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의 봇물이 터지고 있다.
ESG는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거버넌스(Governance)의 머리글자를 딴 말로, 초기에는 기업 경영과 평가에 주로 사용된 개념이나 점차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에 국한하지 않고 지속가능성 전반을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유력한 방식으로 발전하는 중이다. ESG는 개별 기업을 넘어 자본시장과 한 국가의 성패를 가를 개념이다.
가장 센 격류는 경제계에서 목격된다. 7년 7개월의 임기를 마친 박용만 회장의 뒤를 이어 자타 공인 ESG 전도사 SK 최태원 회장이 오는 29일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에 취임한다. 최 회장이 '전도사' 적격인지는 일단 넘어가고 열정적이란 사실만 확인하자. 상의는 최근 인사에서 기업문화팀의 명칭을 'ESG 경영팀'으로 기민하게 변경했다. 최 회장의 의중이 반영됐는지, 알아서 헤아렸는지는 확인해 보지 않았다.
국내 주요 금융그룹인 하나금융은 김정태 회장 밑에 'ESG 부회장'직(함영주)을 신설했다. 하나금융은 3대 전략의 축을 ESG, 플랫폼, 글로벌로 설정하고 조직을 정비했다. 함 ESG 부회장이 총괄하는 ESG 경영과 관련하여 이사회 안에 '지속가능경영위원회'를 신설했다. '소비자리스크관리위원회'를 새로 만드는 한편 기존 사회가치팀을 ESG기획팀으로 개편했다.
삼성그룹의 양대 보험 계열사인 삼성생명과 삼성화재가 나란히 ESG 위원회를 만든 것 또한 눈여겨볼 대목이다. 삼성이 하면 재계 표준이 되는 경향이 없어졌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후죽순으로 ESG 위원회가 설치되는 광경이 그려진다.
언론에서도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감지된다. 약속이라도 한 듯 여기저기서 ESG를 대서특필하고 있는데, 며칠 사이에 유력 경제지와 영자지의 1면 머리기사가 ESG로 채워진 것을 보고 놀랐다.
정치인 중에서는 이낙연 전 총리가 ESG 의제 확산에 열심이다. 이미 더불어민주당 대표로 있을 때 당대표 연설에서 ESG를 언급했고, 지난 23일에는 중앙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미래를 여는 ESG 책임국가'라는 주제로 특별강연을 진행했다.
현재의 ESG 국면은 언론과 경제계가 활발하고, 정치권은 막 점화한 단계로 보인다. 시민사회 등 다른 쪽의 반응은 아직 그닥 신통하지 않은 듯하다. 시민사회에서 ESG 운동을 했다고 해야 할 나로 말하면 아무튼 이런 움직임이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긴 하다. 동시에 시민사회에서 여태껏 제대로 된 ESG 흐름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2007년 이후 지금까지, ESG 의제를 천착했다고 하기는 민망하고 아무튼 주변을 맴돌며 지냈는데 최근의 (내가 보기에) 갑작스러운 'ESG 폭발'에 이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먼저 드는 감정은 앞서 말했듯 '반갑다'이다. 지속가능성, 사회책임을 설명하는 현실적이고 강력한 키워드인 ESG가 그동안 응당 받아야 할 대접을 못 받고 내내 변두리 사회의제로 취급받다가, 돌연 핵심의제로 부상하고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사회책임이 실현되는 지속가능한 ESG 국가. 그런 나라의 가능성이 조금씩 엿보이고 있으니 고마운 일이다.
다른 감정은 '걱정스럽다'이다. 이 분출이 건전한 사회변혁의 물꼬를 트게 될지 아니면 화투 용어로 피박 면하려고 피 하나 확보해놓고 보자는 면피용 행사에 그칠지 아직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경제계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넘쳐나는 명칭과 직책이 그것에 호응하는 합당한 내용과 가치를 담아낼지 조금 더 지켜보자는 유보의 감정이 강하게 든다. 과거 '그린'이란 말이 한창 유행할 때 '그린 워싱(Green Washing, 위장 환경주의)' 말이 동시에 유행했다.
'ESG 정착'이 될지 'ESG 워싱'이 될지 불확실한 가운데 ESG가 일상적인 단어로 자리를 잡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간접적으로 아는 어느 대학생이 삼성 인턴에 지원서를 내면서 ESG에 관해 적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대학생이라면 생활 속의 ESG 없이 합격을 위한 ESG를 부르짖었다고 해서 흉은 아니다. 합격 후에 생활 ESG를 실천하면 그만이다.
유력 정치인이나 기업인, 유수 기업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낙연 전 총리나 최태원 회장이, 일화의 인턴처럼 특정한 목적을 위해 ESG를 활용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믿고 싶지도 않다. 그럼에도 우리 입장에서는 ESG를 표방한 유력 정치인이나 기업인, 유수 기업이 알아서 잘하겠거니 하고 손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ESG가 사회의제로, 생활의제로 뿌리를 내려 정치인과 경제인이 그것을 외면하고는 정치활동이나 경제활동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게 그들의 의지나 선의에 기대는 것보다 훨씬 나은 방책이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ESG 역량은 미약하고 생활 속에도 ESG가 전혀 자리 잡지 못한 상황이니, 삼성 인턴 지원서에 ESG를 쓴 대학생은 물론이고 최 회장과 이 전 총리 같은 사람들과 협력해서 ESG의 (비정상적?) 격류를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가게 하는 게 나쁘지 않겠다. 강력한 생활 ESG로 경제와 정치의 ESG를 불가역적인 것으로 만들어 'ESG 나라' 만들기를 앞당기는 상상. 삼성 인턴을 지원한 그 대학생이 지원서에 쓴 내용도 비슷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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