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 자기규제라든가 억제력이 생겨 신축적이고 창의적인 어른이라야만 일생에 두세 번 견해를 바꾼다는 것이다. 사고의 신축성을 위해서는 여행이나 명상을 통해서 어린 시절의 '상상력 있는 혼란'을 다시 일으켜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란 도움말도 있다.
오래 전에 재야정치 운동가인 장기표 씨와 자리를 같이하여 그가 정보화시대가 되었으니 정치의 패러다임도 바뀌어야 한다고 신사고(新思考)를 강조하였을 때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고 추궁만 했을 뿐,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손에 쥐여주는 듯한 명제가 없어서였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이제까지 갖고 있던 사고방식이 어떤 벽에 부닥친 듯한 느낌이 들고 무언가 새로운 돌파가 있어야 하겠다는 번민이 생긴다. 그것이 세계에 대한 견해일지, 패러다임일지… 여하간 세상을 새로운 시각이나 차원에서 다시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다.
최근 한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순두부나 빈대떡이 있는 집으로 가자니까 그 친구 "아날로그적 식성이군. 요즘 디지털세대는 그런 데를 선호하지 않아" 한다. "아날로그도 지독한 아날로그지. 석기시대라고 스스로 말하기도 하지"하고 대꾸하니까 "전쟁중 시대의 식성이라는 게 좋겠군"
인터넷 시대로 세상이 급변한 지 20년쯤 되었다. 15년쯤 전인가 젊은 세대와 이야기하다가 "200자 원고지 10장" 운운하니까 "A4용지로 몇장이지요" 하는 반문이다. 그 무렵 대학생들이 신문구독을 하지 않는다고 핀잔을 하고서는 뒤늦게 그들이 인터넷으로 보고 있음을 알았다.
뒤늦었어도 한참 뒤늦었다. 이왕 뒤늦은 김에 아예 담을 쌓아보는 것이 어떨까 하고 '석기시대'를 내세우며 인터넷 등 모든 새 문명의 이기로부터 작심하고 멀리하기로 했다. 석기시대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려는 일종의 실험인 셈이다.
여하간 그런 고집통으로 살다보니 시대에 뒤쳐졌고 뒤늦게 새삼 느껴지는 일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보는 눈이다. 세계관이란 표현을 쓸 수도 있고, 이데올로기란 용어를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프레임이나 틀도 좋다. '작업가설(working hypothesis)'이란 아주 좋은 개념도 있는데, 이 바꿀 수도 있는 개념이 그렇지를 못하고 고정관념이 되어버리다시피 한 것이 내 머리 속이 아닌가 한다.
정치에 있어서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노동계층은 사회의 약자로서 그들의 지위향상이 모두의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출발점이자 거점이다. 큰 틀로는 노·사·정 합의라는 이른바 유럽식 모델을 생각할 수 있다.
노동이 힘을 발휘하려면 정당을 만들 수밖에 없고 최소한 원내교섭단체 정도까지는 되어야 한다. 남북분단 등 여러 요인을 생각할 때 집권 운운은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이름 붙여 사회민주주의라고도 하는데, 요즘은 아예 전투성도 사라지고 사회보장·세제 등 정도로 우파와 대립하고 있어 차라리 '유럽 사회 모델'이나 '네오 케인지언' 정도의 다른 표현을 쓰기도 한다.
▲ 노동운동은 전 세계적으로 퇴조를 걷고 있다. 몸부림치는 노동자를 향한 세상의 눈길은 차갑기만 하다. ⓒ뉴시스 |
그런데 그 노동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퇴조이다. 비교적 자유로운 나라 미국의 통계도 그 후퇴를 말하고 있다. 유명한 전미자동차노도(UAW)의 경우 1979년 150만 명의 조합원이 작년 말 46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금년 통계로 미국 노동자의 9%만이 제조업 종사자이고, 노조가입은 전체 노동자의 12%이다. 제조업 노조는 임금을 향상시키는 핵심 동력이다. 노동자의 실질 임금은 계속 감소추세에 있다.
오랜 전통을 가진 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들도 반드시 우세하다고만 볼 수 없고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다. 독일의 한 유명 평론가는 사민주의의 퇴조 원인이라 하여 첫째로 제조업 노동자의 감소 추세, 둘째로 보수정당들이 사민정당들의 정책들을 일부 채택하는 일 등을 그럴듯하게 들었다. 이명박 정부가 대학생 장학제도를 크게 향상시켰고, 네오 케인지언인 정운찬 총리를 등용하는 일 등도 그런 맥락에서 볼 수 있겠다.
외국 이야기는 그렇다고 하고 국내에서도 노동운동은 계속 밀리고 있다. 노조에 크게 의지하고 있는 진보정당이 지지부진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자본이 노임이 싼 개발도상국으로 이동한다든가, 주주자본주의가 맹위를 떨쳐 단기이익에 급급하게 되면서 노동자의 임금은 줄어드는 반면 주주와 경영진의 배당을 불균형하게 증대되고 있다는 등은 긴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빈부격차의 심화 현상은 이명박 정부에서뿐만 아니라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부터도 계속되어 온 일이다.
게다가 그러한 노동자들이 몸부림치면 사회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다. 성장신화, 성공신화에 빠져있어서일 것이다(확실히 한국의 자본주의는 성공신화이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밑에 깔린 계층도 배려해야 하지 않겠는가). 특히 거대 언론의 비판은 균형을 잃고 있다.
최근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이 어설프게도 안토니오 그람시를 인용하여 교회·교육기관·언론의 문제를 거론하였다고 외국 언론에 보도된 것을 읽은 일이 있는데 그건 그렇고 사실 우리 거대언론의 반노동적 편향은 생각해볼 문제다.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그런 게 어쩔 수 없는 시대의 대세이니 오히려 그런 것을 바라보는 시각에 변화를 주어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자본주의란 으레 그런 것이 아닌가. 거역할 수가 없고 오히려 순응하면서 스스로 그 속에서 발전을 꾀하여야 하는게 아닌가.
아니, 이제까지의 노동중시 사고가 문제가 아닌가. 사민주의적 사고의 틀이 수정을 요청받고 있는게 아닌가. 노동층에만 집착말고 증대하는 중산층까지 껴안아 정책을 수정하는 방향도 있다. 유럽의 사민당들이 그렇게 하고 있고 미국의 민주당도 어떤 면에서 그렇다. 그렇지만 이번의 금융위기에서 시작된 경제위기를 보면 자본주의에 낙관하는 것도 금물이 아닌가.
생각의 수정을 하더라도 논리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생각은 앞으로 나가지 않고 고민이다.
서두에 인용한 책 이야기처럼 여행이나 명상이 돌파구라면 그래도 쉽겠는데 그럴 것도 같지 않다. 패러다임 시프트에도 엄청난 노력의 축적이 있고 실천을 통한 검증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쉽게 문제를 해결하려 들다니…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다보니, 이게 웬일인가. 나의 견해가 부지부식간에 변화를 보인 게 아닌가. 우선 뒤늦게나마 변화를 생각하는 것부터 말이다.
* 이 글은 잡지 <헌정>에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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