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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폭 문제, '때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때릴 수 없음'을 알아차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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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폭 문제, '때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때릴 수 없음'을 알아차리는 것

[창비 주간 논평] 학교폭력, 과연 학교만의 책임일까?

아이가 누군가를 때렸을 때 어른들이 하는 전형적인 질문이 있다. "때리면 돼, 안 돼?" 비슷한 상황이 반복될 때 어른들의 질문은 변주된다. "때리면 된다고 했어, 안 된다고 했어?"

얼마 전 배구계에서 시작된 학교폭력 가해자에 대한 지목과 문제제기는 스포츠계를 넘어 연예계로 확산되었다. 이렇게 제기된 문제는 가해자로 지목된 이가 사실을 인정할 경우 사과와 활동중단, 또는 해당 분야 퇴출이라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때 가해자로 지목된 이가 가해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사건은 '진실 공방'의 형태를 취하다가 '법적 공방'으로 전환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한국 사회의 학교폭력 공방은 크게 낯설지 않다. 학교에서 학교폭력이 다루어지는 방식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학교폭력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혀 없던 시절에 비하면 학교폭력이 '문제화'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변화임은 분명하다. 이런 변화가 만들어지기까지 수많은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노고가 있었다. 2004년 4월,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이하 학교폭력예방법)이 제정되었고 학교폭력자치위원회가 운영되기 시작했다. 폭력의 발생을 인지하고 인정에 다다르는 것도 지난한 일이었지만 적절한 처벌에 합의하는 것도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가해와 피해를 명료하게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건들도 분명히 존재했으며 가해자의 사과가 피해자에게 위로가 되지 못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교사들은 중재자 또는 조정자의 역할을 상실했으며 학교폭력 관련 업무 과중에 시달렸다. 무엇보다 학교폭력을 예방하기 위해 마련한 법적 절차가 '학교폭력 전담 변호사' 시장의 활성화로 이어질 것을 누가 예상했을까.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학교폭력예방법의 시행은 학교에서 발생한 문제가 '법적 문제'로 직진하는 경로를 열어주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해결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사라지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그 한계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 중 하나로 학교폭력예방법은 그간 20여 차례 개정을 거쳤다.

학교폭력에 대한 문제제기와 가해 사실의 인정, 피해자가 원하는 사과와 보상이 이루어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 진행되고 있는 '가해자에 대한 지목'만으로 학교폭력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가해자 한 명을 지목하는 방식은 그 가해를 가능하게 한 구조와 환경을 부수적인 것으로 만든다. 한 명의 가해자에게 모든 책임을 귀속시킴으로써 한 사람의 일탈 또는 부정이라는 깔끔한 결론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학교폭력이 가능했던 것은 그 과정에 대한 방조와 묵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방조와 묵인은 폭력을 용인하고 인내하는 사회문화 및 때로는 폭력을 권장하기까지 하는 구조에 근거해 작동했다. 가해자를 색출하고 처벌하는 방식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회는 학교폭력의 책임을 학교에만 묻고자 한다. 한 명의 가해자를 색출하는 방식과 유사한 접근이다. 학교폭력은 학교에서 벌어진 폭력을 의미하지만 그것은 학교만의 책임이라고 할 수 없다. 사회 전반으로 눈을 돌려보면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에 대한 사측의 대응, 국책사업을 반대하는 현지 주민 및 시민단체에 대한 정부의 문제해결 방식, 재개발 계획에 저항하는 주민들에 대한 공권력의 개입 등은 항상 강압적이고 무차별적인 폭력으로 귀결되었다.

폭력을 해결 수단으로 동원하는 사회에서 학교폭력을 해결하겠다는 기획이 과연 실현 가능할까? 무기를 통해 누군가를 죽여서라도 우리의 안보를 지키겠다는 군사주의 안보국가에서 학교폭력의 해결을 논할 때의 아이러니를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패권주의와 서열주의, 군사주의와 인종주의, 성차별주의와 종차별주의는 교차되고 증폭하며 폭력을 반복, 재생산한다. 폭력을 가능하게 한 구조와 환경에 대한 질문, 모두를 폭력의 공모자로 가정하는 불편한 관계를 직면하지 않고는 학교폭력 문제의 해결은 요원하다.

"때리면 돼, 안 돼?"의 질문은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다. 법으로도 막지 못하는 학교폭력을 해결하는 실마리는 폭력을 단순히 금지하는 데 있지 않다. 폭력이 문제해결의 수단으로 고려되는 이상 학교폭력의 근절도 쉽지 않다. 어떤 경우에도 폭력을 단호히 거절할 수 있는 힘은 나와 마주한 타자, 그 유일한 존재를 내가 감히 때릴 수 없음을 알아차리는 것에, 그리하여 '때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때릴 수 없음'의 상태가 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불과 몇 주 전, 5·18 당시 공수부대원이 자신의 총격으로 사망한 희생자의 가족을 찾아 용서를 구했다. 41년 만의 사과였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구조 뒤에 숨지 않고 자신을 드러낸 가해자에게 피해자 가족은 용기 내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학교폭력의 해결을 고민한다면, 그 해결의 시작은 이 사회가 행해온 폭력의 역사를 성찰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폭력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도록 서로를 깨우는 관계의 공동체를 꾸려가야 한다. 어렵지만 학교는 그 관계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한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숨 가쁜 학사일정 중에도 '관계'를 놓치지 않으려는 학교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학교들에는 이왕이면 새 학년 시작 전, 학급의 권력관계가 고착화되기 전에 서로 배움의 시간을 마련해줄 것을 요청한다. 익숙한 힘의 문법이 교실을 장악하기 전에 낯선 존재를 마주하고 대화하는 그 시간은 이후의 삶과 관계를 완전히 바꾸어놓을 수 있다. 내 눈앞에 있는 존재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감각, 타자의 존엄을 인정하는 경험, 서로의 존엄을 훼손하지 않겠다는 선언은 '때리지 않음'에서 '때릴 수 없음'으로 이행해가는 과정이 된다. 마주한 존재의 존엄을 느끼는 그 순간은 영혼에 분명한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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