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 미래전략대학원에서 2015년부터 매년 국가미래전략을 발표한다. 2014년 1월 ‘정문술’ 전 카이스트 이사장이 215억원의 사재를 기부한 것이 계기였다. 외부 전문가를 필진으로 구성해 카이스트 미래전략대학원이 제시하는 대한민국 국가미래전략은 교육, 문화, 복지, 의료, 산업, 인구, 기후, 환경, 자원, 정치제도, 외교, 국방, 경제, 농업 등 우리 사회의 모든 사안을 다룬다. 이 중 행정·사법·입법부 모두에게 수용된 전략이 있다. 바로 ‘지식재산 전략’이다.
* 요즘 '지적재산' 대신 '지식재산'이란 표현을 사용하는데, 대단히 잘못되었다. '지적재산'이란 용어도 적절하지는 않지만, 지적창작물에 재산권에 준하는 권리를 인정하자는 제도에 따른 인위적 권리를 지칭하는 용어로 받아들일 수 있는 면이 있다(영어로는 'intellectual property'). 하지만, ‘지식재산’은 공공재인 지식을 누군가 사유화할 수 있는 재산으로 만들자는 잘못된 철학이깔린 용어이다. 더구나 이 용어는 특허청이 지식기반경제에서 자신들이 핵심부서인처럼 보이게 하려고 의도적으로 만들어 퍼트린 용어로 더 늦기 전에 바로 잡아야 한다. 이 글에서는 인용하는 경우를 빼고는 '지식재산' 대신 '지적재산'이라고 표기한다.
이들이 내세우는 '지식재산 전략'은 기술분야 미래전략의 하나로, 핵심은 2가지다. 첫째, 우리나라를 특허 분쟁 해결의 허브 국가로 만들자는 것이고, 둘째, 지적재산 정책을 국정과제로 삼고 국제 논의를 주도하자는 것이다. 이 전략은 '특허(IP) 허브 국가론' 또는 '특허(IP) 허브국가 미래전략론'이란 이름으로 회자되는데, 이론적 근거를 따져보면 '론(論)'이란 딱지를 붙이기 민망할 정도다.
특허 분쟁 허브는 변호사들 돈 벌자는 얘기
'특허 허브 국가론'에 따르면, 전 세계 특허 분쟁은 시장 규모가 연간 200조 원에 달하고, 관련 분야 파급효과까지 포함하면 500조 원에 달하는 블루오션이라고 한다. 특허 허브 국가론이 제시하는 미래 전략의 핵심은 이를 추진하는 '대한민국 세계 특허 허브국가 추진위원회'의 공동대표였던 원혜영 의원과 정갑윤 국회부의장의 언론 인터뷰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특허 분쟁 시장 200조 원은 근거가 없다. 관련 분야 파급 효과를 고려한 500조 원도 지나치게 부풀린 수치다(여기서 '관련 분야'는 특허 분쟁 당사자와 이들을 대리하는 변호사들의 여행, 숙박, 관광과 관련된 분야를 말한다). 세계무역기구(WTO)의 국제무역통계 2014 (International Trade Statistics 2014)만 보더라도, 전 세계 지재권 무역의 수출 규모 전체가 2012년에 2950억 달러, 2013년에 3100억 달러로 약 300조원 규모다. 따라서 지재권 무역에 비해 그 규모가 훨씬 적은 특허 분쟁 시장이 관련 분야까지 포함해 500조 원에 달한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따라서 이 수치들은 국가 정책의 기초로 삼을 수 없다.
설령 시장 규모가 200조 원이라 하더라도 이 시장은 모두 특허권자가 침해자로부터 받아가는 손해배상이 대부분이고 그 중 일부는 소송을 수행한 변호사 보수로 채워진다. 이 시장이 어떻게 국가가 전략적으로 추진할 '블루오션'이고 '창조경제 아이템'이 될 수 있나? 더구나 특허 소송에서는 외국 기업이 국내 기업을 상대로 승소할 가능성이 더 높고, 그 피해는 국내 기업과 최종적으로는 소비자인 일반 국민들에게 돌아간다. 다시 말해, 특허 분쟁 시장은 우리에게 '블루오션'이 아니라 '잿빛 피바다'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대법원과 국회까지 스며든 '특허(IP) 허브 국가론'
필자가 특허(IP) 허브 국가론을 처음 접했을 때 그 논리의 빈약함을 보고 대한민국의 정책 공간으로 들어 올 수 없다고 생각했다. 상식이 있다면 이를 국가 정책으로 삼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가 생각했던 상식은 상식이 아니었다.
2014년 국회에서 '세계특허(IP)허브국가추진위원회'가 만들어지더니 여야 가리지 않고 국회의원 64명이 여기에 참여했다. 위원회 소속 의원들은 특허 허브 국가론을 현실화할 법안들을 쏟아냈다. 19대 국회 때 만든 위원회는 20대를 거쳐 21대 국회에서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21대 국회에서는 이상민·서병수 의원과 KASIT 이광형 교수가 공동대표를 맡았다).
대법원도 2015년 'IP Hub Court 추진위원회'를 만들었다. 특허분쟁 허브 국가가 되려면 특허소송을 외국어 특히, 영어로 처리해야 한다. 대법원이 만든 위원회는 이를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 2018년에 서울중앙지방법원과 특허법원에 국제재판부가 생겼다. 여기서는 외국어로 변론하거나 외국어로 된 서면과 증거를 번역문없이 제출할 수 있고, 재판 과정에서 통역이 필요하면 법원이 무상으로 통역 서비스를 제공한다. 특허법원은 국제재판부의 설립 취지를 "우리나라의 법원이 Global IP Hub Court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임을 감추지 않는다.
대한민국이란 국가의 공적자원을 이렇게 낭비하면 안 된다. 실체적 진실을 가리기 위한 법원조차 사법제도를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시키면 어쩌라는 말인가? 특허 허브 국가가 되려면, 외국 기업들이 국내에서 특허 소송을 제기하도록 유인해야 한다. 특허 허브 국가론이 제시하는 유인책은 3가지다. 첫째, 소송에게 이긴 경우 거액의 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둘째, 입증책임 등 법률상의 부담을 줄여 소송을 제기하기 편하게 하며, 셋째, 시간 낭비 없이 신속한 판결이 내려지도록 하는 유인책이다. 거액의 배상을 받도록 하기 위해 특허법에 이른바 징벌적 배상제도가 도입된 것이 2019년이고, 손해배상 입증 책임을 들어주는 온갖 조항들이 특허법에 들어 왔다. 이런 제도는 점점 퍼져나가 2020년 11월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저작권법 전면 개정안에도 징벌적 배상제도가 포함되었다.
지적재산 정책은 국정 과제가 될 수 없다
특허(IP) 허브국가론의 추동자들은 지적재산 정책이 국정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근거는 빈약하고 허술하다. 카이스트 미래전략대학원이 매년 발표하는 미래전략 보고서를 읽어 보아도, 지식경제론에 기대 지식의 경제적 의미를 과대평가하거나 지식의 가치를 그와 정반대인 지적재산의 가치로 치환한 다음 다른 나라의 지재권 정책을 자신들의 주장에 맞게 과다편집했다. 누구나 자신이 하는 일이 사회의 주목을 받고 정책의 핵심 자리를 차지하기 바란다. 하지만 공공정책을 훼손하고 공동체의 이익을 무시한 채 이런 일을 밀어붙이면 이익집단과 다를 바 없다.
지적재산 정책은 독립된 국정 과제가 될 수 없다. 특허 정책은 산업 정책의 하위 개념일 때 제 자리를 찾을 수 있고, 저작권 정책은 문화정책의 일환으로서 의미가 있다. 상표 정책은 산업정책이기도 하고 소비자 정책이다. 영업비밀보호법은 특허 정책과는 취지가 정반대다. 소위 '신(新) 지적재산'이란 것도 공통점이라고는 무형재라는 점뿐이고 하나의 일관된 정책으로 묶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일본의 법률을 표절하여 지적재산의 독자적 정책을 추진하는 현행 '지식재산 기본법'은 폐지하거나 기본 골격을 뜯어고쳐야 한다. 지적재산 정책을 국가의 핵심 정책으로 삼자는 주장 대부분은 그 주장을 하는 집단의 집단 이기주의와 직역 이기주의의 발로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펼쳐지고 있는 지재권 정책을 들여다보면, 특허법이나 저작권법이 추구하는 균형(보호와 이용 간의 균형)이 모두 무너졌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바로 집단 이기주의로 정책이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정책추진은 우리 사회에 지적재산 제도를 두는 이유를 사라지게 한다. 더 크게는 지식과 정보, 기술의 사회적 이용을 막아 사회의 진보와 발전을 가로 막는 위험한 질주다. 카이스트의 교학부총장이자 세계특허(IP)허브국가 추진위원회 공동대표인 이광형 교수에게 공개 제안한다. 어떻게 특허허브전략이 국가 전략이 될 수 있는지, 이 전략이 과연 대한민국의 미래 전략이 될 수 있는지 공개 토론을 해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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