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만에 이뤄진 정권교체 이후 수개월, 숨 가쁜 변화의 바람이 불어온다. 누군가에겐 반가운 지각변동이요 상전벽해일 것이고, 누군가에겐 그럭저럭 환영할 만하나 아직도 갈 길이 먼 고육지책의 연속일 테다. 혹자들은 이미 나라에 망조가 들었다고 개탄하기도 한다. 천성이 회색으로 변해버린 나는 미봉책의 향연이 크게 아쉽지만, 그래도 새 정부의 결연한 움직임 덕분에 재도약을 향한 숨통이 트였음을 높이 사며 지지적 비판을 보낸다.
중산층을 대하는 절망적인 고정관념
산적한 과제들 가운데, 이 글에선 중산층의 복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우리는 흔히 IMF 사태를 계기로 붕괴된 중산층을 거론하며 금전적 측면에서 어떻게 하면 중산층을 다시 두껍게 할지를 논점으로 삼는다. 이에 동의하는 바이지만, 바로 세워야 할 중산층의 면모는 단지 소득 증가에만 있지 않다. 오히려 사회의 허리이자 여론 주도층으로서 중산층의 역할은 무엇인지 환기하는 작업이 더욱 중요하다. 그 성찰이 무르익을 때,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비로소 중산층이 두터운 사회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격론을 불러왔던 최저임금 인상 결정부터 얘기해보자. 최저임금의 인상 폭과 속도에 관한 논쟁의 밑바탕에는 한국 중산층에 대한 '매우 절망적인' 일반의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요컨대, 준수한 최저임금의 성공과 지속 여부의 필수 요건 중에는 중산층의 사회적 연대 의지를 빼놓을 수 없다. 저임금 노동자의 소득 상승에 따른 물가 인상을 중산층 다수가 기꺼이 분담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최저임금 찬반 논쟁의 소용돌이에서 물가 인상을 수용하려는 연대적 시민은 온데간데없이 종적을 감췄다.(오피니언 리더 중에는 <시사인> 이종태 기자, 전병유 한신대 교수 등 극소수만이 최저임금과 소비자 물가, 사회적 연대를 연관 지으며 더불어 살고자 하는 시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국 중산층을 몰 연대적 군상으로 깔고 들어가는 논리 전개는 오래된 관행이다. 예를 들어, 경비원의 급여가 올라가면 (한 푼도 아까운 주민들은 이를 못마땅히 여겨) 아예 해고시켜 버리니, 저임금 경비원의 처우 개선은 일자리를 없애는 바보 같은 짓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이기적 중산층 상'을 묵시적 전제로 최저임금과 관련된 논쟁이 있었고, 정권교체 이후 OECD 최고 수준의 최저임금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까지도 이렇다 할 변화는 없다.
중산층의 '나만 아니면 돼' 세태가 구제불능이라고 가정하며,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하는 목소리에는 종종 순진한(?) 이중성도 숨어 있다. 이를테면 정부는 소수 부유층의 세금만 올릴 게 아니라, 이하 나머지의 증세도 단행하라는 것이다.
잠깐 통계를 보면, GDP 대비 기준 한국의 소득세는 32개국 중 30위, 소득세와 직원 부담 사회보험료를 같이 보면 31개국 중 29위, 소비세(간접세)는 34개국 중 30위, 상기 세 가지의 세목을 총합해서 보면 31개국 중 31위에 자리한다(OECD 2015, Revenue Statistics). 이렇게 한국 국민이 내는 세금의 양은 OECD 저 밑바닥에 있고, 여기에는 평균 언저리 이상 소득층의 세금이 매우 적다는 요인이 상당하기에 보편증세 주장은 타당하다.
그런데 평소 중산층을, 아니 아예 인간을,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경제학적 동물'로 격하시키는 데 열을 올리고, 또 최저임금 대폭 인상의 안착을 위해 중산층의 연대와 협조를 북돋을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여권을 향해 중산층의 협조가 긴요한 보편증세를 밀어붙이라고 주문하는 행태는 쉬 이해하기 어렵다. 누군가의 농담 섞인 지적처럼 비(非) 부유층의 증세가 진행 될라치면 일거에 정권을 함몰시킬 요량으로, 정부여당에 보편증세에 나서라는 덫을 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생길 정도다.
최저임금 반대자 중 이런 교활함을 품고 있는 이는 실제로는 없거나, 있어도 한 줌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최저임금 인상 반대의 여론에는 순진한 악의와 순수한 선의가 뒤섞여 있다. 최저임금에 어떠한 입장을 가지고 있든, 앞으로는 중산층의 연대심을 고양시키는 데 가일층 애써 주기를 기대한다. 그래야 건강한 중산층이 두껍게 형성될 수 있고, 그에 힘입어 보편증세와 복지 강화 그리고 최저임금의 정상화가 원활해질 뿐 아니라, 격차는 줄어들고 일자리는 늘어나며, 최저임금 찬반 양측이 한목소리로 걱정하는 영세 소상공인과 저임금 노동자들의 여건도 성공적으로 개선될 수 있다.
정부여당의 일신도 당부하고 싶다. 중산층이 사회적 연대와 멀어진 위중한 현실은 여권의 미욱함에도 매우 크게 기인한다. 단적인 예로, 과거 박근혜 정권이 공제방식 변경을 통해 평균 이상 소득층의 소득세를 극미하게 늘리려 하자,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은 '세금폭탄'론을 들고나오며 거리투쟁에 나선 바 있다. 정권교체 이후 문재인 대통령은 증세의 대상은 임기 내내 오직 소수 부유층에 한정될 것이라고 못 박았다. 행여 다수 국민의 증세를 공론화했다가 여론 악화와 선거 패배의 부메랑이 돌아올 것을 우려하는 심정은 참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여권의 증세 정치는 각자도생 사회구조에 짓눌린 국민의 고난을 가차 없이 무시하는 행태이자,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들의 실효성을 심히 저하시키는 자책골에 다름 아니다.
대통령 이하 정부여당은 그들이 미처 국민의 굳건한 신뢰를 얻지 못해 '증세와 연대의 시대'를 국민 여러분께 호소할 수 없음에 깊은 송구함과 경각심이 있어야 한다. 차마 공개적으로는 반성할 용기를 내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속마음에는 부끄러움을 가져야 한다. 치열한 성찰로 거듭난 정부여당이, 진솔하게 국민의 세금 인상을 요청하며, 당당하게 국민의 지지를 획득하는 다수 집권여당으로 성장하기를 기원한다.
중산층의 이타성을 끌어내는 방법론, 상향 평준화
제1야당과 중산층의 역학 관계로 시선을 돌려보면, 전통적으로 보수진영은 특히 '조직된 정규직 중산층'과 대척점에 서 왔다. (더 정확히는,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시민(조직)이라면 틈나는 대로 체계적인 탄압을 가해왔고, 여론조작 용도의 대중집단을 기르고자 추악한 불법도 서슴지 않아 왔다.) 보수 적통을 자임하는 제1야당은 강성귀족노조, 철밥통 공무원 및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방만한 공기업 및 공공부문과 같은 표현법을 즐겨 사용하며, 이들 중산층을 콕 집어 특권계층이자 나라 망치는 원흉이요, 적폐라고 몰아세운다.
<시사인> 천관율 기자는 박근혜 정권이 '도발형 통치술'과 '반대파 동원의 전략'을 구사했다고 분석한 적이 있다. 풀이하면, 박근혜 정권은 △ 전투력과 결집력은 높지만 단독으로는 다수파가 될 수 없는 좁은 지지 기반의 집단을 표적으로 삼아, △ 이들을 자극해 강성대응을 유발했으며, △ 이를 빌미로 외부의 중산층이나 온건파가 그들에 동조하지 않거나 반대하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갈라치기 통치기법은 스스로 허약한 정부임을 드러내는 방증이었다는 것이 천 기자의 해석이다. 기실 자유한국당의 전신을 이루는 정치세력들은 특정 집단을 고립시켜 찍어 누르는 방식으로 그들의 취약한 정통성을 가려왔다는 이력이 있다.
물론, 상기에서 언급된 중산층 집단의 내부와 그 주변 구조에 심각한 하자들이 누적돼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스스로의 문제 극복 노력이 미약한 건 그렇다 쳐도, 터무니없는 언행들로 비난을 자초하는 일마저 빈번했다. 그뿐만 아니라 현 집권여당이 소수 상류층과 나머지 격차 못지않게 위태로운,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격차를 완화하는 데 있어 근본 대책이 미비한 것 역시 호된 비판을 받아야 할 지점이다. 그러나 동시에 자유한국당 방식의 특정 중산층 때리기는 한국의 지향점이 될 수 없다는 점에도 유의해야 한다.
자유한국당은 그 전신 새누리당 시절부터 일부 정규직 중산층의 양보 혹은 보상 축소를 주장해왔다. 일례로 과거 새누리당의 정원식 원내대표는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중향 평준화'를 노동시장 격차 해소의 해법으로 제기한 바 있다. 고임금 정규직의 급여를 깎아 저임금 노동자에게 이전함으로써 현재 임금 분포의 중간 수준에서 평준화를 시켜야 한다는 의미이다. 중향 평준화 논리는 진보노동진영에서 고수해온, 기업 압박을 통한 고임금 정규직 수준으로의 상향 평준화에 비해 진일보한 발상이다. 그러나 중향 평준화는 좁은 시야와 인간에 대한 존중이 부실한 가치관, 그리고 통계적 무지가 어우러져 빚어지는 촌극과도 같다.
맨 위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가장 성공적으로 격차를 줄이고, 고르게 높은 삶의 질을 성취한 나라들은 상향 평준화의 보상체계와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다. 한국보다 앞선 고소득 국가들의 노동자 대부분은, 노동시간을 고려하지 않고 급여의 단순 총액 기준에서 볼 때, 놀랍게도(?) 한국의 상층 노동자들보다 그 액수가 한참 적다. 하지만 기업의 공공복지기여(사회보험료)와 같은 급여 외 복리후생비를 급여에 더하고 '시간당 기준'에서 본다면, 기업이 직원들을 위해 쓰는 돈이 동급 최고 수준이다. 이 노동에 대한 시간당 보상의 상향 평준화는 저녁이 있는 삶을 보편화하는 금전적, 시간적 토대이기도 하다. 이에 병행하여 폭넓은 소득계층으로부터 충분히 걷힌 세금을 기반으로 복지를 발전시키고 맞벌이를 용이하게 함으로써, 가구 단위의 소득을, 한국 상층 노동자들 수준으로, 골고루 증대시키는 것이 현존하는 최상급의 복지선진국들이다.
이 같은 '삶의 질 선진국형 상향 평준화'는 고수익 부문 노동자들의 노동시간 축소와 임금 양보를 기반으로 구현되고 있고, 한국의 진보노동진영이 강변하듯 노동자 간 양보와 연대를 배제한 채, 단지 기업이나 정부의 책임 아래 저임금 노동자들의 처우를 끌어올려야 한다는 허황된 상향 평준화와는 그 본질이 전혀 다르다.
진보노동 진영의 지리멸렬과 민주화 진영의 (중산층을 건드리지 않는) 보신 정치는 자유한국당을 위시한 보수파로 하여금 특정 상층 노동자 집단의 허물을 비판하며, 이들의 수입 축소 및 중향 평준화를 주장토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들의 격차 축소 방안에는 '일부 상층 노동자'의 수입이 줄어들 때 그 반대급부로 이들이 어떠한 이득을 얻을 수 있으며, '기업과 나머지 국민'은 복지 발전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무런 계획도 가치관도 담겨 있지 않다.
예컨대, 상층 노동자의 시장 소득을 줄이는 데 성공한 나라들은 시간당 보상의 증대, 가구 단위의 소득 증대, 복지 발전, 여성의 경제활동과 자아실현 증진, 저녁이 있는 삶의 보편화, 여유와 존중이 있는 일터의 확립 등 고임금 중산층 노동자가 눈앞의 수입 타격을 감수할 만한 반대급부가 전방위로 존재했기에 오늘날에 이를 수 있었다. 이것은 한국 보수진영이 특정 중산층 노동자를 대상으로 "당신들의 이기적 행태 때문에 피해가 막심하니 일방적으로 수입을 줄여야 하고, 그 대가로 딱히 받을 것도 없다"며 무작정 윽박지르는 것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내용이다.
결국, 진보노동진영이 막무가내 상향 평준화를 부르짖으며 중산층의 역할을 방기해 왔다면, 이들을 비판하는 자유한국당 등 보수진영은 막무가내 중향 평준화를 내세우며 특정 중산층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기는 데 열중해왔고, 민주당으로 대표되는 민주화 진영은 정권 창출이라는 명분 아래 다수 중산층과의 대립과 대화를 회피하며 한국의 비상을 위한 도전을 주저해왔다. 이 과정에서 소수 부유층은 각자도생 사회구조의 최대 수혜자로, 중산층은 수혜자이자 피해자로, 저소득층은 막막한 피해자로 분절되며 헬조선 식 신분사회가 이룩되었다.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한국의 격차와 그에 따른 신분질서가 봉건사회를 방불케 할 만큼 악화되고 또 공고화되었다는 탄식이 물밑에 쌓여가고 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핵심 방안은 세금과 복지라는 이름의 사회적 연대이고, 이 연대가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폭넓은 소득계층의 세금 기여가 꼭 있어야 하며, 그 중심에는 사회의 중추를 담당하고 여론을 주도하는 중산층의 역할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우리가 중산층을 다시금 두껍게 할 수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의 중산층이 사회의 주류로서 등장할 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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