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뉴딜은 이제 세계인의 유행어가 됐다. 특히 코로나19 대유행을 겪으며 더욱 대세가 되고 있다. 대유행이 수그러들면 어느 나라든 대대적인 경기 부양에 나서야 할 텐데,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대규모 투자가 그 첫째 출구로 주목 받는다. 심지어는 평소에 기후 위기에 관심 없던 경제학자들마저 녹색 뉴딜 밖에 답이 없다는 전망을 쏟아낸다.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생태 전환을 선구적으로 외쳐온 이들은 리버럴 세력이 받아들인 녹색 뉴딜 비전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류 정당이나 언론이 정작 녹색 뉴딜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인 탄소 배출 절감 목표를 후퇴시켜 한갓 신산업 육성 정책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스웨덴 생태사회주의자 안드레아스 말름도 그 중 한 사람이다. 말름은 이 지면에서도 한 차례 소개한 인물이다("석탄-석유를 없애야 자본주의가 죽는다", <프레시안> 2016. 8. 23). 2016년에 발표한 저작 <화석 자본>(국내 미출간)에서 그는 자본주의가 계급투쟁의 논리 때문에 화석 연료를 남용할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화석 자본주의'의 극복 없이는 기후 위기에 대처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최근 말름이 미국의 급진좌파 저널 <자코뱅>과 가진 대담 내용이 흥미롭다("To Halt Climate Change, We Need an Ecological Leninism", , 2020. 6. 15). 새 저서 <코로나, 기후, 장기비상사태: 21세기 전시공산주의> 출간을 앞둔 대담인데, 여기에서 그는 2050년까지 탄소 배출 제로를 달성하려면 녹색 뉴딜 정도가 아니라 '생태적 전시 공산주의'라 할 처방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전시 공산주의'는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가 내전에 휩싸이자 볼셰비키 정부가 취한 전시 경제 체제를 일컫는 말이다. 이름에 드러나듯이, 이 체제에서는 자본주의 국가가 총력전 와중에 택한 통제 경제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국가가 경제 전반을 지휘했다. 그렇다고 말름이 이 역사적 경험을 이상화하는 것은 아니며, 혁명 러시아에서 실제 그랬던 것처럼 국가 권력이 비대해질 가능성을 경계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이 모든 위험에도 불구하고 기후 위기가 문명의 절멸로 이어지지 않도록 막을 방책은 이 정도 특단의 대책뿐이라는 것이다.
녹색 뉴딜 수준을 넘어 생태적 전시 공산주의 체제가 필요하다?
말름이 제시하는 신조어들, 가령 '생태적 전시 공산주의'나 '생태적 레닌주의' 등이 너무 생경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그러나 최근의 녹색 뉴딜 논의 지형에 말름 같은 이들이 던지는 비판에는 우리가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야 할 구석이 있다. 이들은 리버럴 세력이 받아들인 녹색 뉴딜이 몇 가지 중요한 한계 지점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생태 전환이 여전히 지체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런 한계 지점 가운데에서도 말름 같은 비판가들이 정면 조준하는 것은 '계획'의 문제다.
우리나라만 해도 그렇다. 지난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은 '탄소제로사회 그린뉴딜을 위한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녹색 뉴딜을 약속했다. 2050년까지 탄소 배출 제로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떤 경로를 거쳐 이 목표에 이르겠다는 구체적인 방안은 없었다.
총선 이후 정부가 내놓은 '한국판 뉴딜' 속의 '그린뉴딜' 항목 역시 마찬가지다. 문재인 대통령이 처음 제시한 '한국판 뉴딜'은 50만 개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내세웠지만, 그 안에는 '녹색'이라 할 만한 내용이 없었다. 비판이 일자 대통령이 나서서 관계 부처에 녹색 뉴딜 관련 보고서를 준비시켰고, 그래서 한국판 뉴딜의 최종 내용에는 '그린뉴딜'이 포함됐다. 그러나 애초 출발 자체가 코로나19 위기 대책 마련이어서 그랬는지, 경기부양책 목록에 '녹색' 항목 하나를 덧붙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계를 따지고 들면, 사실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린뉴딜을 한다면서 석탄발전소를 고집하는 것도 우습고, 기후 위기와 코로나19 사태가 모두 항공업의 쇠퇴를 가리키는데도 제주도에 제2공항을 건설하겠다는 것 역시 황당하다. '녹색'을 이야기한다면 마땅히 전제해야 할 기본 철학이 없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 점에서 '녹색 성장'을 말하던 이명박 정부와 별다른 질적 차이가 없다.
그리고 또 하나 지적해야 할 것은 '계획'에 대한 무지와 무시다. 이것은 실은 한국 정부만의 문제는 아니고, 현재 전 세계가 처한 공통 상황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기후 위기와 관련해 인류가 뼈아프게 확인한 한 가지 진실은 이것이다 ― 탄소 배출 절감을 시장의 사익 추구자들에게 맡겨 둬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다는 것. 1990년대부터 수차례 전 세계 정상이 모인 거창한 회의들이 열렸지만, 지구 평균 기온은 더욱 빠른 속도로 상승하기만 했다. 회의 때마다 채택한 고상한 보고서 어디에도 탄소 배출을 줄이려는 시장 '밖' 힘의 '강제' 적용이 명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 정부-여당 역시 이런 전 세계적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2050년까지 탄소 배출 제로를 달성해야 한다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의 목표에 맞출 길을 찾아내기 어렵다. 반면 기후 위기 대응을 촉구하는 사회운동들의 결집체인 '기후위기 비상행동'이나 정의당, 녹색당 등은 IPCC 목표를 준수하기 위해 에너지 체제 전환과 친환경 대중교통 구축 등을 위한 대규모 재정 투자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탄소예산제를 실시해야 하고 정부 안에 기후에너지부를 신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정부-여당과 뚜렷이 구별되는 점은 무엇인가? 탄소 배출 절감을 시장에 맡길 수 없으며 국가와 시민사회가 강력히 개입해야 한다고 역설한다는 점이다. 시장에 대비되는 고전적인 개념으로 정리한다면, '계획'의 강조다.
녹색 뉴딜이란 다름 아니라 녹색 '계획'이다. 탄소 배출 제로라는, 시장 합리성을 넘어서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회가 시장보다 우위에 서서 시장을 통제한다는 것이다. 녹색 뉴딜에서 이 본령, 즉 '계획'을 빼면, 거기에는 '녹색' 자본에 대한 공적 자금 지원이라는 허울만이 남게 된다. '계획'의 문제의식이 억압된 녹색 뉴딜이란 이명박 정부식 녹색 성장의 영원한 회귀가 될 뿐이다.
녹색 뉴딜의 핵심은 녹색 '계획'
한데 '계획'이라는 말만 들어도 치를 떠는 이들이 많다.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이 실시한 중앙집권형 계획경제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 탓이다. 그래서 '계획'을 일상용어로 쓰기 꺼려진다. 하지만 사익 추구자들이 아닌 사회가, 시장이 아닌 다른 제도들을 통로로, 경쟁과 이윤 획득이 아닌 협동과 공생을 기준 삼아 경제적 결정을 내리는 것에 붙일 다른 간단한 이름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민주적이라거나 분권적이라는 수식어를 달더라도 '계획'이라는 말로 돌아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만 그렇더라도 분명한 점이 있다. 생태 전환 과정에 적용돼야 할 '계획'은 생래적으로 20세기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의 중앙집권형 계획경제 경험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당장 떠오르는 것만도 다음 세 가지 맥락이 있다.
첫째, 과거의 계획은 시장을 대체하려 했지만, 녹색 계획은 시장과 공존하며 융합한다.
20세기 국가사회주의 체제들은 특히 1930년대 소련의 공업화 이후 계획과 시장을 대립시키면서 계획이 시장을 쉽게 대체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혁명 러시아의 경제 운영 경험에서도 드러났듯이, 계획은 시장을 통해 정확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하면 오히려 작동하기 힘들다. 더구나 녹색 계획의 목표는 시장 메커니즘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탄소 배출 감소라는 목표 아래 강력히 규율함으로써 그 구성 요소들을 재편하는 것이다. 시장의 단순한 대립어이기만 한 계획이 아닌 것이다.
둘째, 과거의 계획은 경제의 외연적 확대를 추구했지만, 녹색 계획은 내포적 재편을 추구한다.
20세기 국가사회주의 체제가 자본주의의 정반대에 있었던 것처럼 여기기 쉽지만, 사실 둘은 의외로 비슷한 지평에 서 있었다. 자본주의가 끊임없는 성장을 통해 내적 모순을 무마한 것처럼, 현실사회주의권의 중앙집권형 계획경제 역시 국민경제의 부단한 양적 성장을 추구했다. 물론 우리에게 익숙한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도 같은 시대정신에 바탕을 두었다. 그러나 녹색 계획의 목표는 정반대다. 외연적 확대의 반대편에서 경제 활동의 새로운 출구를 열려 한다. 흔히 '탈성장'을 말하지만, 외연적 확대의 정확한 반대말은 내포적 재편일 것이다. 이런 방향의 경제적 결정과 행위란 인류사에서 처음 감행하는 도전이다.
셋째, 과거의 계획은 국가 관료기구가 주도했지만, 녹색 계획에서는 다양한 시민사회 집단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계획은 어떤 식으로든 '강한 국가'를 불러오게 마련이다. 강제력 없이 사익 추구자들이 탄소 배출 목표를 따르게 할 수는 없으며, 그러한 강제력은 어쩔 수 없이 국가기구를 거쳐 행사된다. 그러나 20세기의 중앙집권형 계획경제와는 달리 이번에는 '강한 국가'뿐만 아니라 '강한 시민사회'도 동반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의 외연적 확대는 국가 지령을 중심으로 충분히 실행될 수 있지만, 내포적 재편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시민사회의 여러 집단들이 참여해 정보를 나누고 합의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재생가능에너지를 중심으로 지역분산형 에너지 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이런 아래로부터의 계획의 골격이 명확히 드러날 것이다.
요점은 이것이다. 녹색 뉴딜은 기존의 경제적 관성에 '녹색'이라는 꼬리표 하나만 더하면 실현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전에 없던 경제 행위 양식이 탄생하고 확산될 때에만 녹색 뉴딜은 그 실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새로운 경제 행위 양식은 최근까지 우리를 지배해온 시장지상주의도 아닐뿐더러 과거에 그 대안이라 생각했던 특정한 계획 형태도 아니다. 다양한 사회적 주체들의 민주적 숙의와 합의에 바탕을 둔 비시장적-사회적 결정 과정, 즉 전혀 다른 맥락의 '계획'이어야 한다.
어쩌면 신자유주의의 절정기가 지나고서도 새 세상이 열리지 않고 있는 것도 우리가 감히 이런 새로운 행위 양식을 만드는 길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 지체된다면, 이제 기후 재앙 속에서 문명의 출구를 여는 일 역시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녹색 뉴딜'이란 무엇보다도 새로운 경제적 행위 양식을 발명하는 과정이 아니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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