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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년 황태자와 2010년 영일대군…'레임덕'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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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년 황태자와 2010년 영일대군…'레임덕'의 그림자

[분석]'경고'를 무시한 청와대와 집권여당…그 결말은?

"내가 선택한 일은 내가 책임지겠다. 누가 옳았는지 내년 대선을 통해 심판받겠다."-1996년 노동법 날치기 처리 이후 이홍구 신한국당 대표

"이번 한나라당의 예산안 날치기 처리를 유권자들이 표로 심판한다면 심판 받겠다. 잘못 했다면 정권을 내주면 된다."-2010년, 예산안 강행 처리 이후 한나라당 고위 관계자

96년 12월 26일, 15대 대통령 선거를 1년 앞둔 시점에서 관광버스 4대가 국회 후문을 통과했다. 버스에는 팔레스, 나이아가라, 마포가든, 리버파크 호텔 등 서울 시내 4개 호텔에 집결해 있던 신한국당 및 친여 성향 의원들 154명이 타 있었다. 버스가 국회 본청 앞에 정차하자 154명은 본회의장으로 신속히 이동했다.

새벽 6시, 신한국당 소속이던 오세응 국회부의장의 개회 선언으로 본회의가 시작됐다. 윤영탁 국회 사무총장은 이미 속기사 등 국회 직원들을 소집해 놓은 상태였다. 154명의 의원들은 "표결을 시작하겠다"는 구호에 맞춰 일사분란하게 총 11번을 일어섰다 앉았다. 이런 식으로 11건의 노동, 안기부 관련법이 처리되는데는 정확히 6분이 걸렸다.

이 자리에는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 홍준표 최고위원, 김문수 경기도지사, 이재오 특임장관, 정의화 국회부의장 등 공천 개혁 바람을 타고 영입된 당시 '젊은 초선' 의원들이 앉아 있었다. 154명과 함께 당시 김영삼 정부 보건복지부 장관이자 15대 국회의원이었던 손학규 현 민주당 대표도 이 모든 과정을 지켜봤다.

이 사건의 배경은 이렇다. 95년 지방선거에서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새정치국민회의에 패배한 신한국당은 이듬해 15대 총선을 앞두고 대대적인 물갈이를 감행해 승기를 되찾아 왔다. 노동법 날치기는 정권 하반기의 총선 승리 분위기 속에서 "야당에 밀리면 레임덕"이라고 판단한 김 전 대통령이 주도한 것이었다. 한나라당 홍준표 최고위원의 '증언'에 의하면 '날치기'를 끝낸 일부 의원들은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축배"를 든다.

▲ 1996년 12월 27일자 동아일보 1면 ⓒ동아일보

그러나 여론은 크게 분노했다. 노동계의 총파업이 이어졌고, 시민단체와 함께 야당은 장외 투쟁에 나섰다. 설상가상으로 이듬해 1월에는 '한보 사태'가 터졌다. 이는 97년 외환위기의 '신호탄'이었다. 이어 '대통령 아들(김현철 현 여의도연구소 부소장) 비리'가 함께 딸려나왔고, 취임 초 90%에 육박하는 인기를 구가했던 YS 정권은 민심의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이 됐다.

이 사건이 바로 지난 13일 홍준표 최고위원이 언급했던 96년 노동법 파동의 전말이다.

黨 "홍준표 발언은 대단히 부적절…총선은 1년 반이나 남았다"

"지난 12월 8일 본회의장에서 의장석 몸싸움을 보면서 저는 96년 12월 25일 노동법 기습처리를 생각했다. 당시 우리는 승리했다고 '양지탕'에 가서 거사를 축하하고 축배를 들었다. 96년 12월 25일 아침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YS정권의 몰락의 신호탄이었고 바로 한보사건이 터지면서 YS정권은 몰락하고 IMF가 초래되면서 우리는 50년 보수정권을 진보진영에게 넘겨줬다." -12월 13일 홍준표 최고위원

'노동법 파동'은 한나라당 입장에서 '트라우마'에 가깝다. '한나라당' 출범의 직접적 원인은 아니더라도, 일종의 '탄생 비화'로 볼 수 있는 사건이었다. 그 '악몽'같은 일을 현 집권당 최고 지도부이자, 당시 날치기 '동원병' 중 하나였던 홍 최고위원이 직접 꺼내 경고를 했다. 최근 민심이 심상치 않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당 내에서 홍 최고위원의 경고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홍 최고위원의 발언이 있은 후 한나라당 핵심 관계자는 "직접 겪지 못한 일이라 잘 모르겠지만, 홍 최고위원의 발언은 대단히 부적절한 것"이라며 깎아내렸다.

▲ 한나라당 홍준표 최고위원 ⓒ프레시안(최형락)
이 관계자는 "이번에 우리가 날치기 처리를 한 것과 관련해 민심이 매우 악화돼 걱정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날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며 "중간층이 달아난다. 총선이 걱정된다는 말들 있긴 하지만, 총선? 아직 1년 반이나 남았다. 벌써부터 그런 걱정을 해서 어떻게 정국을 운영하겠느냐. 그런 사람들이 멀리 보지 못하고 자신의 지역구에 연관된 눈앞의 이익만 보는데 급급한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당의 핵심을 이루는 인사들이 바닥 민심은 커녕 수도권 의원들 중심으로 '총선 공포'가 확산되고 있는 자당 의원들의 '당심'도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두언 최고위원은 "이 상태로는 총선이 어렵다"고 내다봤고, 수도권 의원들 사이에서는 "2004년 탄핵 정국 참패의 추억"이 공공연하게 회자되고 있다. "당청 분리를 해야 한다"는 과격한 언사까지 등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96년 이홍구 전 대표의 발언과 2010년 한나라당 고위 관계자의 발언을 보면 차이점을 찾기 어렵다. 다만 노동법 날치기 1년 후인 97년, 한나라당은 정권을 내 줬다. 이 때문에 2012년 총선 결과는 더 궁금해지고 있다.

홍준표는 '본능적'으로 '레임덕'의 시작을 봤다?

"홍 최고위원의 경고는 이해할 수 있지만, 정치 상황 자체가 지금과 다르다"는 반론도 나온다.

YS정권의 핵심부에 있었던 한 인사는 "홍 최고위원의 말을 오독해서는 안된다. 시간이 흐른 후 많은 사람들이 노동법 날치기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레임덕'의 시작이라고 봤다. 홍 최고위원의 말은 정치상황이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데 대한 우려가 아니라, 12월 8일 난장판인 국회 상황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레임덕'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홍구 대표가 명동성당 농성 중인 시민사회 지도자들을 만나러 갔다가 면박을 당하는 등 여론이 악화되자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직접 나서 사태 해결을 모색했다. 결국 여야 영수회담이 열렸고, 김 전 대통령은 노동법 재개정에 합의를 했다. 이후 '노동법 파동'은 정치권에서 사그라들었지만, 김 전 대통령이 역사적 정당성을 갖고 밀어붙여 통과시켰던 노동법 개정안을 철회한 것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문제는 노동법 파동 수습, 그 이후였다. 97년 1월 터진 '한보 사태'는 노동법 날치기 파동 직후 민심을 갈갈이 찢어 놓았다. 당시 한보그룹 산하 한보철강에 정부 기관이 편법 특혜 대출을 해 준 것 등이 한보그룹 부도로 이어졌는데, 이 때 연루된 인사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 현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이다. 노동계와 시민사회가 등을 돌린 후, 노동법 파동이 수습되기도 전에 터진 대통령의 '친인척 비리'는 민심을 뒤틀어버렸다.

홍 최고위원이 전형적인 권력형 비리이면서, 김 부소장이 연루됐던 '한보 사태'를 언급한 것은 그래서 주목되는 부분이다. 이번 '예산안 파동'에 따른 민심 악화의 결정적 계기는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의 '형님 예산', 그리고 김윤옥 여사의 '영부인 예산(한식세계화사업 예산)'이 불거지면서다. 결식아동 무상급식, 영유아 예방접종 등 서민층의 복지예산은 삭감됐다는 점과 대비되면서 대통령 '가족 예산'은 더 민심을 자극하고 있다. 또 이명박 대통령은 "친인척 비리가 없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현재 대우조선해양 남상태 사장 연임 로비 의혹, 민간인 불법 사찰의 '몸통' 논란과 관련해 이명박 대통령 친인척을 비롯한 측근들 이름이 거명되고 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청와대는 조용하다.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한나라당 개혁성향 초선 의원 그룹인 '민본21'도 조용하다. 홍 최고위원은 "지금 전열을 재정비할 때"라고 주장했다. 즉 더 여론이 악화되기 전인 지금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한나라당도 민심을 달래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 당 공식 회의조차 이틀째 열리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해 당 관계자는 "무대응이 최선의 대응"이라고 한다. 여론이 숨죽기를 바라는 것일까?

예산안 단독 강행 처리 후폭풍으로 민심이 요동치고 있는 상황에서 이 대통령은 14일 각 부처 업무보고를 받기 시작했다. "긍정적으로 예산을 집행하자"는 놀라울 정도로 정제된 일성과 함께였다. 연평도 사태 직후 보수 여론에 밀려 전광석화처럼 김태영 전 국방부장관을 내쳐 '보수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과는 비교된다. 복지 예산 삭감에 분노하는 민심은 야당의 정치적 책동으로밖에 인식되지 않는 것일까?

물론 홍준표 최고위원이 '트라우마'를 고통스럽게 꺼낸 건 나름의 정치적 계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누구보다 민심의 변화를 빠르게 읽어내야할 집권당 지도부가 그의 말을 '정략'으로 치부하는 태도에서 희망은 읽어낼 수 없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생각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조선일보> 등 보수 언론조차 이번 예산안 강행처리에 싸늘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떠오른 김문수 경기도지사의 말이다.

"청와대가 구중궁궐이라 대통령이 여론을 잘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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