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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노선 민주주의'를 넘어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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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노선 민주주의'를 넘어서야

[민미연 포럼] 우리는 '더불어 함께' 살고 있을까?

몇 년 전 수도권의 한 빌라촌에 살았다. 폐지 노인의 수와 행색이 경험한 곳 중 심한 편에 드는 동네였다. 그날도 평소처럼 폐지 리어카가 인도 옆에 붙어 힘겹게 도로를 지나갔는데, 평소와 조금 달랐던 건 한 초등 3, 4학년쯤 돼 보이는 꼬마 아이였다. 아빠 손을 잡고 가던 그 아이는 고개를 돌려 한참이나 폐지 리어카의 뒤뚱거림을 응시했다. 아이는 무슨 생각이 들어 그랬을까? 아빠가 말했다. "너,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

얼마 전 실시된 설문 하나가 눈에 띄었다. '우리나라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살아간다는 느낌을 가진다.' 이 질문에 몇 %나 그렇다고 답했을까? 10명 중 3명, 31%다. 이 답변 숫자는 보기에 따라 너무 적고 또는 너무 많다.

위 조사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세대별로 다른 인식이다. 20대는 18%, 30대는 24%, 40대는 38%, 50대는 46%가 '더불어 함께 살아간다는 느낌을 가진다'고 응답했다. 40·50대라고 비율이 높은 건 아니지만, 20·30대와 적잖은 차이가 난다. 노후의 생활 격차가 극심한 60·70대가 조사대상에서 빠졌는데, 그들은 어찌 생각할지 궁금하다. 짐작으로는 극심한 빈부 차에도 불구하고 제일 높은 응답률이 나왔을 것 같다.

한국은 예나 지금이나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게 무엇인지 경험해본 적이 없거니와, 이에 대해 문제의식은 느껴도 극복을 위한 의지도 실천도 미약하다. 한때는 그렇게 살아도 '표면적으로는' 큰 문제가 드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나름대로는 한국 자본주의의 황금기라 불리는 호시절을 구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으로 구성된 사회가 연대하며 같이 사는 방법을 활용치 못하는데, 탈이 안 나고는 못 배긴다. 무릇 문제는 점증하는 것이니, 각개약진형 사회의 피해는 어린 세대일수록 더 크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흉흉한 세태에 대한 현실 인식이 젊은 세대에서 더 심화된 것은 지나친 각자도생의 폐해가 악화일로에 있다는 방증일 터다. 또한 '무슨 사회를 이따위로 망쳐놓았냐'는 청년들의 원망일 터다.

▲ 지난겨울 촛불집회 당시 국정농단 주범인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와 같은 20대들은 '유라는 특혜인생 우리는 최저인생'이라는 현수막을 들고 나왔다. ⓒ프레시안(최형락)

'더불어'란 당명을 쓰는 정당의 지지율이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인품이 높고 희생 정신이 강한 대통령이 어금니까지 절개해가며 분투하고 있지만, 한국의 '더불어 살아가기'는 여전히 난관에 봉착해 있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이를 '마지노선 민주주의'의 한계라고 이해한다. 아래 김 교수의 글을 인용한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나쁜 대통령을 유권자의 투표로 심판하기 위해서 촛불을 드는 '방어적 성격의 민주주의'라는 생각이다. 주로 대통령 심판의 권리를 양보할 수 없는 민주주의의 쟁취 및 수호의 경계로 삼고, 고용과 소득의 불안정과 약자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은 삶의 현장에서 각자 맞서 싸우거나 적응해야 할 사적인 문제라 여기는 민주주의다. 이런 민주주의에서 사적인 문제는 공적 공간인 촛불의 광장과 거리에서 다루어서는 안 되며, 다룰 수도 없다. 옳음과 그름을 판정하기엔, 또 촛불의 대의로 삼아 내기엔 너무나 내밀하고 복잡하기에 그러하다."(<경향신문> 8월 29일 자 '[시론] '마지노선 민주주의'를 넘어서기')

'마지노선 민주주의'도 중요하다. 이것이 무너지면 '차악'마저 사라지며 극심한 정치적 혼란 속에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불공정을 해결할 동력이 아예 소멸한다. 동시에 '마지노선 민주주의'를 극복해야, 탄핵을 이유로 촛불 시위에 나설 필요가 없는 강인한 민주주의를 확립할 수 있다. 고용과 소득의 불안정과 약자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은 삶의 현장에서 각자 맞서 싸우거나 적응해야 할 사적인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테이블에 전 국민적 의제로 반드시 올라와야 한다. 그렇지 못한 민주주의는 사상누각일 뿐 아니라 약자들에게는 위선의 민주주의다.

잠깐 통계 이야기를 하자. 지니계수를 비롯한 OECD의 전통적 격차 지표는 모두 샘플조사에 근거한 균등화가처분소득을 토대로 한다. 가구의 가처분소득(쉽게 말해, 소득-세금+복지)을 가구 구성원을 고려해 재조정한 것이 균등화가처분소득이다. 각국의 연구자들은 이 격차 측정의 오류를 지적하며 국세청 자료를 보강해 전체 성인인구를 대상으로 상위 10%의 소득 점유율을 뽑아냈다.

새로운 격차 지표에서는 전에 잘 보이지 않던 격차의 면모가 선명하게 드러났는데, 그중 하나가 소수 부유층이 많이 쓸어가는 사회는 그 아래 상위소득층도 많이 챙겨간다는 점이다. 반대로 보면, 소수 부유층을 제외한 고소득층이 적게 차지하는 사회는 소수 부유층 역시 적게 차지한다. 이는 소득을 가져가는 사회의 풍토가 나라마다 다르며, 유형무형의 사회적 규율에 따라 일부 상류층과 이하 상위층의 '소득 과점유'가 제어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국은 안타깝게도 각자도생에 잠식된 사회를 증명하듯, 수십만의 부유층은 물론 몇백만 명의 고소득층에도 너무 많이 편중돼 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다. 너나 할 것 없이 각자가 알아서 세상에 맞서 싸워왔다. 이 방식에선 필요 이상의 격렬한 경쟁을 피할 수 없고, 경쟁에 힘들었던 만큼 보상을 극대화하려는 심리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심대한 경쟁이 심대한 격차로 전이할 때 밀려나면 안 된다는 관념이 전 사회를 뒤덮고, 결국 '내 밥그릇 불리기' 세태가 필연적으로 가속화·고착화된다.

앞으로는 이전과 반대로 살아갈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법은 무엇인지 고민과 대화가 늘어나야 한다. 같이 살자는 희망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길 소망한다. 그처럼 사람이 사람다워질 때, 비로소 나라다운 나라가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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