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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강제 철거했던 상주읍성, 성벽위치 최초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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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강제 철거했던 상주읍성, 성벽위치 최초 확인

1912년 성벽 철거 후 기저부(벽의 몸체 부분 아래의 기초시설)부분만 일부남아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됐던 경북 상주읍성의 성벽이 최초 확인됐다.

29일 상주시에 따르면 인봉동 유적에서 발굴된 상주읍성은 성벽은 체성부(성곽의 부속시설을 제외한 성벽의 몸체 부분) 아래의 기저부(벽의 몸체 부분 아래의 기초시설)만 확인됐다. 이는 1912년 일제의 읍성 훼철 당시 지상의 성벽은 철거됐고 성벽 기저부 위쪽이 임시 도로로 사용됐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사진엽서에 담긴 1910년대 상주읍성의 모습을 찾아볼수있는 시장 광경ⓒ상주시

당시 지적도 상에 ‘성도(城道)’로 표기됐던 부분이고 일제 강점기 이후 성벽 자리 위에 건물들이 건축돼 기저부도 상당 부분 훼손된 상태로 발굴됐다. 발굴된 기저부의 규모는 길이 760㎝ 정도로, 조사 대상지의 북쪽과 남쪽 조사 경계 밖으로 이어져 있다. 너비는 성벽 외벽 쪽인 동쪽 지대석에서 내벽 쪽인 서쪽으로 470㎝ 정도만 확인됐고 나머지는 유실됐다.

높이는 40㎝ 정도만 확인됐고 지대석은 가운데 부분이 유실되고 5매만 확인됐고 조사 경계 밖으로 계속 연결되는 형태를 보였다. 이와 별도로 성벽 동쪽의 일제 강점기 건물지 지반 보강을 위해 훼철된 성벽의 큰 성돌이 다수 사용됐고 축조 시기는 성벽 기저부의 다짐층과 보강층에서 조선시대 전기 백자종지편이 출토돼 조선 전기로 예측된다.

문헌에 따르면 상주읍성은 1385년(고려 우왕 11년)에 축조된 후 일제(日帝)의 읍성 훼철령(1910년)에 따라 헐리게 되는 1912년까지 520년 이상 유지됐다. 고려 말 왜구 침임에 대비해 만들어진 읍성은 조선 초기 경상감영(慶尙監營)을 둠으로써 당시 경상도의 행정·문화·군사적 중심지 역할을 했다.

지금까지 지표조사와 연구를 통해 성벽의 위치에 대해 추정만 했을 뿐 그 실체는 확인하지 못했다. 2019년 조사 대상지의 북서쪽 40m 지점인 인봉동 73-7번지 유적에서 상주시 상주박물관이 시행한 상주읍성의 해자(垓子: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물이 흐르도록 만든 곳)가 처음으로 발굴된 성과가 있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성벽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조사 대상지가 일제 강점기(1913년)에 제작된 지적도에 성도(城道)로 표시된 부분에 해당함을 현재 지적도와의 비교를 통해 확인했고, 바로 이 자리가 상주읍성의 북동쪽 성벽임을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냈다. 지금까지 상주읍성 성벽에 대한 발굴조사는 2019년 해자 조사에 이어 이번 성벽 기저부 조사가 두 번째다.

이번 한국문화재재단의 조사는 소규모 면적에 대한 성벽의 기저부 조사이지만, 문헌 기록으로만 확인되던 상주읍성 성벽의 실체와 위치를 정확히 찾았다는 점에서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상주시는 이를 통해 상주읍성의 전체 위치 등을 찾는 한편 읍성 정비·복원의 계기로 삼을 계획이고 발굴 현장은 30일 일반에 공개된다.

강영석 상주시장은 “지역에서 처음으로 상주읍성 성벽이 확인됨에 따라 시에서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상주읍성 복원 사업에 탄력을 받게 됐다”며 “앞으로도 상주읍성의 실체를 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 기울일 것이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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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근

대구경북취재본부 박종근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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