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서방은 이란인들에게 한 번도 정직하지 않았다"
☞2편 "보수파의 반격과 서방 헛발질이 아마디네자드 낳았다" <편집자>
2005년부터 대통령이었던 아마디네자드는 나라를 망쳐 놨다. 지식인들의 입장에서 그는 참을 수 없는 인물이었는데 대학 교수, 대학생, 예술을 하는 사람에서부터 정치학을 전공하는 사람까지 많은 지식인들과 유명 인사들은 대부분 그를 반대했다.
이란의 보수주의자들은 오랫동안 똘똘 뭉쳐 있었다. 그러나 아마디네자드는 그들조차 갈라놓았고, 다수의 보수파들은 그를 견딜 수 없어 했다. 그는 임기 내내 법률 위반 문제로 의회와 싸웠다. 그의 각료들은 정부 재정 지출에 관한 거짓 보고서를 발표했다. 의회는 정부 예산이 어디로 갔냐고 추궁했으나 그는 엉뚱한 답변만 했다.
인터뷰나 강연을 할 때 아마디네자드는 뭔가 엄청난 논리가 있는 것처럼 말하곤 했지만 실은 무슨 말인지도 모를 얘기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지도자 하메네이는 의회나 사법부, 일반 국민들의 생각과는 달리 그를 밀어 줬다. 그러다 보니 아마디네자드에게 도전하는 사람은 없었고 대통령직은 위협받지 않았다.
아마디네자드는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 가난하고 못 버는 사람들, 시골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일삼으면서 지지를 얻어 왔다. 그들에게 아마디네자드가 인기 있는 것은 그가 모든 지방을 최소 2차례씩 돌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자신들의 마을에 방문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사랑했던 것이다!
도시 지역에 사는 사람들, 대학 교수와 대학생들 중에서도 그를 지지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아마디네자드가 지신들의 이권을 챙겨주기 때문에 그를 지지한다. 공직자들과 노동자들의 임금, 은퇴자들의 수당을 올려 주는 게 이권을 챙겨주는 방법 중 하나다.
어떤 사람들은 서방에 대한 아마디네자드의 거침없는 발언 때문에 그를 지지한다. 또 많은 사람들은 그가 전직 대통령이자 이란에서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라프산자니를 '도둑놈'이라고 공격하는 것 때문에 그를 좋아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마디네자드의 그 잔인함과 광기 때문에 이란의 신정체제가 오히려 더 빨리 무너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란 국민들의 압도적인 다수는 신정체제의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아마디네자드는 자신의 정책이 마치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것처럼 가장하면서 국민들을 기만하는데 능숙했다. 그 과정에서 국영 언론과 그를 지지하는 기타 기관들은 그를 엄청나게 도왔다.
핵 프로그램 문제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란 국민들은 핵에너지 생산을 원한다. 아마디네자드는 국민들의 그런 여론을 이용해 마치 자기가 핵개발의 영웅인 양 포장했다. 그러나 이란의 핵 프로그램은 그가 대통령이 되기 10년 전부터 추진됐고 엄청난 진전을 이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론의 힘을 빌려 자신이 그 모든 진전을 이룩한 것인 양 선전했다.
▲ UN본부가 있는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프루에서 이란 시위대가 이란 대선 결과에 항의하는 뜻으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사진이 담긴 피켓을 들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
경제는 쑥대밭이 됐다. 테헤란 증시는 핵 활동에 대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 결의 채택 이후 폭락했다. 유가는 재임 4년 간 엄청나게 상승해 정부 재정이 늘었지만 수십억 달러의 손실을 봤다는 것이 의회에 의해 드러났다. 재임 초기 경제 기획 기능을 가진 조직을 해체했고 모든 것을 수입에 의존했는데, 결국 곡물시장도 수입 농산물로 넘쳐나게 됐다.
정치와 관련해서는, 아마디네자드의 억압적 통치로 인해 보수세력 내 지지자들조차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또한 그는 대통령의 발언이 어떤 파장을 몰고 오는지 모르는 것처럼 행동했다. 쇼킹한 말을 해놓고 번복하기 일쑤였고, 자기 말대로 행동하지 않은 일도 부지기수였다.
대외관계 측면에서 그는 개인적인 명성을 얻기 위해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불리한 조약을 일부 국가들과 맺음으로서 국익을 저버리는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다른 나라에 대한 대통령의 부주의한 언사 때문에 이란 여권을 가진 사람들은 신뢰를 잃었고, 기업이나 학술 등 많은 분야에서 다른 나라와의 관계가 끊어졌다.
그처럼 아마디네자드는 투우장의 소 같이 아무도 못 말리는 인간이었고 필자는 혈압이 올라갈까봐 지난 3년간 그를 머릿속에서 아예 지워버리고 있었다.
아마디네자드는 세 후보의 협공을 과연 이겨 낸 것일까?
그러나 대통령 선거가 돌아왔다. 사람들은 더 이상 희망 없이 살 수 없었다. 또한 대선 후보 중에서 동경할만한 인물이 있었기 때문에 그 주위로 지지세가 모아졌다.
아마디네자드를 제외하고 3명의 후보가 있었다. 모두 아마디네자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그들 중에는 아마디네자드와 같은 보수파도 있었고, 나머지 둘은 소위 개혁파였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개혁은 서구 언론이 말하는 그런 개혁이 아니라 단지 아마디네자드 등장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나라를 얼마나 들쑤셔 놓았으면, 그가 등장하기 전 상태로 돌리는 게 개혁이 되었을까!
개혁파 후보로는 메흐디 카루비 전 국회의장, 미르 호세인 무사비 전 총리가 있었고 보수파 후보는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혁명수비대장이었던 모흐센 레자에이였다. 대선에 나온 모든 후보들이 한 후보를 집중 공격하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 아마디네자드는 (개혁파의 수장격인) 라프산자니 전 대통령의 부패 혐의를 들추는 뻔한 수법을 또 동원했다. 무사비와 카루비에 대해서도 부패한 인물들이라고 공격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또 다시 그의 말을 믿는 듯 보였고, 그는 더 격렬하고 무례하게 공격했다. 그러한 태도로 인해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나머지 세 후보 지지자들간의 균열은 더욱 커졌다.
세 후보가 아마디네자드를 협공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마디네자드를 찍지 않을 거라고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선거 결과 그가 60% 이상을 득표한 걸로 나타나자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선거 다음날이었던 6월 13일 테헤란 거리는 분노한 시민들로 가득 찼다.
폭력시위는 누가?
그때부터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나는 누가 유리창을 깨고 버스에 불을 지르고 파괴행위를 시작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한 행동들은 명백히 불법적인 것이었고, 바시즈 민병대와 혁명수비대가 그러한 행동들을 막고 있었다. 그들은 지난 10년간 일종의 비토권을 가진 집단이었고 어떤 행동을 하는데 있어 어느 누구로부터도 승인을 얻을 필요가 없었다.
개혁파 후보들은 거리의 시민들에게 지지를 표했다. 첫 시위는 소수가 시작했지만 점차 그 숫자는 300만 명 이상으로 늘었다. 시위에 대한 정부의 몇 가지 조치들은 오히려 사람들을 자극하고 또 시위에 참여하도록 만들었다.
정부는 분노한 시민들을 '폭도' 혹은 '파괴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떤 파괴행위에도 가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사비는 바시즈 민병대가 오히려 파괴행위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아마디네자드 측이 시위자들을 찍어 누를 명분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일리 있는 주장이었다. 물론 아마디네자드는 외국인이나 외국인을 돕는 자들이 파괴행위를 하고 있다고 떠들었다.
정부는 휴대전화를 통한 통신을 끊어 버렸다. 문자메시지 서비스는 선거 전날부터 중단됐다. 개혁파들의 웹사이트는 차단됐고, 일부 인사들은 체포됐다. 정부의 이러한 조치들이 있자 상황은 더 일촉즉발로 몰렸다.
선거 이틀 뒤인 14일 치러진 아마디네자드 당선 기념행사는 최악이었다. 거기서 그는 시위대를 '쓰레기들'이라고 불렀고, 민병대는 그날 밤 테헤란대학 캠퍼스에 들어가 기숙사를 파괴하고 5명의 학생들을 살해한 후 수많은 이들을 체포했다.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그러자 분노가 폭발했다. 무사비는 15일에 시위를 벌이자고 말했고, 테헤란에서만 300만 명 이상이 모였다. 바시즈와 혁명수비대는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는데, 그날 한 군부대를 장악하기 위한 공방에서 7명의 시위대가 사망했다. 더 많이 죽었다는 소식도 물론 있었다.
▲ 지난 달 19일 테헤란대에서 열린 금요기도회에서 기도 중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맨 왼쪽) ⓒ로이터=뉴시스 |
극단주의자들과 서방 언론은 정녕 누구의 편인가
내가 보기에 서방 정부들은 이란 국민들의 개혁운동이 성공하는 것을 원치 않는 것 같다. 이란 사람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것을 늘 방해하고 간섭하는 걸 보면 말이다.
나도 300만 시위대의 한 사람이었는데 우리는 너무나 평화로운 시위를 했고, 그런 기조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우리 스스로 결의했다. 그러나 수많은 인파 속에 파괴자 몇 명을 침투시켜 평화 시위 기조를 무너뜨리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한편에서 <CNN>, <BBC>, <폭스뉴스>를 비롯한 서방의 많은 언론들은 이란인들의 시위에 재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란에는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보다 더 중요한 문제들이 있다. 이란 사람들이 외세의 간섭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 그 중 하나다.
국민들의 그런 심리를 알고 있는 정부는 대선 이후 벌어진 시위는 외세의 의도에 말리는 것일 뿐이라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논리를 국영 매체를 통해 내보냈고 한편에서는 시위대를 강력하게 탄압함으로써 정부는 소기의 목적을 성공적으로 이뤘다.
19일 금요기도회에서 최고지도자 하메네이는 무사비를 비난하는 취지의 발언을 했고, 자신의 오랜 동반자였던 라프산자니보다 아마디네자드의 손을 들어주는 말을 했다.
하메네이는 최고의 권력자로 국민들은 그를 직접적으로 비난하지 못한다. 그에 따라 그날 하메네이의 발언은 무사비 지지자들을 분열시켰다.
무사비와 지지자 대부분은 신정체제의 변화를 원한 게 아니라 단지 아마디네자드의 제거만을 원했다. 그러나 개혁파들은 어떤 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개혁이란 이름으로 싹트고 있다. 그러다 보니 신정체제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도 가끔씩 분출했고, 이번 시위 와중에도 그런 목소리가 불거져 나오면서 무사비의 입지를 불리하게 했다.
최고지도자의 그 같은 발언이 있은 뒤 바시즈 민병대들은 불법행위를 동원해 시위를 진압해 나갔고, 군경에도 가혹한 진압작전이 허용됐다. 시위는 계속될 수 없었다. 계속해서 거리로 나오려는 사람들은 소수였고 20일 이후 거리는 군경으로 꽉 찼다.
무사비는 집회를 허가해달라고 신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나 아마디네자드 지지자들의 집회는 수없이 허용됐다. 그러한 부당한 처사에 사람들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지만 그 분노를 가슴속에 묻을 뿐 거리로 나오지는 못했다. 대학 교수 몇은 강단을 떠났고 명문대 몇 곳은 일시 휴교했다. 그리고 결국 테헤란은 고요해졌다.
이 글이 작성된 뒤인 6월 29일 이란 헌법수호위원회는 아마디네자드의 대통령 당선을 최종 확정했다. 그에 항의하는 시위는 그 뒤로도 산발적으로 일어났으나 곧 진정됐다. 그러나 7월 17일 라프산자니 전 대통령은 최고지도자 하메네이가 한 달 전 시위대에 대한 강경대응을 천명했던 바로 그 테헤란대 금요기도회에 나와 체포된 시위대를 석방하라고 촉구했다. 또한 대선 부정 의혹에 대해서도 토론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위 사태 이후 처음으로 입을 연 라프산자니가 날린 직격탄이 이란 정국을 새로운 국면으로 돌릴 수 있을지 주목된다.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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