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의아해 했다. 아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어" 했다. 엄기영 전 MBC 사장(기사의 흐름상 직함을 후보 대신 전 사장으로 통일하고자 한다)이 지난달 2일 한나라당에 입당했을 때 보수 진보 구분 없이 보인 반응을 종합하면 그렇다. 상식을 뒤엎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는 '음모론'이 힘을 얻는다. 알지 못한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 '엄기영 한나라당 입당' 상황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모종의 일'이 발생한 것 아닌가 하는 추측들이 고개를 든다.
엄 전 사장이 MBC 대표이사직을 걷어찬 것은 지난해 2월이었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후 그의 사표를 받아낸 MBC 최대 주주 방송문화진흥위원회 전 이사장인 김우룡 씨의 <신동아> 4월호 인터뷰는 '모종의 일'이 일어났을 가능성에 신빙성을 보탠다.
"(이명박) 대통령이 엄 사장과 막걸리 먹으면서 '조만간 엄 사장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언질을 줬지. 그리고 며칠 뒤 엄 사장이 자기와 본부장들 사표를 (나에게) 들고 왔어.…자기 사표는 반려될 것으로 알고 있었던 거지."
한때 세간에 알려졌던 '엄기영-김우룡 밀약설'의 배경이다. 그러나 사장 사표가 반려된 것을 '좋은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더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암시는 여전히 남아있다. 중요한 점은 발언의 주체, 즉 '좋은 일'을 약속한 사람이 대한민국 권력의 정점에 있는 이명박 대통령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엄 사장에게 좋은 일"이 어떤 것인지는 짐작해 볼 수 있다.
취재에는 한계가 있다. 사람의 마음 속까지는 들어가볼 수 없다. 수많은 정황들을 이어붙이는 수밖에 없다.
▲ 엄기영 강원도지사 후보가 MBC 사장직을 사퇴하며 나오는 도중 농성중인 MBC 후배들을 향해 "MBC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양정철닷컴 |
"깜빡이 안 켜고 몰래 우회전"한 엄기영
엄 전 사장이 물러난 후 '한나라당 입당설'이 슬슬 나오기 시작했다. 한 민주당 의원은 사석에서 "엄 전 사장이 민주당으로 들어온다고? 천만에. 한나라당으로 못 들어갈 이유가 없다"고 했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도 "엄 전 사장이 꼭 민주당에 가야 하나? 나도 듣는 얘기들이 있다"고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야 막론한 정계, 보혁 막론한 언론계 안팎의 사람들은 당시 "아무리 그래도 설마 자신을 내쫒은 정권에 들어가겠느냐"는 말들을 했다. 그러나 지난해 7.28 재보선 때 많은 사람들이 '설마'했던 일들이 일어났다.
엄 전 사장은 7월 25일에 철원, 화천, 양구, 인제 지역구에 출마한 한나라당 한기호 후보의 양구연락사무소를 방문했다. 곧바로 정선에 가서 태백·영월·정선·평창지역구에 출마한 한나라당 염동열 후보를 방문했다. 염 후보와 저녁식사를 함께하며 염 후보를 격려했다고 한다. 이 때 사람들은 예측하기 시작했다. 엄 전 사장이 이광재 지사의 지사직 상실을 예측하고 강원도지사 보궐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사전 행보를 벌인다는 추측이 난무했다.
물론 본인은 부인했다. 이 때문에 엄 전 사장의 '의중'을 두고 갈팡질팡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 신경민 MBC 논설위원은 "저는 엄기영씨 문제에 대해 잘 모르고요. 알아보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랬을 수 있고 복잡한 행보의 일단일 수 있지요. 원래 그렇거든요…."라고 명쾌하게 설명해 줬다.
"원래 그런" 엄 사장은 자신의 퇴진을 외친 40명의 국회의원이 자리잡고 있는 한나라당에 결국 입당했다. '엄처구니'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심지어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는 "창녀의 윤리도 없는 한나라당"이라고 일갈했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양정철 노무현재단 사무처장은 "이광재 지사가 삼고초려했는데 거절했다. 깜빡이 안 켜고 몰래 우회전한 꼴"이라고 비판했다.
이 때문이었을까? 엄 전 사장은 "기자 생활보다 몇 백배 더 힘든" 상황에 시달렸다고 고백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는 당내 경선을 뚫고 한나라당의 강원도지사 후보가 됐다. 입당 33일만의 일이었다.
한나라당 경선이 끝나고 있은 '어처구니 없던' 어떤 일
엄 전 사장은 경선 당시 여론조사와 국민선거인단 투표에서 전체 57.4%를 얻었다. 두 종류의 '선거'에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불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엄 전 사장은 개표에 앞서 "투표율이 90% 이상 될 줄 알았는데 당원들 투표율이 29%로 일반 투표율보다 낮았다"며 한나라당 강원도당 당원들에게 쓴 소리를 했다.
후보가 확정된 후 조촐한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한 기자가 "당원들의 투표율이 낮았다"고 지적하자 "조금 더 높았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당심이 엄 전 사장에게 가지 않는 것 같은데, 당심을 잡을 대책이 있느냐"는 질문에 엄 전 사장은 "한나라당이 여러 대책을 세워나갈 것으로 안다. 경선 투표율이 낮았지만 당원들 결집시키고 단합시키는 대책을 (한나라당이) 내놓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이 자신을 뒷받침할 일종의 '의무'가 있다는 투였다. 엄기영이라는 상품이 매력적이지 못한 이유 대신 그는 "당이 왜 관심을 기울여주지 않느냐"는 취지의 반응을 내 놓았던 것이다. 입당 33일, 엄기영 후보는 아직도 한나라당을 자신과 분리해내고 있었다. 그의 이런 모습을 보니 한나라당 전여옥 의원이 지난달 4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이 떠올랐다.
"한나라당은 종교와 마찬가지로 당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같은 가치를 지닌 사람들이 당원이 되어야 하는 정당이다...그런데 이 엄기영이라는 분, 한나라당을 사랑하지도 신뢰하지도 않는다"
"내가 선택한 것은 한나라당이 아니라 강원도"라는 엄 전 사장의 발언, 그리고 한나라당의 여전한 '엄기영 알레르기'를 보건데, 엄 전 사장은 한나라당의 요구, 그리고 자신의 선택을 넘어선 어떤 힘에 의해 강원도지사 후보가 됐다.
결국 '당심'보다 더 '윗선'인 누군가의 뒷배를 믿고 있는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이명박-엄기영 '막걸리 회동'의 진실은 무엇일까? 이 대통령이 말한 게 "한나라당의 반발은 계산하지 말라. 공천은 내가 보장한다"라는 것이었을까?
민주당에게 안겨준 당혹감, 한나라에게 못 안겨주리란 법 없다
엄 전 사장은 강원도의 '자랑'이다. 태어난 곳(충북 충주 출생)을 떠나 춘천중-춘천고 졸업 타이틀은 '강원도 사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강원도 지역지 기자 출신인 한 인사에 따르면 "강원도에서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은 '춘고냐 아니냐'로 나뉜다"고 할 정도다. 그런 그가 똑 부러진 MBC 메인 앵커로 활약하는 모습은 강원도 사람들에게 일종의 '자부심'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기자 생활'을 기억하는 인사들은 겉으로 비치는 똑 부러진 이미지와 다른 평들을 내놓는다. 방송계 한 관계자는 "엄기영 하면 과거 바바리 깃을 세우고 파리에서 고독한 '도시 남자' 이미지를 풍기는 것으로 뜬 사람, 그 정도의 인상이 전부"라고 말했다.
'기자 엄기영'의 일면을 보여주는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MBC가 한 대형 교회의 비리 의혹을 파헤쳤는데, 이 교회의 항의를 받은 엄 전 사장(당시에는 사장이 아니었다)이 "앞으로 (해당) 교회를 취재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 줬다는 것이다. 이후 기자들이 또 다시 이 교회를 취재하자 교회 사람들이 MBC에 몰려와 엄 전 사장이 써 준 각서를 내놓았고, 이를 본 기자들이 "자기가 취재한 것도 아니었을텐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라고 푸념했다고 한다.
"엄 전 사장은 분쟁에 휘말리는 것을 싫어하는 인물"이라고, 그를 경험한 사람들은 말한다. 대학 시절의 모습도 그러했다. 엄 전 사장의 대학 시절을 지켜본 한 인사는 "그는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는 조용한 친구였다. 데모에도 몇번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 분란에 휘말리거나, 남에게 싫은 소리를 듣는 것을 싫어했다"고 말했다. 그 인사는 "그러나 엄 사장은 조용히 있다가 어떤 결론을 내리는데, 그 결론은 자신에게 이익이 가는 쪽이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엄 전 사장이 한나라당 입당을 두고 신경민 MBC 논설위원은 <기자협회보>에 기고한 글에서 "(엄기영 전 사장은) 나쁜 짓에 앞장서지 못했지만 옳은 일에 앞장서지도 않았다. 종국에는 올바르고 바람직한 결정보다는 당시 유리하다고 여겨지는 결론을 택했다"고 말했다. 엄 전 사장이 물러나면서 노조원 앞에서 'MBC 화이팅'을 외친데 대해서도 신 위원은 "그 제스처 취함이 자신에게 유리했을 거라 봤을 것"이라고 말했다. 쉽게 말해 그가 '기회주의자'이라는 말이다.
언론 인터뷰를 보면 자신의 무상급식 공약과 관련해 "(무상급식을 반대하는) 한나라당과 토론하겠다"고 공공연하게 얘기하기도 한다. "내가 선택한 것은 한나라당이 아니라 강원도"라는 발언이 한나라당 당원들에게는 얼마나 불쾌한 표현인지 엄 전 사장도 잘 알고 있을터다. 그런 '제스처'가 자신의 당선에 유리하다고 본 것일까?
엄 전 사장은 여전히 '미스테리'한 인물이다. 엄 전 사장의 이같은 어지러운 '행보'를 보고 추측하건데, 지금 민주당이 느끼고 있는 '어처구니 없다'는 감정을, 앞으로 한나라당이라고 못 느끼라는 법도 없을 것 같다.
'인지도'만 갖고 '거친 도지사 레이스' 견딜 수 있을까?
정치인 엄기영은 어떨까? 그가 정치인으로서 보여준 것은 거의 없다. 지난 33일간의 '한나라당 생활'이 전부다. 정치의 꽃인 선거에 덜컥 출마한 '정치 신인' 엄 전 사장을 향해 한나라당 재선 의원인 전여옥 의원은 "한 번도 제대로 된 선거를 치러 본 적이 없는 엄기영씨가 과연 제대로 그 거친 도지사선거 레이스를 치러낼 수 있을까도 의문"이라고 했다. 선거는 물리적 한계를 고려할 겨를 없는 순간적 판단들과 실천들의 연속이며, 이를 위해 극한의 정신력과 체력을 필요로 한다.
전 의원이 간과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엄 전 사장이 지닌 최대의 '장점'인 인지도다. 대부분의 정치 신인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것을 엄 전 사장은 갖고 있다. "대통령보다 더 많이 알려진 얼굴"이라는 평까지 받을 정도다. 인지도는 '감성의 선거'와 직결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감성에 호소하는 선거를 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에게 씌워진 '배신'의 이미지로 인해 그는 선거를 정책 대결의 장으로 몰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자신의 장점을 일정 부분 포기한채 선거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상대 진영인 민주당은 이광재 지사를 내세워 "감성의 정치"를 일찌감치 기획하고 있다. '정치 신인' 엄기영이 이를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 상대는 같은 MBC 사장 출신이지만 MBC를 배신하지 않은, 또 엄 전 사장에 비해선 뚝심 있어 보이는 최문순 후보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춘고 4년 선, 후배 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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