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 예산 등의 누락과 관련해 안상수 대표가 제기한 '정부 책임론'도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의 반박에 부딪혔다. 예산안 단독 강행 처리 문제에 따른 '청와대 거수기 논란'과 관련해 홍준표, 정두언 최고위원 등 당내 인사들이 노골적인 불만을 제기하고 있어 가뜩이나 당 대표의 체면이 구겨진 마당인데, 정부 고위 당국자조차 안 대표에 불신을 표한 셈이다.
윤증현 "'부실 예산'이 재정부 책임? 동의하지 않는다"
한나라당이 '부실 예산'의 책임을 정부에 떠넘기고 있는 것과 관련해 윤증현 장관이 13일 작심한 듯 반박하고 나섰다.
윤 장관은 이날 안상수 대표를 면담하기 위해 여의도의 한나라당 당사를 찾았다. 이날 간담회에 대해 한나라당은 비공개로 진행한다고 공지를 띄웠다. 윤 장관이 발언이 노출될 기회가 없는 일정이었다. 그러나 윤 장관은 안 대표와의 비공개 간담회가 시작되기 전 전 일부 기자들과 만나 "당 일각에서는 정부의 준비 부족으로 지금과 같은 예산 문제가 일어났다는 얘기가 나온다"는 질문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불쾌감을 표했다.
▲ 지난달 24일 연평도 피격 현장에서 안상수 대표와 한나라당 당직자들이 보온병을 들어보이고 있다. ⓒ연합 |
앞서 안 대표가 "70% 복지"를 천명하고 그 실천 방안으로 공언해왔던 영유아양육수당 지원 예산, 영유아필수예방접종비 지원 예산 등의 증액분, 그리고 결식아동급식비 지원 예산은 한나라당의 예산안 단독 강행 처리 과정에서 모두 '분실'됐다. 불교계와 약속했던 템플스테이 예산 일부마저 사라진 상태다.
'한나라당표' 복지 예산이 누락된 것과 관련해 안 대표는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당의 예산 반영 요구와 관련해 기획재정부가 (일부 예산을) 삭감했다는 보고를 받았다"며 이와 관련해 "문책 대상이 있다며 문책할 것"이라고 밝히는 등 기획재정부를 주범으로 지목했다.
그러나 윤 장관은 이날 "20일 정도 (예산안 처리 시한이) 단축되는 과정에서 일부 소통이 제대로 안 된 부분이 있다. 앞으로 소통이 완벽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문제에 대해 당이 논의해줘야 한다"고 오히려 정부와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당의 문제를 지적했다. 윤 장관은 한발 더 나아가 "예산과 재정 문제에 있어서 지켜야 할 기준과 원칙을 당도 존중해 줘야 한다"고 주문까지 했다.
정부 입장에서 봤을 때 한나라당이 요구하는 '복지 예산'도 재정에 부담이 될 '과도한 요구'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는 말이다. 윤 장관은 민주당 등 야당이 요구하는 추가경정예산 긴급편성에 대해서도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고 거부했다. 야당이 요구하고 있지만 여당의 논의 테이블에도 오를 수 있는 문제인데, 윤 장관이 미리 방어막을 친 것으로 풀이된다.
윤 장관의 발언에 앞서 전날 오후 7시 경 기획재정부는 '국회에서 확정된 2011년 예산 주요내용'이라는 보도자료를 통해 한나라당의 책임 떠밀기를 우회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재정부는 이 자료에서 "일부 언론은 국회 복지위가 증액 의결한 사업이 예결위에서 미반영된 경우 '삭감'되었다고 보도하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며 "예산 삭감 여부는 정부안과 본회의에서 확정된 최종 예산을 비교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즉 복지 예산 등이 최종예산이 미반영된 것은 한나라당이 단독으로 처리한 '최종 예산안'의 문제이지, 최초 '정부안'을 제출해 심의를 요청했을 뿐인 기획재정부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다.
윤 장관이 이처럼 '뻣뻣하게' 나서자 안상수 대표가 이날 비공개 간담회에서 윤 장관에게 고성을 지르며 화풀이를 했다는 후문이다. 안 대표는 "당 대표가 요구한 예산이 하나도 반영 안됐다. 우리가 무슨 바보냐. 너희만 똑똑하느냐"는 식으로 윤 장관을 몰아세웠다. 윤 장관은 이날 안 대표에게 사과는 하지 않고 유감을 표명하는 데서 그친 것으로 알려졌다. 윤 장관은 회동 직후 일부 기자들과 만나 "할 이야기는 다 했다. 얘기하다보면 큰 소리도 나올 수 있는 거지..."라며 말을 아꼈다.
청와대에 '까이고', 정부에 '물 먹고'…당에서도 '골칫덩어리'
한나라당 홍준표 최고위원이 이날 오전 최고위원회의에서 "이번 예산파동의 책임을 재정부로 돌리는 입장은 잘못"이라며 "기획재정부는 예산을 관료적인 입장에서 처리하는 것이고 이를 정치적으로 국민적 시각에서 고치는 것이 국회와 당의 책임"이라고 말한 것도 안 대표를 겨냥한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안 대표는 또 예산안 처리 직후인 지난 11일 자신의 지역구(경기도 과천·의왕) 소재 언론사 등에 "행정안전부로부터 의왕시 왕림천 정비공사에 필요한 20억원의 특별교부금을 확보했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뿌려 구설수에 올라 있기도 하다. 안 대표 측이 수 개월 전 행안부에 요청한 사안이라고 해명하고 있지만 '당 대표 공약 예산'도 확보하지 못한 집권당 대표가 자신의 지역구 예산은 꼼꼼하게 챙겼다는 비판도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이다.
고흥길 정책위의장의 '사실상 경질'이 청와대 외압 때문이라는 정황이 나오고 있고, 홍준표, 정두언 최고위원 등 당 지도부 안에서조차 불신의 목소리가 비등한 가운데, 정부 당국자에게도 무시당하는 안 대표의 '리더십'은 현재 위기에 직면해 있다. 최근 '보온병 포탄' 발언으로 KBS <개그콘서트> 등에서 각종 패러디의 소재가 되고 있는 안 대표의 가벼운 존재감 역시 한나라당의 큰 골칫덩이다.
정두언 최고위원은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이번 예산안 후폭풍과 관련해 "당 리더십 공백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라며 "앞으로 다가올 선거를 생각해보면 안상수 대표체제는 아닐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 예산안 강행 처리 후폭풍이 수그러들지 않자 정부와 한나라당은 템플스테이 지원 예산, 재일민단 지원, 춘천-속초간 복선전철 등 삭감된 3개 분야 예산을 올해 수준으로 복원키로 하는 등 수습에 나섰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나와 예산안 후폭풍이 이런 미봉책으로 수그러들지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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