은 "오늘날의 영광은 과거 선배님들이 쌓아온 피와 땀의 결실임을 잊지 않고 있다"면서 " 앞으로도 꾸준히 참전 전몰 동문을 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고 김대술 학도병(당시 5학년)의 유족은 "그동안은 막연하게 6.25때 희생되신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오늘 행사를 지켜보면서 자취를 알 수 있었다"면서 "잊지 않고 기억해 준 동문과 학교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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