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수확철이 다가오는 남도참밀과 앉은뱅이밀도 이삭을 달고 나란히 사이좋게 서 있다. 알갱이가 "파싹 잘 떨어져서 파싹밀"이라고도 하는 남도참밀은 키가 크다. 줄기가 노랗게 이쁘게 단풍이 들어 예전에는 밀짚모자 만들고 여치 집도 만들었다. "어릴 때 풀 베러 가다가 너무 배고픈 께 한 뭉치씩 베어다가 불에 꼬실라 묵고 밀껌도 만들어" 먹었다. 밀껌을 종일 씹고도 잘 때 벽에 붙여놓고 자면, 아침에 먼저 일어나 먹는 형제가 임자였다. 누룩이나 술을 빚고 수제비, 개떡도 만들어 먹으면 맛있다. 거칠면서 찰기가 있다.
150종 되는 토종 종자들을 심고 거두고 나누는 일만으로도 바쁜 이영동 농부는 요즘에 일이 하나 더 늘었다. 평생 함께 해온 토종 씨앗 이야기를 하나하나 정리하고 기록해가는 일이다. 2년 전 혼자서 타자치는 것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딸이 안 쓰는 헌 컴퓨터를 물려받아 혼자 배워가며 자료를 정리하고 있다. 독학으로 익히는 컴퓨터 사용법은 어렵기만 하고 인터넷도 안 되니 자료 정리는 하세월이지만, 짬짬이 해나가려고 한다. "해야 할 일이 많은디 눈이 많이 안 좋아져서" 걱정도 된다. 작물 사진도 손수 찍는다. 구도며 솜씨가 전문 사진가 못지않다. 사진을 보며 감탄을 쏟아내니, "사진 찍을라믄 상댕히 정신을 차리고 안 떨리고 할라고 애를 쓴"다며 멋쩍어한다. 작물을 바라보는 농부의 애정 어린 눈길과 남다른 미감이 고스란히 전해오는 사진들이다. 가장 아름다운 피사체인 자연과 오랜 세월 교감하며 저절로 터득한 미감이리라. 귀한 자료들 가운데 재미있는 사진이 눈에 띈다.
"납때기라고 야생 약콩인디, 여름에 노지에서 콩나물로 길러 먹어요. 모양이 납작해서 이름이 납때기. 병해충에 강해요."
콩나물은 시루나 주전자 같은 그릇에 담아서 키워 먹는 것인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노지에서 키울 수도 있구나. 신기하다.
납때기 말고도 농부가 키우는 약콩으로 반납때기, 쥐눈이콩이 있다. 콩도 그렇고 작을수록 야생성이 강하고 자연에 가까운 종자라 약성이 있다. 콩나물을 길러 먹을 수 있는 나물콩으로는 올쥐눈이, 다산쥐눈이, 노랑준줄이, 파란준줄이가 있고, 볶음용 콩으로 피마자콩, 피마자밤콩(아주까리밤콩), 밤콩, 서리태가 있다. 볶음용 콩은 입이 궁금할 때 군것질거리로 좋다. 밥에 넣어 먹는 밥밑콩으로 초록콩, 선비잡이콩, 밤콩, 서리태, 청태, 파란고물콩이 있으며, 장을 만드는 장콩으로 남도장콩, 푸르대콩이 있다. 된장 맛이 좋기로는 푸르대콩이다. 동부는 여름부터 가을까지 오랫동안 밥에 넣어 먹을 수 있는 콩이다. 밥에도 넣어 먹고 떡고물로도 쓴다. 쌀이 귀하던 농부의 어린 시절에 어머니는 동부를 종류별로 울타리에 심어 철철이 밥에 넣어 해주셨다. 지금도 그 맛을 잊지 못해 해마다 심고 밥에 넣어 먹는다. 음력 유월이면 맨 먼저 따먹을 수 있는 유월동부부터 각시동부, 새알동부, 붉은동부, 개파리동부, 흰동부가 있다. 강낭콩으로 앉은뱅이강낭콩, 넝쿨성 울타리 강낭콩, 제비콩, 흑진주콩이 있다. 제비콩은 까치콩, 편두라고도 하는데 부종에 좋은 약콩이다. 꽃도 이쁘다.
콩은 한반도가 원산지인 만큼 토종 콩 종류도 다양하다. 어머니와 할머니들이 울타리에, 논둑에, 자투리땅만 있으면 어디에나 부지런히 심고 또 심어온 덕분이다. 우리 밥상에 결코 빠질 수 없는 장이 되는 재료여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척박한 땅에 잘 자라고 맛이 있기 때문일 게다.
농부의 가지가지 토종 콩 이야기가 굽이굽이 토종 농사 이야기로 이어진다.
콩은 맛도 좋지만
콩은 맛도 좋지만 콩을 심으면 땅이 부글부글해서 흙이 안 굳으니 땅에도 좋죠. 콩 후작으로 보리를 심으면 보리가 양분을 얻어먹고 궁합이 잘 맞아요. 토종은 거름기 없고 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데 콩은 특히나 거름기 없는 땅에서 잘 되고 흙을 기름지게 하죠. 토종이어도 다비성 작물인 마늘이나 양파는 거름을 줘야 알이 실해요. 풀로 거름을 만들어서 써요. 다른 작물도 그렇고요
새는 콩도 자꾸 일찍 심는데 너무 일찍 심으면 되려 콩 꼬투리가 안 차고 수확이 안 좋아요. 때를 맞춰 심는 것이 좋죠. 토종은 자연 속에서 자연이 만든 종자라 그래요. 작물을 야생종, 토종, 개량종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야생종은 말 그대로 야생에 사는 것으로 사람 손이 필요 없어요. 토종은 벌, 나비, 바람에 의해 교배되거나 변한 것들이고요. 자연스럽게 교배되거나 변이된 것들이 우리 선조들의 손길을 거쳐 추려져서 전해 내려왔어요. 토종이 자연 생태계에 맞춰져 있는 종자라면 개량종은 인간이 만든 신품종이죠. 인간에 길들여지고 인간에 맞춰진 종자다 이 말이어요. 수확이 많게 인위적으로 교배시킨 육성종이라 인공적인 간섭이 많이 필요해요. 화학비료를 줘야 하고, 영양제도 줘야 하고, 풀도 잘 매줘야 하죠. 토종은 그런 게 별로 필요 없어요. 스스로 잘 자라는 성질이 있고 강해요.
생김새도 그래요. 토종 콩은 동글납작하고 타원 모양이죠. 땅에 닿을 때 습기를 머금기 쉽고 낙엽 사이에 스며들기 쉬울라고 그래요. 이 피마자밤콩도 왜 이렇게 생겼냐. 색깔이 어둡고 무섭게 보일 수도 있어요. 새한테 발견되지 않으려고 그럴 것이다, 살려고 하는 전략이죠. 벼도 토종은 빛깔이 어두컴컴하고 안 반짝거려요. 조류에 안 띄게. 빛이 나면 들켜서 먹히잖아요. 토종은 토종만의 씨앗 특성이 있어요. 눈이 또렷하고 겉 빛깔이 흙색이나 낙엽 색깔이 많아요. 열매나 씨앗이 작고 단단한데 무성하게 잘 자라고 키가 크죠. 개량한 신품종은 대부분 화려하고 반짝거려요. 씨앗이나 열매가 커요. 토종은 자연과 환경에 맞춰 자기 스스로 살려고 하는 야성과 전략이 있어요. 종자 수명이 길고 생명력이 강하고 척박한 땅에 강해요. 자연 친화성이 있어서 친환경 재배, 자연 재배에 맞는 종자죠. 납때기콩은 풀하고 같이 키우는데 풀 속에서 같이 잘 자라요. 낙엽이 되어서 양분도 주고받고 공생하지요. 벼도 그래요. 키가 커서 벼랑 경쟁이 되는 피는 뽑아야 하지만 키가 작은 풀은 벼랑 공생해요. 토종은 풀하고 같이 커야 하니 키가 클 수밖에 없고 뿌리를 길게 뻗지요.
조선시대 벼가 1451종류
조선시대에 벼가 1451종류 있었다고 해요. 지금은 농촌진흥청에 350종류가 있다고 하니 많이 줄었죠. 우리 아버지도 그랬지만, 옛날 어른들은 가을에 수확할 때 좋은 종자가 있으면 몇 이삭 갖다가 벽에 걸어놔요. 그것을 심어보고, 좋은 종자가 나오면 또 심어보고. 그래서 1451종류가 된 거죠.
콩 종류는 변이가 별로 없는 편인데 벼와 채소는 변이가 잘 돼요. 내가 갖고 있는 채소와 벼 종자의 반절은 변이를 찾아 계속 심어보다가 종자로 선별하고 선택한 것들이에요. 벌이나 나비에 의해 자연스럽게 자연 교배된 것을 내가 중간에 추려서 선별하고 채종하는 거죠. 이름도 새로 붙이고요. 수확이 괜찮고 밥맛도 좋으면 한 5년 심어봐요.
변해버리는 종자도 있는데, 안 변하고 고정되는 것은 종자로 삼을 수 있어요. 남한테도 줄 수 있고요. 30년 넘게 심으면 토종으로 볼 수 있어요. 그 지역과 환경에 적응한 거죠. "품종 등록해서 다른 사람이 못 쓰게 하세요"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그럴 생각 없어요.
벼만이 아니라 콩도 그래요. 계속 심어야 하는데 안 심응께 변이가 안 일어나요. 지금도 토종은 만들어지고 있어요. 원래 콩은 한반도가 원산이잖아요. 콩 말고는 다 외국에서 온 거죠. 옥수수는 멕시코에서, 참깨는 인도에서. 옥수수도 참깨도 우리나라에서 살다 보니, 우리 것이 된 거여요. 환경에 적응한 거죠. 환경이 무쟈게 중요해요. 멕시코 옥수수가 우리나라로 오는 거랑 열대지방으로 가는 거랑 달라져요. 한 시기에 같은 종자가 가도 다 달라져요. 환경 따라가고, 생존 전략이죠.
남부지방 식물을 강원도에 심으면 적응 기간이 필요해요. 강원도 씨앗을 귀농인들이 갖다 줘서 여기 심어 보면 뭔가 흠이 있고 썩 잘 안 되더라고요. 강원도는 강원도 토종이 좋고 여기는 여기 토종이 좋죠. 그 지역의 환경에 영향을 받는 거죠. 여기에 적응시키려면 몇십 년 가야 겄지요.
논에 보면 키가 크게 삐죽삐죽 나와 있는 벼가 있어요. 크고 강한 종자가 돼서 자연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거죠. 식물 자체로 봐서는 살려고 하는 본능인데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다 버리죠. 모든 작물은 자연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성질이 있어요. 신품종에서는 좋은 변이종자가 안 나타나요. 인위적으로 만든 거라서. 토종에서는 쓸 만한 종자가 많이 나타나요. 자연적인 것은 자연생태계에서 우주의 법칙에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에 좋은 종자가 나타나는 거고요. 변이가 생기는 것은 돌연변이 생존 전략이죠. 여러 형태의 변종 후손을 만들어 척박한 환경에도 살아남고 적응하고 변하려고 변이가 생겨요. 토종을 많이 다양하게 심어서 좋은 변종들을 많이 찾아내야 해요. 안 심응께 변이가 안 생겨요.
지금 우리 토종 종자들도 변이종에서 생겨난 거죠. 콩도 그래서 수십 가지 생긴 것이고 원예종이나 다른 것도 그렇게 생겨났어요. 종자마다 성질이 다르고 맛과 성분도 다르니, 작물 선택권이 더 넓어지는 겁니다. 벼도 심어보고 심어보고 하면서 1451종류가 된 거지 처음부터 1451개가 된 것이 아니거든요. 벼가 원래는 세계적으로 자생종이 두세 가지랍니다. 거기서 다 퍼져 나온 거죠.
씨앗보다 환경이 먼저다
씨앗보다 환경이 먼저다. 적지적작이라고, 그 땅에 맞는 작물을 심어야 해요. 전통 농사법은 환경에 따라서 작목을 정했어요. 옛날 농법은 다 자연 환경을 이용했지요. 환경을 무시하면 안 된다는 것을 옛사람들은 알았어요. 물이 나고 습한 데는 배추, 밭벼, 율무, 토란을 심고. 습기가 중간 정도인 땅에는 고추, 깨, 마늘, 감자, 무, 참외, 오이를 심고. 건조한 땅에는 콩 종류, 보리, 밀, 잡곡류, 고구마를 심어요. 콩은 건조한 데 심어야지 습한 데는 잘 안 돼요. 고구마도 물기 많은 데 심으면 크기만 커요. 건조한 땅에 심어야 맛있어요.
습기 있는 땅만 있는디 콩을 심을라믄 어떻게 해야 하냐. 두둑을 높게 만들어서 심으면 논에도 콩을 심을 수 있어요. 습기 좋아하는 것들은 고랑 깊숙한 곳에 심어야 하고요. 밭벼 같은 작물은 고랑 깊숙이 습한 곳에 심어야 잘 자라요. 그런 재배 방법이 필요해요. 헌데 지금은 땅이 옛날 땅이 아니어서 토종도 옛날 그 맛이 안 나죠. 강하고 단단하고 야물고 작게 키우면 벌레도 덜 먹어요. 작물이 물성이 부드럽고 약하면 병에도 약하죠. 약을 많이 쳐서 천적이 없어져서 병해충도 많고요. 일반 농민들은 할라고만 하면 자연환경을 이용한 농사를 잘 지어요. 돈이 안 된께 안 짓지. 근데 귀농한 사람들은 잘 모르더라고. 그런께 내가 씨앗 주면서 먹는 방법, 재배 방법까지 가르쳐 줄랑께 겁나게 복잡해요.
명밭무라고 우리 지방에서 유명한 조선무가 있어요. 옛날에는 여름에 명밭(무명밭, 목화밭) 풀을 많이 맸어요. 그런께 무명밭에 조선무를 심어서 목화 그늘 밑에서 무를 키웠어요. 무가 그늘에서 잘 자란께 목화 그늘에서 키운 거죠. 무는 원래 가을에 심는데 여름에 심어서 먹은 거여요. 할머니들의 지혜죠. 무명밭 맬 때 들에서 먹을 찬거리 없을 때 된장이나 젓갈에 열무 잎싹 뜯어서 먹었어요. 새콤하고 맛있어요. 옛날 무는 새콤한 맛이 나요. 무나 배추나 옛날 것은 단단하고 강하죠. 놔두고 오래 먹을라믄 저장성이 있어야 하니까. 그래서 조선무로 깍두기 담그면 잘 안 익어요. 냉장고에 넣으면 봄 되어도 그대로 있어요. 옛날 환경에 맞는 종자라 그냥 장독에 둬야 해요. 요즘 신종자는 교배를 많이 해서 연하게 만든 것이라 잘 물러진께 냉장고에 저장해야 하죠. 안 익고 그대로 있응께 먹을 수 없다고 이건 아니라고 사람들이 버려부러요. 환경을 안 만들어 주고 종자만 탓하면 안 되죠.
종자를 받을 때는
종자를 받을 때는 좋은 개체만 골라 받아요. 색이나 모양, 크기, 맛이 작물 원종에 가까운 형태와 성질을 가진 개체를 받지요. 연구를 하려면 변종을 다시 심어볼 필요가 있고요. 구근으로 심는 작물(마늘, 파, 생강, 감자, 고구마)은 변이가 잘 안 생겨요. 콩이나 기장, 조, 수수 같은 잡곡류, 벼는 변이가 조금 생기고요(1퍼센트정도). 배추, 무, 고추, 호박, 참외, 옥수수들은변이가 심하죠(30퍼센트).
씨앗을 받으면 잘 말리는 것이 중요해요. 바람 선선하고 통풍 잘 되고 그늘진 곳에서 말려야 벌레가 안 먹어요. 뜨거운 뙤약볕에서 말리지 말고요. 잘 말리고 보관하면 수명이 길어져요. 씨앗은 살아 있는 생명체라 숨을 쉬고 있어요. 잠을 자고 있을 뿐인데 습기가 있거나 햇빛이 강하거나 온도가 높거나 주위가 변하면 깨어나죠. 깨어나면 숨을 많이 쉬어요. 숨을 많이 쉬면 수명이 짧아져요. 어둡고 선선한 데서 잠을 충분히 잘 자야 수명이 길어지죠. 잠을 넉넉히 잘 자려면 우리가 인위적으로라도 조건을 맞춰줘야 해요. 열매 과일은 2~3일쯤 후숙이 필요해요. 사람이 볼 때는 익었지만 참외로 봤을 때는 과육에서 씨앗에게 아직 전달되지 않았으니 그 시간을 주는 거죠. 따 놓았다가 2~3일 지난 다음에 씨앗을 받아요. 과일 종류, 고추, 토마토, 참외, 오이 들이 후숙이 필요해요. 잡곡류는 천천히 말려서 자연 건조한 뒤에 탈곡하고요.
해년마다 심는 씨앗은 습기가 차지 않게 밀폐된 그릇에 담아 어둡고 서늘한 곳에 보관해요.
해년마다 심는 것이 가장 좋죠. 어쩔 수 없이 2~3년 뒤에 심을 때는 냉장 보관 하고요. 냉장 보관한 종자는 하루 이틀 전에 꺼내 놓았다가 심어요. 찬 데 있다가 땅으로 바로 나가면 스트레스를 받아서 싹이 안 나요. 귀농인들이 전화를 해요. 싹이 안 난다고. 갑자기 심으면 그래요. 천천히 온도 변화를 줘야 스트레스를 안 받죠. 답은 간단해요. 씨앗을 살아있는 생명체로 보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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