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누구나 좋아하는 노래가 한 곡씩은 있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십팔번’이라고 한다. “네 노래 십팔번이 뭐야?”라고 하거나, “그건 내 노래 십팔 번인데……”라고 하듯이 자기 애창곡을 말할 때 이런 표현을 써 왔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장기’라고도 할 수도 있다. 예전에는 이 말을 참으로 많이 사용해 왔는데, 지금은 다행스럽게 서서히 사라져 가는 편이다. 한 세대 전만 해도 노래할 때면 반드시 삽팔번을 찾았다.
이 ‘십팔번’이란 단어는 일본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17세기 무렵, 일본 ‘가부키’ 배우 중 이치가와 단주로라는 사람이 자신의 가문에서 내려온 기예 중 크게 성공한 18가지 기예를 정리했는데, 그것을 가부키 십팔번이라고 했다.(이재운 외, <알아두면 잘난 척하기 딱 좋은 우리말 잡학사전>) 이렇게 십팔번은 그 가문의 대표적인 희극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이것을 확대해석하면서 우리가 가장 잘하는 노래나 장기 등을 일컬어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유입되면서 ‘애창곡’이나 ‘잘 부르는 노래’ 등의 의미로 쓰이게 되었고 ‘장기(長技)’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국어사전에는 “자신이 갈고닦아서 가장 잘하거나 자랑으로 여기는 재주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일본어로는 ‘가부키주하치방(歌舞伎十八番)’이라고 한다. 가능하면 ‘애창곡’이라고 하면 좋겠다.
우리말 중에는 일본어에서 유래한 것도 참으로 많다. 위와 같이 일본어가 한자화하면서 바뀐 것도 있고, 일본식 한자어가 그대로 우리나라에 정착한 것도 많다. 혜존(惠存)이니 철학(哲學)이니, 가봉(假縫)과 같은 단어들은 일본식 한자어가 그대로 한국식 발음으로 굳어진 것들이다. 그런가 하면 일본식 한자어의 발음이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변하여 정착했는데, 그 의미가 조금 바뀐 것도 있다. 그 중 하나가 우리 젊은이들이 많이 쓰고 있는 ‘뽀록’이라는 말이다. 과거에도 많이 들어 왔지만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국어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아마도 한국어의 속어쯤으로 생각하는 독자들도 많을 것이다. 뭔가 일을 진행하다가 잘못되어 들통이 났을 때 “뽀록났다.”는 표현을 많이 한다. 원래 그 단어는 한국어에서도 많이 사용되고 있는 ‘남루’(襤褸 누더기 람(襤), 남루할 루(褸))다. 이것을 일본식으로 뽀록(ポロック(襤褸-남루한 옷, 누더기 옷))이라고 한다. 남루한 옷을 입으면 구멍이 숭숭 뚫려서 속이 다 들여다 보인다. 요즘 젊은이들이 즐겨 입는 청바지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까 바지에 구멍이 뚫려서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니까 이것이 변하여 ‘들통나다’라는 의미로 변하였고, 다시 우리말 사전에는 “속된 말로 ‘밖으로 드러나거나 알려지다’.”로 올라가게 되었다. 원래 ‘남루하다’는 단어는 다른 의미로 쓰이고, 일본을 통해서 들어온 ‘뽀록나다’는 ‘들통나다’의 의미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얼핏 들으면 ‘뽀록나다’는 우리말처럼 들릴 수 있다. “너 때문에 뽀록났잖아!”라고 쓰는 것과 같다.
언어란 참으로 재미있는 과정을 거치면서 성장한다. 저육(猪肉)이라는 돼지고기가 ‘제육볶음’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저육(猪肉)의 ‘저(猪)’자가 한자로 ‘제(諸)’자와 유사하게 생겼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저육’을 ‘제육’이라고 발음하게 되었고, 그것을 그대로 메뉴판에 적용하여 ‘제육볶음’이라는 반찬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원래는 저육볶음이라고 해야 하는데, 서울 사는 교양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다 보니 그것이 굳어진 것이다. 상식적으로 저팔계라고 부르지 ‘제팔계’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이 저팔계의 저(猪)자가 돼지라는 뜻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일본어를 받아들이면서 그대로 받아 사용한 것도 있고, 의미를 생각하여 바꾼 것도 있고, 일본식 한자어를 그대로 차용한 것도 있다. 많은 것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으니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루 빨리 일본식 어휘를 정리해서 우리말을 바로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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