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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분노한 TK "총선서 한나라당 전패 시켜뿌믄 되지"

[르포] 과학벨트 후폭풍…박근혜는 부응할 수 있을까?

"과학벨트는 G.U.D.(경북, 울산, 대구의 이니셜)로"라는 철지난 슬로건이 나오는 KTX 객실 스크린을 뒤로 하고 17일 동대구역에서 내리자마자 경북도청으로 향했다. "충청표가 그리도 무섭더냐? 영남표 무서움을 제대로 보여주마!", "배은망덕도 유분수지...뒤통수로 보답하냐"는 원색적 비난이 적힌 플래카드가 먼저 눈에 띄었다.

동대구역에서 경북도청으로 향하는 길에 만났던 개인택시 기사 이봉송 씨(65세, 가명)의 말이 퍼뜩 떠올랐다.

"과학벨트, 뭐 데모 다 필요없어요, 그칸다고 됩니까. 내년 총선 때 한나라당 완전 전패 시켜뿌믄 끝나는 거지. 그래서 선진당도 함 시켜보고 안되면 다음 또 한나라당 하면 안 되능교. 일단 지금 한나라당이 그 따위로 행동하니까 전패 시키는 방법 밖에 없잖아요...다른 건 몰라도 대구 경북 민심은 바뀌어야 해요. 무소속 아니면 자유선진당도 있고, 옛날에 한나라당보다 자민련이 더 많이 나왔어요."

▲ 경북도청 전경 ⓒ프레시안(박세열)

96년, 대구를 덮친 자민련의 추억

대구경북이 한나라당의 '아성'으로 평가 받지만 굴곡은 늘 있었다. 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대구·경북 지역에 자민련-무소속 바람이 휘몰아쳤다. 4월 11일 총선에서 50석을 거머쥔 자민련은 대구에서 13석 중에 8명을 당선시켰다. 영남에선 무소속 돌풍이 불었다. 당시 자민련은 총 10석, 무소속은 12석, 민주당이 3석을 얻었다. YS가 '공천 물갈이'로 세운 체면은 영남 패배로 구겨졌다.

당시 신한국당은 부산을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있는 YS의 강력한 이미지 때문에 'PK당' 소리를 들었었다. 실제 YS는 TK 인사들을 숙청했고, 숙청당한 민정계 TK 인사들은 대거 자민련으로 들어가 대구에서 신한국당을 초토화시켰다. 정치권 인사들이 TK 사람들의 성향을 '권력지향적'이라고 평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물론 당시 상황, 그리고 이명박 정부 하의 지금 상황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다. 앞서 언급했듯 당시의 '비신한국당(자민련-TK출신)'은 지금의 '비한나라당(자유선진당, 민주당 등)'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따지자면 몇 가지 공통점은 있다. 96년 총선에서 PK에 대한 상실감에 기름을 부었던 것 중 하나는 대형 국책 사업의 무산이었다. TK가 공들였던 위천국가산업단지가 무산됐고, YS는 삼성자동차 공장을 부산에 줬다.

두 번째, "이 대통령은 TK의 피가 흐른다(이상득 의원)"는 말도 있지만 이 대통령은 정통 TK가 아니다.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이명박 대통령이 무슨 TK냐, 내가 진짜 TK(경북 영천 출신에 경북고-서울대)라고 말할 정도다. 대구에서 만난 시민들은 "이명박 정권은 포항정권 아닌교"라고 입을 모은다. 그래서 박탈감을 느끼는 TK 사람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박근혜 전 대표를 유력한 미래 권력으로 보는 것이다.

영남 지역의 한 의원은 오는 2012년 영남 지역 총선의 최대 변수를 무소속 등 제 3의 후보라고 말했다. 이는 한나라당은 건재하더라도, 현역 의원들의 낙선 공포는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2008년 총선에서도 68석 중 20곳에서 한나라당 후보가 고전하는 현상이 벌어졌던 것과 맥이 통한다. 이른바 영남, 특히 TK 현역 의원들 안에 퍼져 있는 '공포'의 핵심은 바로 이 부분이다.

수십년 간 TK에서 한나라당 '아성'이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굴곡들이 있어왔다면, 지금, 새로운 굴곡점이 생길 징후가 조금씩 보이고 있다.

▲ 경북도청 인근 ⓒ프레시안(박세열)

한나라 현역 TK 의원들, 공천 때문에 안간힘?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 과학벨트 유치 무산 과정을 보면 '낙선 공포'에 휩싸인 현역 의원들의 다급함을 느낄 수 있다.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가 발표된 직후 대부분이 친박계인 대구 의원들은 성명을 내고 정부를 강하게 성토했다. 아직까지도 금기시되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 탈당론'까지 거론했을 정도였다. 당시 대구 민심은 "박근혜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더 세게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명박-박근혜를 분리해냈다. 대구 의원들이 보인 행동은 이런 민심의 흐름에 정확히 부응하려는 노력으로 풀이할 수 있다. 대구의 친박 현역 의원들은 강력한 야당 이미지를 지역민들에게 심어주는데 일정 부분 성공했다.

반면 과학벨트 유치가 무산된 후 경북 의원들의 태도는 달랐다. 대구의 한 의원은 "경북 의원들 반발이 예상보다 약하더라"고 갸우뚱 했다. 기자들은 이인기 경북도당위원장에게 "사실상 정부에 승복한 것 아니냐"는 질문들을 던졌지만 이 위원장은 "승복은 아니다"라고 대답하면서 다른 설명은 하지 못했다. 정부가 당초 계획보다 예산을 증액키로 했고, 증액된 예산 대부분이 경북으로 내려가는 것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실제 김정훈 부산시당위원장은 17일 원내대책회의에서 "과학벨트 예산을 증액해서 대구, 경북, 광주에 나눠줬다는데 이런식으로 하면 다른 지역은 소외감을 느낀다"고 공개적으로 성토했다.

이상득 의원의 지역구가 있는 포항은 중이온 가속기 등 과학벨트의 핵심 시설이 내려가는 대전 대덕 지구의 예산보다 더 많은 예산을 확보했다는 사실을 일부 언론이 보도했다. 이런 사정들 때문에 이상득 의원이 경북 의원들의 반발을 진화했다는 얘기도 나왔다. 영남 지역의 한 의원은 이에 대해 "내가 확인한 부분이 없어 말할 수 없다"고 말했지만, 부정하지는 않았다.

최근 이상득 의원과 박근혜 전 대표의 관계가 좋다는 점을 생각해 봐야 한다. 대구, 그리고 경북 의원들은 정치공학적으로 절묘한 계산을 했다. 공천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대구 경북 현역 의원들은 각각 '보스들'의 의중에 행동을 맞춘 것이다. '물갈이는 피해보자'는 식의 이런 행동이 한나라당의 내년 총선 전략, 나아가 박근혜 전 대표의 대선 전략에 도움이 될까?

분노한 지역 민심은 '물갈이론' 비등

문제는 민심이다. 지역에서는 "영남표의 무서움"을 거론하는 등 '물갈이론'이 비등한데, 현역 의원들은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형국이다. 'TK 홀대론'으로 가뜩이나 악화된 영남 민심을 달래기는 역부족이다. 오히려 거스를 지 모른다는 우려가 생긴다.

과학벨트 유치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경북도의회 한나라당 장경식 의원은 <프레시안>과 인터뷰를 통해 "지역민들이 한나라당 정권에 아쉬움, 박탈감이 크다. 예상보다 더 크다. 민심 이반이 상당하다. 한나라당이 이번 기회에 변화고 쇄신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위기감을 드러냈다.

대구 수성구에서 경북 경산 영남대학교로 가는 길에 만난 택시기사는 "내 손님들 중에 한나라당 욕 안하는 손님들을 못 봤다"며 열변을 토했다. 그는 "한나라당이 밥 멕여주는 당인가, 한나라당, 한나라당, 아직도 왜 찾는지 이유를 모르겠어. 대구 경북 사람들은 김정일이 욕할 것도 못돼, 그거나 똑같은 건데 뭐. 민주주의 국가에서 한 당만 나오면 되는 데가 어딨습니까"라고 말했다.

▲ 경북도청 인근 ⓒ프레시안(박세열)

부글부글 끓고는 있지만, 내년 TK 지역 총선에서는 한나라당이 승리할 것이라는 전망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문제는 '한나라당의 승리'가 아니라 '한나라당의 몇 %승리냐'이다. 대선을 8개월 앞두고 총선을 치러야 하는 한나라당에게 최악의 수는 50%대 지지율에 그치는 경우다. 대선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대구 지지율이 69%였고, 정동영 후보의 지지율은 6%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구경북에서 한나라당 지지율 하락은 곧바로 대선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구에서 19% 가까운 지지율을 얻어 당선됐던 점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대구 경북 지역에서 한나라당 지지율은 총선이 아니라 대선이 문제가 된다.

정치평론가 고성국 박사는 박근혜 전 대표의 대선 성공 조건으로 영남 개혁을 거론했다. 노회한 다선 의원들이 내년 총선에 다시 공천을 받을 경우 민심에 부응하지 못하고, 결국 한나라당, 그리고 자신의 지지율을 깎아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영남의 원로 의원들이 박 전 대표를 위해 용퇴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한 평가도 박한 편이다. 대구에서 자영업을 하는 이병화 씨(55세, 가명)는 "박근혜도 옛날에 비해서 대구 경북에서 옛날만큼 지지율이 안 높아요. 특히 원래 국회의원 지역이 달성군 아닙니까. 달성에서도 지지도가 옛날에는 70%가 훨씬 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정도도 안나옵니다. 박근혜도 이명박 대통령이 하고 있는 거 세게 비판해 줘야 하는데, 대구 경북만 밀어주면 대통령 안되니까, 충청도도 경기도도 다 봐야되니까 (비판이) 나올 수 없는기라. 대선만 아니면 자기가 한마디 할 건데 그게 아니니까 한마디 변변찮게 못하는 거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야권, 한나라 균열 돌파해야 '대선'에서 희망 볼 수 있다

견고한 여당 지지세에 균열이 생길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높은 상황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야권이 이를 돌파할 여력이 있느냐 여부다. 영남대 정치학과 김태일 교수는 "지난 6.2지방선거에서도 다른 지역보다는 덜하지만 조금이나마 젊은 층 투표가 적극성을 띠었다. 이번 4.27재보선에서도 달서구에 3곳의 기초의원 선거 중 2곳에서 야권 단일후보가 20%를 넘어섰다"고 분위기를 설명했다.

대구 달서-라, 달서-마에 출마한 민주당, 민주노동당 야권 단일후보는 각각 22%, 28% 이상의 지지율을 보였다. 반면 한나라당 출신 당선자들은 39%~53% 득표에 그쳤다. 투표율은 16%를 간신히 넘었다. 저조한 투표율이 한나라당에 도움된다는 '이론'이 적어도 TK 지역에서 먹히지 않는다는 점도 감안할 수 있다.

김 교수는 "대구 경북의 민주당, 민노당, 국민참여당도 최근 전열을 새로 정비했다. 여기에 민주당 김영춘 최고위원의 부산 출마, 정세균 최고위원의 '남부민주벨트론' 등도 좋은 시도라고 본다. 잘 하면 이 바람이 남에서 북으로 불 수도 있다"고 말했다. 물론 이같은 바람이 대구경북까지 올라오기 위해서는 인물이 중요하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지난해 6.2지방선거, 올해 4.27재보선을 거쳐 오면서 수도권, 강원도 민심이 한나라당에 등돌렸다는 것은 일부 증명됐다. 국책 사업을 두고 벌인 이명박 정부의 연이은 '자책골'은 TK와 PK를 흔들어버렸다. 내년 총선 대선의 변수는 충청도와 함께 의외로 TK가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경쟁은 없을 것 같은 이 곳에도 '총성'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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