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8일, 대통령의 국회 예산안 시정연설 중 역사적인 선언이 있었다. "2050년 탄소중립을 목표로 나아가겠다"는 대통령의 언급은 시민사회가 지속적으로 요구해 온 기후위기 대응 목표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제 대통령의 이 짧은 언급으로 기후위기 대응의 실마리가 풀리는 것일까?
역사적 선언
돌이켜보면 2020년은 '선언'의 해였다. 환경의 날이었던 6월 5일, 226개 기초지자체가 공동으로 '기후위기 비상상황'을 선포했다. 단체장이 공석인 두 군데를 제외하면 전국 기초지자체가 모두 참여한 것이었다. 9월 24일에는 국회가 본회의에서 '기후위기 비상대응 촉구 결의안'을 가결했다. 외연 상 국회가 정부의 비상한 대응을 촉구하는 모양처럼 비치지만, 한편으로는 '국회 내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관련 법제도 정비까지 결의한 것이다. 이는 국회가 '기후위기 비상상황'을 인정하고 선언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약 한 달 뒤, 예산안 시정연설을 위해 국회에 방문한 대통령까지 드디어 적극적 기후'변화' 대응을 약속했다. 기실 정책결정권자들이 기후위기 대응을 잘 하겠노라고 말하는 것 정도가 향후 지구와 인류의 미래를 좌우할 역사적 발화일 수는 없다. 문재인 대통령의 선언이 특별히 주목받는 까닭은 '2050년 탄소중립을 목표로' 나아가겠다는 대목 때문이다. 시민사회, 226개 기초지자체, 국회 모두가 요구한 것이 바로 '2050년 탄소중립'이었고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이는 답을 내놓은 것이다.
탄소중립 목표는 'net zero', '순배출제로'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온실가스의 배출량과 흡수량을 합해 '0'이 되도록 하여, 실질적으로 대기 중 온실가스 농도가 높아지지 않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UN IPCC의 '1.5℃ 특별보고서'에서도 지구 온도가 1.5℃ 상승함으로써 일어날 궤멸적 생태계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전 지구적으로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탄소중립이 기후위기 방지의 마지노선인 것이다.
아직은 선언뿐
탄소중립을 지향하겠다는 대통령의 발언이 역사적인 결정이었다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연설의 앞뒤 맥락을 살펴보면 역사에 남길 연설이라기에 다소 민망하긴 하다. 전체 연설의 주제 자체가 '예산안 시정연설'이었던 데다 코로나19 대유행이라는 상황이 맞물린 탓에 대통령은 대부분의 발언을 감염병 위기 극복과 경제회복을 강조하는데 할애했다. 그리고 코로나-경제 위기 극복을 위한 정부의 '한국형 뉴딜 사업'을 또 장황하게 설명하고, 한국형 뉴딜에 포함된 '그린뉴딜' 사업을 설명하는 중에, 탄소중립 목표라는 엄청난 과제는 한 마디로 압축되어 슬쩍 지나쳐갔다.
사실 우리 정부는 탄소중립 목표를 받아들이기를 주저해왔다. 올해 정부는 파리기후협약에 따라 UN에 제출해야 하는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 작성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2050 장기 저탄소 발전전략(LEDS-Long term low greenhouse gas Emission Development Strategies, 이하 LEDS)'이다. 연 초에는 LEDS 수립을 위해 정부가 구성한 사회비전포럼에서 검토안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5개의 배출목표 시나리오 중에 탄소중립은 없었다. 다만 포럼 내 청년 분과의 제안에 따라, '탄소중립 달성방안'을 곁다리로 검토하고 장기적 '지향점' 정도로만 남겨두었을 뿐이다. 탄소중립 달성 없이는 기후위기 대응 실패가 자명함에도 정부는 다른 목표를 세워도 괜찮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대통령이 국회에서 탄소중립 목표 지향을 약속한 상황에서 정부가 작성하는 LEDS에 탄소중립이 명시되지 않는 촌극은 상상하기 어렵다. 이제 2050 탄소중립은 과학적으로는 물론 행정적으로도 반드시 달성해야만 하는 목표가 되었다. 그러자면 어떤 노력이 수반되어야 할까.
2050 목표 강화됐는데 2030 목표는 그대로라니!
한국은 2018년 기준 7억2760만 톤가량의 온실가스를 배출했는데 이것이 역대 최고치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는 에너지·산업·건물·먹거리 등 거의 모든 측면에서 우리 사회가 온실가스 다배출 시스템에 점차 더 의존적이 되어 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2050 탄소중립 목표를 달성하자면 사회의 거의 모든 부문이 필연적인 대전환에 직면해야 한다는 뜻이다. 당연히 이 전환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경로와 수단이 주도면밀하게 설계되어야 한다.
올해 UN에 제출해야 하는 것은 30년 뒤의 목표를 정하는 LEDS뿐만이 아니다. 10년 뒤인 2030년까지의 목표인 '국가온실가스 감축계획(NDC-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s, 이하 NDC)'도 수립·제출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지난 2015년에 수립했던 5억3600만 톤 배출이라는 목표를 상향하지 않을 예정으로 알려졌다. 탄소중립은 당초 정부가 예상했던 2050년 목표보다 강화된 것이기 때문에 중간목표도 그에 맞게 응당 높여 잡아야 한다. 게다가 뒤로 갈수록 감축이 어려운 부문이 남기 때문에 2030년 목표를 더 과감하게 설정하고 달성해두지 않으면, 미래세대에게 더 큰 부담을 전가하는 무책임한 태도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법·예산 준비하고 비현실적 감축기술 배제해야
강화된 목표 달성을 위한 법률과 예산, 정책의 제정 및 정비도 당면한 과제다. 첫째로, 2050년 '탄소중립', 2030년 '온실가스 절반' 및 석탄발전 퇴출·내연기관차 판매 금지와 같은 필수적 목표들이 어떻게 확정되도록 할 것이냐가 쟁점일 수 있다. 위와 같은 기후위기 대응 목표들은 정권에 따라 달라지는 가변적 정책 공약이 되어서도 안 되고, 달성에 실패해도 책임지는 이 없는 공허한 목표가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러려면 이 목표들이 법에 명시되어야 한다. 그래야 이를 토대로 2050년까지 더 세부적이고 강력한 감축 정책이 지속적으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는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공공 재정의 적극적 투입도 필수불가결하다. '그린뉴딜 예산안'은 파편화된 기존 환경·에너지 예산 사업들을 묶어 조금씩 증액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이렇게 하더라도 필요한 부문에 적절히 공공 재정이 투입될 수 있다면야 그리 나쁘지 않은 방식일 것이다. 그러나 더 큰 틀에서 '그린뉴딜 예산안'의 바깥을 볼 필요가 있다. 일례로 그린뉴딜 사업 중 재생에너지 확대 지원 예산의 출처가 될 '전력산업기반기금'은 다른 한편에서 석탄 산업을 지원하는 기금이기도 하다. 이러한 재원은 '에너지전환기금'과 같은 이름으로 전환하여 재생에너지 중심으로의 에너지전환에 더 많은 재원을 투입할 수 있도록 정비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셋째로는 목표달성을 위한 세부 정책들의 구체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탄소포집기술 도입 등 불투명한 미래기술을 열거하며 '나중에'의 불확실성에 의존하겠다는 감축 계획은 여전히 기후위기 대응 노력을 유예하는 일이다. 에너지전환, 농업·먹거리 전환, 탄소 흡수원인 생태계복원 등에 관해 손에 잡히는 목표를 제시하고 계획을 정비해야 한다.
재생에너지 확대·탈석탄·내연기관차량 조기 퇴출
대통령은 시정연설 중에 그간 에너지전환 정책에 부족한 점이 많았다고 말했다. 단순한 수사였는지 진심 어린 반성이었는지 확인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것이다. 에너지부문은 전체 국가 온실가스 배출의 80% 이상을 차지한다. 전력, 열, 수송, 산업공정 등 온실가스 배출의 '대마'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그렇기에 에너지전환의 성공이 한국의 기후위기 대응 성공 여부를 판가름한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에너지전환의 핵심은 화석연료 중심에서 재생에너지 중심의 에너지 소비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3020 재생에너지 이행계획'과 '제3차 에너지기본계획'으로 대표되는 정부의 재생에너지 확대정책은 대통령 말마따나 부족한 점이 많았다. 2030년까지 전체 전력의 20%를 재생에너지로 공급하고, 2040년엔 30~35%까지 늘린다는 목표치는 이미 전력의 40%가량을 공급하는 온실가스 주범, 석탄화력발전소의 현재 발전비중에도 미치지 못한다.
더구나 내연기관차에서 전기차 중심으로 전환되는 것이 불가피한 교통부문 에너지전환처럼 난방·산업공정 등의 다른 부문에서도, 전력화를 통해 화석연료를 연소하는 방식을 탈피하는 것이 상당 부분 요청된다. 즉, 재생에너지 확대를 현재의 전력 부문에 한정해 계산하지 말고 다른 부문의 수요까지 분산할 수 있도록 더 과감하게 목표치를 산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재생에너지 공급을 무한정 늘림으로써 이를 해결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재생에너지의 확대의 사회적·생태적 수용성에도 한계가 존재하기에 과감하고 실효성 있는 에너지 수요관리 대책도 필요하다. 깨끗하고 안전한 에너지로 전환한다는 명제가 결코 무분별한 에너지다소비를 비호하는 방식으로 작동해서는 안 된다.
재생에너지 확대를 더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 것만큼이나, 주요 온실가스 배출원의 퇴출 시점도 의욕적으로 앞당겨야 할 것이다. 과학계의 권고에 따라 2030년까지 석탄발전소 전면 퇴출이 준비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또한, 국제적으로 내연기관차 판매 중지 시점이 속속 발표되거나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는 것에도 주목해야 한다. 내연기관차의 수명 등을 고려할 때, 우리도 2030년 정도부터는 내연기관차 판매가 중단되어야 무리 없이 2050년 탄소중립을 달성할 수 있다.
남은 탄소예산 7년이면 소진, 지금은 행동할 때
이제 호기롭게 위기를 선언하기만 하던 말 잔치는 끝났다. 탄소중립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세부 목표와 계획을 충실히 엮어내고, 실행할 시간이 된 것이다. 2050년. 최종목표 시점까지 30년 남은 셈이지만 산적한 과제에 비추어보면 결코 넉넉하지 않다. 더욱이 2018년, 한국은 물론 전 세계의 온실가스 배출량이 역대 최고치였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이대로면 2050 탄소중립이 문제가 아니라 불과 7년 정도면 남은 탄소예산이 모두 소진될 것이다. 정부와 국회는 더 이상 과제를 유예하지 말고 당장 극적인 온실가스 감축을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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