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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여 회의 현장답사, 1535인 보절면민·500명 출향인이 함께 쓴 보절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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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여 회의 현장답사, 1535인 보절면민·500명 출향인이 함께 쓴 보절이야기

[프레시안 books] <보절면지(寶節面誌寶節面誌) 보배와 절의가 숨어있는 보절 이야기>

ⓒ이하 논형

50여 회의 현장답사와 1535인 전북 남원 보절면민과 500여 명의 출향인이 함께 쓴 보절 이야기가 발간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몸으로 쓴 살아있는 인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전라북도 남원시 보절면의 역사, 지리, 인류학적 보고서인 '보절면지(寶節面誌寶節面誌) 보배와 절의가 숨어있는 보절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남원시 보절면은 천황봉을 머리로 하는 만행산의 큰 품 안에 있다. 보절은 만행산의 12개의 줄기와 하천에서 흘러 내려와 12평파로 9개리와 40여 개의 마을로 형성된 곳이다. 12평파의 들판은 보절 사람들에게 생명의 원천이자 마음의 고향이다. 만행산은 백두대간의 한 줄기이고, 아울러 백두대간이 유라시아 대륙 곤륜연간의 한 줄기이다.

한마디로 보절은 천황봉 없이는 설명할 수 없는 고장이다. 만행산의 '천황봉(天皇峯)' 역사는 결코 일제 강점기에 창산개명된 것이 아니다. 천황봉이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는 만동에서 살았던 매헌 소산복(梅軒 蘇山福, 1556~1620년)의 시이다.

▲천황봉 전경ⓒ논형

이 책은 크게 여섯 가지 관점에서 학술적으로 의미 있는 새로운 점을 밝혀내었다.

첫째, 역사학의 관점에서, 승자 중심의 역사에서는 포착되지 않았던 백제의 역사를 규명하는 데도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 백제시대 보절은 거사물이었다. 이는 '신령스런 마을'을 뜻한다. 하지만 보절은 아주 슬픈 역사를 지닌땅이다. '보절'은 663년 3월에 백제를 지키기 위해 거물성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백제 병사들이 묻힌 곳이다.

이와 관련해서 백제의 군사 읍성이었던 거사물에 이 지역 일대를 관장하는 현청이 있었다는 주장을 새롭게 제안했다.'보절'이 가장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대는 7세기였다.

둘째, 지리학적인 관점에서 예컨대 공간적으로 지방과 한양의 관계가 남과 북의 시선으로 볼 때는 포착되지 않는 것들이 많은데 백제의 문제를 접근할 때는 동과 서의 시선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신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기에 백제의 역사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공간적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이는 이동이 중요하다.

남과 북이 아니라 동과 서의 시선으로 보절의 지리적인 특징을 보아야 한다. 그러한 시선으로 볼 때, 384년에 호승 마라난타가 가지고 들어 온 불교가 대략 130여 년 만에 영광의 법성포에서 천황봉에 있는 귀정사에 정착하게 된 배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보절'과 '귀정사'가 백제로 이어지는 실크로드의 끝에 있는 지역이라는 점을 새롭게 밝혔다.

셋째, 보절 역사와 이야기를 추적하면서 보절에 살았던 사람들이 남긴 문헌을 새롭게 발굴했다.

더 많은 책이 있겠지만, 특히 매헌 소산복의 <매헌집>과 안재직의 <희당집>은 보절의 역사를 해명하는 데 중요한 문헌이었다. 이 문헌에 대한 번역과 주해가 시급하다. 보절면 진기리에 살았던 소재준의 문집과 그가 수집한 만 권이 넘는 서책과 서당마을의 증손 양영철이 현재 보관하고 있는 단계 양재구의 100여 권이 넘는 서책 및 각종 자료도 보절면 차원에서 관리와 보존,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해둔다.

또한 상신마을의 전주 이씨 문집(李可哲: 思句齋公 文集 1卷 남원시 보절면 신파리 이강수 보관, 李敎政: 農隱公 文集 2卷 보절면 신파리이규수 보관)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다.

▲보절면 지도ⓒ논형

넷째, 유학(儒學) 연구의 관점에서, 보절에서 활동하던 유림이 기본적으로 사림 전통을 계승하였고, 선조 시대를 중심으로 꽃피웠던 성리학의 크고 작은 논쟁에 보절 유림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실을 조명했다.

이와 관련해서 조헌(趙憲, 1544~1592년)은 소산복을 '호남진유(湖南眞儒)'라고 예찬하는데, 소산복이 지행일치의 모범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실천을 강조하는 호남 유학의 특징이 오롯이 드러난다. 이에 대해 매헌 소산복을 위시해 많은 사람들이 의병 활동에 참여한 전거와 증거를 제시했다.

또한 보절의 유림이 다른 지역의 유림 그리고 한양의 유림과 어떻게 만나고 교류했는지 살피고, 이를 통해 보절이 지방의 궁벽한 향촌이 아니라 중앙과 거의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고장이었음도 밝혀두었다.

다섯째,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보절에 성씨 정착과정을 통해 보절에도 이른바 보절판 '디아스포라' 현상이 있었음을 발견했다. 성씨의 정착과 이주, 혼인 관계로 형성된 씨족 공동체가 매우 강력했음도 밝혀 두었다. 보절의 디아스포라 현상은 비단 보절만의 사례는 아닐 것으로 추정된다. 충청도, 경상도 등 대한민국의 어느 고장에 가도 이와 같은 디아스포라 현상은 발견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과 대한민국의 각 지방이 한편으로 혈통의 연결, 다른 한편으로 혼인의 인연으로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의 공동체로 묶여 있을 것이라는 점을 새롭게 제시했다.

마지막으로, 보절 이야기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역사를 밝히는 데 일조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이는 지역학연구, 즉 남원학과 호남학을 연구하는 데 길잡이 역할을 할 것이다. 특히 연구의 방법론과 관련해서 문헌 연구와 현장 연구의 결합이라는 점과 중앙에서 지방으로 내려오는 이른바 하향식이 아닌, 가장 낮은 바탕에서 높은곳으로 올라가는 상향식 연구의 사례를 제시했다. 이 점에서 이 책은 학술적인 의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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