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대북 방송병'의 군생활, 예전엔 이랬습니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대북 방송병'의 군생활, 예전엔 이랬습니다

[기자수첩] 재개된 대북방송…'조준격파' 공언한 北…그리고 방송병

기자는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전선 △△사단 관할 전방 지역에서 대북(對北) 방송병으로 근무했다. 대충 계산을 해 보니 전체 복무기간 중 16개월 정도를 GP, GOP에서만 지냈던 것 같다.

GP나 GOP에서 함께 근무하는 수색대 병사들에게 방송병은 언제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각종 훈련에서 자유로운 편이었고, 관측장교의 통제를 받긴 했지만 일단 전방에 투입되면 방송병 두 명만 독립적인 공간(방송실)에서 생활했기 때문이다. "사수만 잡으면 군생활 끝"이라는 말은 방송병들 사이의 공공연한 비밀이기도 했다. 주로 실내에서만 지내기 때문에, 전투화를 신을 일도 별로 없다. 이등병 시절 한 고참 방송병이 모처럼의 휴가 끝에 무좀을 얻어 온,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동시에 방송병들은 일종의 '국외자'이기도 했다. 사단 예하에 편재돼 있지만 국방부 심리전단 소속이었기 때문에 전방에서 근무하는 심리전 소대원, 방송병들은 언제나 눈칫밥 신세이기 일쑤였다. 방송병과 같은 분대를 구성하는 주간관측병(FO)들과, 최근 유명해진 야간관측병(TOD)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통상 주야간 2교대, 혹은 3교대 근무를 섰다. 걸핏하면 밤낮을 바꿔 사는 일상이었다.

▲ 대북방송에 사용되는 우리 군의 확성기. GP나 GOP에 설치되는 스피커 세트는 사진에서 보이는 확성기 수십 대를 연결한 것이다. ⓒ연합뉴스
'방송병'은 아나운서?

방송병이라고 하면 마이크를 잡고 북한 지역의 병사나 주민들을 향해 뭔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라고들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우발적인 교전이 벌어졌거나, 귀순자가 나타나는 등 긴급한 상황에만 해당된다. (무수히 많은 다른 방송병들처럼) 개인적으로는 그런 일을 겪어보지 못했다.

방송병의 주된 역할은 서울 용산 국방부에서 위성과 FM 신호를 통해 송출하는 라디오 방송을 대형 스피커를 통해 틀어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거대한 오디오를 관리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시간이 되면 전원을 켜고, 방송이 끝나면 내렸다.

그 외의 시간은 대체로 자유로운 편이었다. 방송 3사의 드라마들을 모두 섭렵해도, 닥치는 대로 책을 읽어도, 막사 주변을 하염없이 뛰어도 시간은 언제나 무참할 정도로 남아 돌았다. 누군가는 방송병 시절 사법고시를 준비해 제대하고 1년 만에 합격했다는 전설도 전해 내려왔다.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되는 작업에 자원해 나가는 방송병들도 많았다. 그만큼 무료했기 때문이었다. 또 한솥밥을 먹으면서도 데면데면할 수밖에 없는 수색대 병사들과 친해질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확성기'라고 불리는 방송장비는 크게 엠프와 스피커로 나뉜다. 엠프는 방송실에, 스피커는 GP 철책에서 대략 150~200m 정도 떨어진 곳에 설치된다. 실내에 설치된 엠프들을 모두 합치면, 학교에서 사용하는 칠판만한 크기다. 전원을 올리면 일제히 내부의 냉각팬이 돌아가, 방송실은 언제나 찜통이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방송실은 GP 내부에서 유일하게 에어컨이 설치된 공간이기도 했다. 물론 병사들을 위한 게 아니라, 장비의 과열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어쨌거나, 빨래는 항상 잘 말랐다.

스피커의 규모는 엠프 크기의 다섯 배 쯤 됐다. 장비의 제원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전방 15~20㎞ 지역까지 들리는 수준이라고 했다. 점검과 수리를 위해 별다른 안전장비 없이 스피커를 기어오르는 일도 방송병의 역할 중 하나였다. 물론 아주 기본적인 수리만 가능했고, 제대로 고장이 나면 전문 기술이 있는 군무원이 직접 GP까지 들어오거나, 장비를 일부 철수시켜야 했다.

'대북 심리전' vs '대남 심리전'

사실 한반도에서 '심리전'의 역사는 남북이 서로 상대방을 향해 '삐라'를 날려 보내던 6.25 전쟁 발발 이전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본격적인 대북, 대남방송이 시작된 것은 60년대 초반의 일이라고 한다. 양 측의 심리전 방송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이후 잠시 중단됐다가, 1980년 북한의 방송재개에 우리 정부가 대응하면서 다시 전면적으로 이뤄졌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 시절인 지난 2004년 6월 남북의 합의에 따라 전면 중단을 선언하고 장비를 철거한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난 김대중 정부 시절의 6.15 남북공동선언, 노무현 정부에서 이뤄진 10.4 정상선언 대신 이명박 대통령이 남북기본합의서(1991년)와 함께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기고 있는 7.4 남북공동성명이 일시적이긴 하나 양 측의 '방송중단'의 계기로 작용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남, 대북방송을 통한 남북 간의 신경전은 대단했다고 한다. 하지만 북한의 전력 사정이 급격히 악화되자 모든 것이 변했다. 낡을 대로 낡은 북쪽의 스피커는 노인의 마른기침과 비슷한 소리를 토해내곤 했다.

온 신경을 집중해야 '위대한 지도자'가 어쩌고 하는 내용을 일부라도 분간해 낼 수 있었다. 그마나 방송을 아예 하지 않는 날이 많았다. 하루 10시간 이상 방송을 내보내는 우리 쪽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북한이 우리 군의 대북방송에 대해 알레르기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대북방송을 상쇄시키기 위한 대남방송을 전개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당시 국방부에서 송출한 대북방송의 내용은 뜻밖에도 대체로 평이한 것들이었다. '이념 대결'의 흔적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상대방에 대한 비난대신 '잘 나가는 대한민국'에 대한 홍보가 주를 이뤘다. 방송 프로그램들은 국내외 주요 뉴스와 대중가요, 조금은 유치한 가족 드라마 같은 것들로 이뤄져 있었다. 월드컵 등 주요 스포츠 이벤트는 그대로 생중계되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근무를 서느라 TV를 볼 수 없는 우리 측 병사들은 아이들처럼 좋아하곤 했다.

정기적인 'GP의 날' 행사 때에는 푸짐한 삼겹살과 휴대용 가스렌지, 불판 등이 보급된다. 이 역시 '대북 심리전'의 일환이었다. '삼겹살 파티'는 옥상에서 벌이게 돼 있었다. 북한 측에서도 우리 쪽을 관측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잘 구워진 고기 한 점을 구겨 넣으면서도, '화전(火田)'을 일구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북한군 병사들에게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때때로 '노래방 심리전'도 함께 진행됐다. 노래방 기기 역시 방송장비 중 하나로, 대형 스피커에 연결된다. 여군 하사가 한복을 입고, 병사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기도 한다. "우리는 이만큼 잘 먹고, 잘 놀고, 잘 살고 있다"는 일종의 시위같은 것이다. 심리전 부대에서 잔뼈가 굵은 한 부사관은 "옛날 북한 측 GP에서는 여군들이 나체로 수영을 하기도 했다"는, 조금은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해줬다.

재개된 대북방송…'조준격파' 공언한 北…그리고 방송병

군복무를 마치자 곧 남북 당국이 심리전 방송을 중단하고 장비를 철수하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험준한 산 속에서 연장을 들고 집채만한 방송장비와 씨름해야 할 후임병들이 조금은 걱정되기도 했지만, 곧 잊었다. 무엇보다 당시 기자는 세상 부러울 게 없다는 예비역 병장이 아니었던가.

한때 방송병이었던 '예비역 병장'은 기자가 됐고, 정권이 바뀌었고, 천안함이 침몰했다. 수십년 만에 남북은 다시 아찔한 대결국면으로 달려가고 있다. 대북방송을 재개하겠다는 정부의 발표에 북한은 "확성기를 조준격파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철거했던 장비를 다시 설치해야 하기에 전면적인 대북방송 재개까지는 시일이 다소 걸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부의 대북 심리전, '자유의 소리(VOF : Voice of Freedom)' 방송은 이미 시작됐다. 천안함 사태와 관련한 이명박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가 있었던 지난 24일부터다.

국방부는 FM 라디오를 통해 '신세대 해피타임', '글로벌 코리아', '연속 입체낭독, 아! 대한민국' 등의 프로그램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이 대통령의 '천안함 담화'도 전해졌다고 한다. 해외파견 인턴제 등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시행되고 있는 정부의 각종 사업과 UAE 원전수주·G20 금융정상회의 유치 등의 외교적 성과,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적극적인 개혁·개방에 나선 베트남의 사례 등도 소개되고 있다. 익숙한 레퍼토리들이다.

기자에게 방송병으로서의 군생활은 무척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최전방'이라는 긴장감은 신기할 만큼 없었다. 대한민국 육군의 '1% 보직'이 아니냐는 부러움 섞인 시선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한국의 '보통 남성들'이 겪어야 하는, 딱 그 만큼의 의무와 책임이 부여된 그저 군생활일 뿐이었다.

그런데 곧 '휴전선 155마일' 전역에 대북방송이 울려퍼지면, 전방의 방송병들은 자신을 향한 북한의 '조준격파 공격'이 언제, 어디서 날아들지 모른다는 '구체적 공포' 앞에 내던져질 것만 같다. GP나 GOP에서 근무하는 다른 병사들의 처지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20대 초반의 그 청춘들이 안쓰럽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가.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