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엔 미중관계를 공생적 'G2'관계로 보는 '낭만적 사고'의 관성이 있는 듯하다. 그런 사고의 관성은 현 미중 갈등의 실체를 바라보는데 장애가 될 수 있다. 미중 갈등은 때때로 일시적인 '봉합'을 보일 수 있으나 전반적으로는 꾸준히 '하향평준화'를 향해 악화의 포물선 과정으로 갈 가능성이 더 많다. 미중 갈등이 일시적 현상이라기보다는 기존의 패권국과 부상하는 강대국 사이의 긴장이 만들어내는 보다 '근본적'(fundamental)이고 '구조적'(structural)인 것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협력을 촉진할 수도 있겠으나 보다 근본적인 갈등적 경쟁구조라는 울타리를 넘어서기는 어려울 것이다.
100여전 개화기 때 한국 지식인들을 한반도 주변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행보에 대해 상상력이 부족했고 결국 나라를 잃었다. 작금 한국은 미중 갈등이 얼마나 악화될 것인지 대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때다. 세계10위의 국력을 가진 한국이 개화기 때처럼 잘못된 판단으로 나라를 잃지는 않겠지만 한국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미중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을 것이다. 단순히 미·중 사이의 기계적인 중립이나, '미·중 둘 다 중요하니 어느 한쪽을 선택하면 안 된다'는 '영리한 변명'(clever excuse) 뒤에 더 이상 숨어서는 안 된다. 미중 사이 '전략적 모호성'이 언제까지 통하는지 그 '유효기간'도 다시 한 번 점검해야 한다. 주변국 줄 세우기는 강대국들의 오랜 역사적 패권 행동 양식이다. (필자)
''코로나 19' 사태로 미중 관계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들어섰다는 시각이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이미 악화된 미중 관계가 '코로나 19' 사태로 더 노골화 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한 관찰법이 될 것이다. 한국은 아직도 미중 갈등의 성격에 대한 논쟁을 진행 중이다. 사안이 '얼마나 심각' (how serious?)한지, 그리고 '얼마나 오래' (how long?)에 대한 인식의 격차가 관찰자들 사이에서 존재한다. 그러다보니 국가차원에서 이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함에 있어 일치된 담론 형성이 부재한 형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미중 갈등이 대선을 앞둔 트럼프의 '중국 때리기' (China bashing)라던지, 미중은 G2이기 때문에 서로 저렇게 티격태격하다가도 곧 타협을 할 것이다라는 '미중 G2 협력 불가피론'도 여전히 공론장 (public sphere)에서 소비되고 있다.
오히려 한국이 미중 갈등에 너무 '과잉 반응'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신중론도 있다. 미중 갈등 심각성에 대한 우려 표명이 오히려 사회 불안을 야기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런 차원에서 기존 미중 관계의 성격을 규정하는 소위 '2C론', 즉 미중 관계는 '협력' (cooperation)과 '경쟁' (competition)이 태극기의 태극 문양처럼 음(파랑)과 양(빨강)으로 공존하며 유기적으로 협력 방향으로 진화해 나갈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한국 내부에서의 논쟁과 상관없이 IMF 등 국제기구, 해외 학자들과 싱크탱크들은 상황이 더 심각하다고 경고음을 내고 있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2019년 11월 현 미중 갈등을 "냉전 초입단계"로 규정했다(블룸버그통신. 2019.11.21). 미국 비영리재단 아시아 소사이어티의 오빌 셸 (Orville Schell) 미중관계연구소장은 현 미중관계에 대해 미국의 대 중국 '관여 정책의 종말'(the death of engagement)이라고 진단(2020.06.07.)하고 있다.
미중 간 '디커플링'(decoupling)이 이미 와 있는지 한국 내에서 논란을 벌이는 동안, 백악관에서 중국정책을 담당하고 있는 맷 포틴저 국가안보회의(NSC) 부보좌관은 디커플링(decoupling)이 이미 "꽤 오랫동안 진행돼 온 것"이라고 했다. 그는 '만리장성 방화벽'을 예를 들며 중국에서 서방 인터넷 사이트의 제한 등 기술적 비동조화 뿐만 아니라 종교억압, 소수민족 탄압 등 인류 보편적 가치가 중국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것도 포함한다며, 사실상 디커플링은 중국이 먼저 시작한 것이라고 했다.
즉, 미국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미중 갈등을 바라보는 시각은 한국 정부 당국자가 최근 "미중 갈등 격화가 아직 국내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평가(2020.05.29)한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심지어 40여년 전 중국에 대한 관여 정책을 실시한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인지 총괄적으로 리뷰하는 '회고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 다시 말해 미중 관계 '디커플링'이란 불편한 진실을 맞이한 오늘날, '우리 미국은 왜 처음부터 중국에 대한 관여정책을 통해 공산주의 중국을 바꿀 수 있다는 잘못된 신념을 가지고 잘못된 정책을 펼쳤는가?' 하는 근본적인 리뷰 과정과 성찰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반추의 결과는 백악관이 2020년 5월 20일 (현지 시각) 공표한 '대중국전략보고서'로 귀결된다.
미중 신냉전의 시작
미국의 '대중국전략보고서' (United States Strategic Approach to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는 본문에 적혀져 있는 그대로 중국에 대한 '경쟁적 접근' (competitive approach)을 하겠다는 것이다. 미중관계 기존의 '2C론'에서 'cooperation'이 빠지고 ‘competition’만 남은 것이다. 이 문서는 '냉전'이란 단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미중 신냉전의 '공식 선포'(formal announcement)로 볼 수 있다. 미국 정부가 운영하는 VOA가 "트럼프 행정부, 대중국 전략보고서 의회 제출. 사실상 신냉전 선포"라는 제목(2020.05.22.)으로 기사를 내보낸 것은 이 보고서의 해설판인 셈이다.
보고서는 서두에서 지난 1979년 외교관계 수립 이래 미국 정부는 중국이 전 세계에 건설적이고 책임있는 당사자로서 역할을 하기를 기대해 왔지만, 40여년이 지난 현재 중국공산당은 경제, 정치, 군사적 역량을 확대하면서 미국의 핵심 국익뿐 아니라 전 세계 국가들의 주권과 존엄성을 침해하고, 자유롭고 개방적인 세계 질서를 자국의 국익에 연동해 변모시키고 있다고 적고 있다.
가장 주목할 부분은 '우리의 가치에 대한 도전'(Challenges to Our Values)이다. 이는 미중 갈등의 성격이 '가치 갈등'이라는 것을 적시한 것이다. 시진핑 주석을 평소처럼 'President Xi'라고 하지 않고 ‘General Secretary Xi,’ 즉 ‘공산당 총서기’ 호칭으로 부른 것도 미국 내 중국전문가그룹이 제기한 호칭관련 문제를 받아들인 것이다. 중국이 공산국가임을 표시한 것이다. 심지어 ‘중국’이란 주어가 들어갈 자리에 ‘regime’이 사용되기도 했다. 미국이 ‘북한’과 같은 나라를 지칭할 때 쓰는 표현이다.
시진핑의 2013년 내부 발언인 "자본주의는 소멸할 것이며 사회주의가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이다"(资本主义最终消亡、社会主义最终胜利)라는 것도 인용했다. 이 발언은 2019년 4월에서야 공개되었다. 중국이 겉으로는 개방된 글로벌 무역체제를 주창하면서도 물밑에서는 오랫동안 서방과 “이데올로기 경쟁"을 진행하고 있었다고 본다. 또한 중국이 민주주의의 대안으로 공산주의를 세계에 조장하고 있으며, 심지어 서방의 민주주의보다 "더 잘 작동"(functioning better)하는 정치제도로써 장려하고 있다는 미국의 대중국 평가를 제시했다.
더불어 시진핑이 주창하는 '인류운명공동체'(人類命運共同體) 슬로건이 실제적으로는 공산당 주도의 '이념적 순응' (ideological conformity)을 고취하는데 이용되고 있고, 이는 중국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중국의 영향력을 심는데 이용되고 있다고 했다.
트럼프는 2017년 11월 중국 방문 시 인권문제를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아 "중국에 가서 인권 문제를 거론하지 않은 첫 미국대통령"이라 비판받았는데, 본 문건은 신장, 홍콩 등을 언급하며 중국의 인권문제, 소수민족 탄압, 종교 박해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일부에서는 이 보고서의 목적이 미국 국민 사이에 유행하는 반중 정서를 활용해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율을 끌어올리려는 것이라는 시각이 있다. 민주당 바이든 후보가 당선되면 미중 관계가 다시 '정상궤도'로 돌아갈 것이라는 기대도 나온다. 그건 시기상조적인 낙관론이다.
바이든의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미중 간 갈등은 쉽게 해소 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인권문제 등으로 전선이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 현재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바이든은 인권 문제와 관련 시진핑을 "불량배"(thug)라고 불렀다. 소련과의 냉전을 시작한 트루먼 대통령이 민주당 소속이었다는 것도 상기해야 한다. 시 주석은 또 지난해 말 베이징을 방문한 헨리 키신저에게 "핵심 무역 문제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고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계속 문제를 제기하는 민주당보다 트럼프를 상대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중 갈등의 핵심이 무역이라기보다는 이념과 정치체제, 즉 근본적인 가치의 차이라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역시 냉전의 특성이다.
이번 보고서는 미 정부내 여러 파벌의 중국에 대한 이견이 하나로 수렴된 결과이기도 하다. △정부내 온건파가 강경파로 수렴됐고, △백악관내 '선거용 강경파'가 중국공산당을 본질적으로 미국의 가치에 부합하지 않다고 보는‘이념적 강경파’로 수렴되었다. 코로나 사태에서 중국이 보여준 행태는 여러 파벌의 통합에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
보고서는 결론에서 본 문건이 미국의 중국에 대한 '근본적인 재평가'(fundamental reevaluation)라 명시했다.
미소(美蘇)간 냉전(冷戰)은 무기를 들고 싸우는 열전(熱戰)과 달리, 양군이 직접 무력 충돌하지는 않았으나, 두 세력이 군사 동맹, 핵무기, 요인 암살, 군비 경쟁, 첩보전, 대리전, 언론전, 그리고 스푸트니크(Sputnik)처럼 우주 진출 및 첨단기술 개발 경쟁의 양상을 보이며 서로 대립했다. 한국에서 기존 미중관계를 바라보는 보편적 패러다임은 미중이 경제적으로 상호의존적이고 이데올로기적 가치대립이 없다는 점에서 과거 미소가 대립했던 냉전시대와 다르다는 것이었다. 이 보고서로 이제 그 패러다임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종합하면 역사는 이 보고서를 미중 냉전의 시작(onset)을 알리는 또 하나의 'X 파일'(the X Article)로 기억할 것이다.
미중 갈등을 준비하지 않은 한국의 '잃어버린 10년'
역사가 평가할 일이겠지만, 중국 내부에서는 미중관계의 협력 '종말기'를 일찌감치 2010년으로 본다. 중국 측은 그 즈음에 발생한 '세 가지 사건'을 꼽는다. 1) 그해 중국의 경제가 일본을 추월하여 미국을 추격하는 세계 2위 경제대국이 되었고, 2)이라크전쟁이 서서히 종결되기 시작하면서 미국의 군사전략의 중심이 중동지역에서 아태지역로 이동했고, 3)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행위에‘저자세’를 보이던 미국이 본격적인 중국 견제에 나섰다. 특히 한반도와 관련 그 해 천안함/연평도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미국이 항공모함을 투입하는 등 적극 개입하는 것을 보고 중국은 미국의 중국에 대한 ‘전략 변화’가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한편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2011년 11월 Foreign Policy紙에 장문의 글을 발표하며 ‘Pivot to Asia’를 공식 선포하였다. 대 중국 견제 정책을 공식화 한 것이다. 이에 시진핑은 2013년 6월 미국 캘리포니아 써니랜즈(Sunnylands)에서 오바마와 넥타이를 풀고 소위‘세기의 회담’을 통해 “태평양은 커서 미중 양국을 다 포함할 수 있으니 절반씩 나누자”는 ‘태평양 분할론’ (중국측 공식 용어:‘신형대국관계’新型大國關係 )를 제시했지만 미국이 이를 거부함으로써 미중관계는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당시 한국은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이 모든 미중 관계 변화의 전략적 함의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지 않았다.
미중 갈등의 전망은 과거 냉전시대 미소갈등보다 훨씬 어둡다. 열전(熱戰)의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냉전은 전쟁은 없기 때문에 오히려 평화로운 시기다. 무기를 들고 싸우는 열전은 그렇지 않다. 미국의 군사력은 중국에 비해 월등히 우월하지만 전장을 남중국해가 있는 서태평양으로 국한할 경우 상황은 그렇게 일방적이지 않다. 중국이 보유하고 있는 다양한 ‘東風’(Dongfeng)계열의 미사일은 '東風-41' ICBM을 비롯하여 중국측이 ‘사드 잡는 미사일’이라고 한 음속 10배 속도인 '東風-17' 등 미국 본토 뿐만이 아니라 중국 근해에 접근해 오는 미국의 항공모함을 표적으로 하는 다양한 목표를 염두에 두고 이미 실전배치를 마쳤고, 이는 미국에 충분한 위협이 되고 있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적어도 중국에서 후속부대 지원이 용이한 중국과 인접한 남중국해와 대만해협에서 군사출동이 발생할 경우 미국이 부담해야할 인명피해도 상당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냉전’뿐만이 아닌 ‘열전’의 가능성
실제로 그레이엄 앨리슨 하버드대 교수는 미중 갈등이 무력 충돌로 이어질 가능성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진단하고 있으며 그럴 시 한국의 취약함을 지적했다. “미·중 무력 충돌은 한국전쟁 이상으로 한국에 큰 상처를 남길 수 있다"고 했다. (국내언론과의 인터뷰. 2019.06.16)
기존 미중 관계의 특징을 설명하는 한 보편적인 수사(修辭)는 미중이‘서로 티격태격하다가도 결국은 협력의 방향으로 갈 것이다’는 식의 자유주의적 담론이었다. 즉, 미중이 때때로 갈등을 겪더라도 상호보완적인 경제이익 등 교집합이 많은 미중관계의 특성상 선의의 경쟁과 협력이 미중관계를 이끌어 나아간다는 논리에 기인한 것이었다. 문제는 작금의 상황이 그렇게 진행되고 있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무역전쟁 초기 중국이 조기에 ‘항복’할 것을 예상했다. 하지만 무역전쟁이 2년을 향해 가는 현 시점에서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미중 갈등은 코로나바이러스 책임론, 홍콩 국가안보법, 대만의 WHO 옵서버 참가 문제, 신장 위구르 소수 민족 탄압, 화웨이, 남중국해, 공자학원 철폐, 미중 간 특파원 추방, 사이버 공격 등으로 전선을 넓히며 확대되고 있다. 객관적인 국력 지표에서 중국은 밀리면서도 “끝까지 갈 것이다”(奉陪到底)며 오히려 항전의지를 붙태우고 있다.
돌이켜보면 한국은 미중 갈등의 성격에 대해 한 발 늦은 인식 진화의 과정을 겪고 있다. 이는 단순한 무역전쟁이 아니고 기술 경쟁도 아니며 미래를 둘러싼 ‘패권전쟁’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을 서서히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한발 늦은’ 인식은 미중 사이에서 한국의 어떠한‘포지셔닝’을 해야 하는 선택에 있어 더 큰 도전과 고민을 의미한다. 미리 대처할 수 있는 선제적 전략구상이 부재한 형편이기 때문이다.
100여전 개화기 한국 지식인들을 한반도 주변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행보에 대해 상상력이 부족했고 결국 나라를 잃었다. 작금 한국은 미중 갈등이 얼마나 악화될 것인가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때다. 세계10위의 국력을 가진 한국이 나라를 잃지는 않겠지만 한국은 앞으로 끊임없이 미중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을 것이다. 이는 미래의 일만은 아니다.
한국의 ‘전략적 모호성’ 미중이 이해해주는 것이 아니라 참아주고 있는 것
한국은 미중 갈등 사안마다 이미 입장표명과 선택 압력을 받고 있다. 2015년 남중국해 문제에 대한 한국의 입장 표명 요청, 2016년 시작된 사드 배치 문제, 2019년 시작된 화웨이 문제, 2020년 ‘G-11’참여문제와 경제번영네트워크(EPN) 등 이미 모두 ‘현재진행형’이고 그 어느 것 하나 금방 끝날 사안이 아니다. 하지만 한국이 개화기 때보다 훨씬 더 영민한 전략적 사고를 보이고 있다는 증거는 없다. 매번 아슬아슬하게 넘어가거나, 혹은 사드 때처럼 중국의 ‘한국 길들이기’ 경제 보복을 톡톡히 당했다. 보수와 진보 정부에 걸쳐 정부 당국자의 ‘전략적 모호성’ 발언은 구설수에 올랐고, 미중 양쪽으로부터 오해와 불만을 누적시키고 있음도 직시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한국의 ‘전략적 모호성’을 미중이 참아주는 것이지 이해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 고위직 인사 인터뷰. 2020.6).
일부에서는 미중 갈등에 어느 한 편에 서지 말고 ‘사안별로 선택’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좋은 의견이다. 그런데 미중 갈등 사안마다 한국이 선별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외교적 역량이 있는 지에 대한 객관적 평가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조지 부시 대통령의 유명한 발언 “Either you are with us, or you are with the terrorists" (만약 당신이 우리 편에 서지 않는다면 곧 테러리스트 편이다)도 상기해야 한다. 주변국 줄세우기는 강대국들의 오랜 역사적 패권 행동 방식이다.
현재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76년 주기로 한 번 등장하는 핼리 혜성처럼 우리 인생 주기에서 처음 겪는 전대미문의 새로운 상황인데, 우리가 기존 분석 프레임의 관성으로 미중 갈등을 분석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미국정부가 9.11 공격을 받고 나서 몇 년간 걸쳐 조사한 후 낸 ‘9.11 보고서’의 핵심은 “A Failure to Imagine the Worst”(최악의 상황을 상상하지 못한 것) 이었다. 왜 미국이 이런 공격을 당할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는가이다. 작금 한국은 미중 갈등에 대해 상상력을 발휘할 때다. 최상의 전략은 현실을 직시하고 험난한 앞날을 위해 다양한 정책적 옵션 (예, 미중간에 헤징, 가치사슬 다변화, 한국의 독자적 생존 모색 등)을 모두 점검하고, 각각의 상황 악화 시나리오마다 한국의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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