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봄에 어쩌다 KBS <인간극장>이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나서 나에 대해 설명할 일이 종종 있었다. 몇 번하다 보니 대답이 점점 간단해져서 '귀농을 결심하기 전엔 늘 우울하다가 가끔 행복한 사람이었는데 귀농을 결심한 후엔 늘 행복하다 가끔 우울한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결혼하며 부모님과 의절하기도 하고, 이혼과 재혼, 그리고 바람찬 생활 등을 겪기도 했지만 이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누가 뭐래도 갈 길을 잘 간다는 확신이 주는 안정감 덕분이고 시작은 작은 결심이었지만 구체적인 길을 보여주고 굳게 붙들어 준 것은 '전국귀농운동본부'라 할 수 있다.
20대 중반에 '농부가 되겠다'는 마음의 씨앗을 품은 지 1년 반 정도 지났을 때 신문에서 '전국귀농운동본부가 발족한다'는 기사를 보고 창립총회로 달려갔다. 간단한 자기소개서를 작성했고 그 자리에서 실무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사소한 일은 엄청 고민하면서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는데, 큰일은 별 고민 없이 해치우는 성격 덕분에 금방 그러겠노라 했다. 처음엔 사무실도 따로 없이 시작했지만 이곳은 진정 새로운 세계였고 여기저기 다니며 만나게 된 사람들은 놀라웠다. 그분들의 기운을 나누어 받아 '뭐든지 덤벼라'하는 용감한 사람이 되었고, 뿌리 내릴 곳을 찾아 잠시 떠돌다 동네 사람들이 사람 살 곳 아니라 했던 북향 골짜기 강대골에 자리를 잡고 16년째 살고 있다.
사실 안동은 귀농하기 전엔 전국에서 제일 싫어하는 동네였다. 한 번 와본 적도 없었지만 선입관이 그랬다. 땅값 싼 골짜기를 찾다 우연히 오게 되었는데 살아 보니 그냥 편안하니 숨어 살기 좋은 곳이다. 사람들끼리 싸움도 거의 없고 남 일에 별 간섭하지 않고 자연재해도 거의 없다. 지금은 누가 안동에 대해 안 좋게 말하면 수긍하면서도 마음이 좀 저릿하다.
땅과 하늘과 물을 더럽히고 싶지 않다
나는 왜 귀농운동본부에 있으면서 만났던 많은 인연들을 찾지 않고 나 홀로 외로운 귀농을 했을까? 돌이켜보면 그냥 좀 더 외롭고 홀가분해지고 싶었고, 미지의 세계를 찾고 개척한다는 즐거움도 있었고 그만큼 자신감도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는 나라는 사람에게 공동체성이 부족해서이다. '뭐든지 덤비겠다'고 부모님도 버리고 호기롭게 세상으로 나왔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사는 것이 겁났던 것 같다. 지금도 전화로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이 어색하고 힘든 '전화 부적응자'여서 전화로 고민이나 일상사를 나누는 친구도 한 명 없다. 그래도 가까이에 언제든지 가서 마음 나눌 수 있는 집이 서너 집 생겼으니 딱 적성에 맞게 최적화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아직 주변은 좀 어지럽고 바라는 것만큼 최적화되지 못했다. 땅과 하늘과 물을 더럽히지 않고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바라지만 갈 길이 멀다. 어느 땐 정말 그것을 바라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가족들과 스스로를 닦달하기도 하고 포기하기도 하고 퇴보하기도 한다. 지금도 남편은 휴대전화로 '집회 동영상'을 열심히 보고 큰딸 봄비는 웹툰에 빠져 있다. 세상에 만화가 얼마나 많은지 그렇게 보고 또 봐도 아직 볼 것이 있다. 휴대전화가 없고 사용도 제한된 작은딸 머루만 빵 만드는 책을 보며 내용을 큰소리로 중계해 위안이 된다.
장길섭(당시 귀농운동본부부본부장) 선생은 비닐을 치자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비닐을 먹을 수 있겠으면 치라고. 그러면서 밭매는 것은 아내가 자신보다 더 잘한다는 말씀을 덧붙였다. 이 말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 감히 비닐을 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살기는 비닐하우스에서 13년 정도를 살았고 생활에서도 비닐을 비롯한 플라스틱을 못 버리고 산다.
이 모든 것은 내가 원한 만큼, 가족이 원한 만큼 이루어진 것이라는 걸 인정하고 이제 다시 길을 찾는다. 지난해 초 녹색당 당원이 되었다. 재작년에 영덕에서 있었던 핵발전소 찬반 주민투표에 갔을 때 녹색당 당원들이 전국에서 온 것을 보고 감동해서 그런 것도 있는데, 점점 다방면에서 조여 오는 SF 영화 같은 이상스런 현실에 더 이상 숨어 살기는 틀렸다는 걸 인정한 것이고 녹색당원으로서 스스로를 좀 채찍질하려는 의도도 있다.
불편하기도 좋기도 한 자급자족의 삶
의식주를 직접 해결하면 삶이 즐겁다. 아직 가스에 의존하지만 로켓스토브를 만들고 연기가 나지 않는 싸리나무를 베어서 말린다. 접이식 창문을 만들고 유리를 끼울 것인지 폴리카보네이트를 끼울 것인지 몇 달간 고민하다(유리는 무겁고, 폴리카보네이트는 냄새가 나는 비호감 물질) 과감히 겨울 풍경을 포기하고 한지를 바른다. 뜨거운 여름, 가마솥에 불 때어 토마토소스를 만들며 내년에 다시 토마토가 날 때까지 가끔 스파게티를 해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즐겁다. '새집에 내려오면서 어디에 만들까?' 고민하다 아직 새로 만들지 못한 야외 뒷간을 아궁이 굴뚝 옆에 자리를 정해 만든다. 한전에서 독립할 날을 대비해 램프도 만들기 시작하고.
내년 봄 농사를 시작하며 해결할 문제는 울타리이다. 초기엔 우리집 개 방울이 덕분에 야생동물 피해가 거의 없었는데 방울이가 몇 년 전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고부터 슬금슬금 피해가 나타났다. 이제는 동물들도 개가 매여 있는 것을 알고, 또 개들도 사냥 경험이 없어 개집이 있는 밭의 콩도 지키지 못한다. 먼 밭에 심은 고추는 고라니가 초기에 삼각으로 대만 남기고 깨끗이 다 먹었는데, 그래도 잎이 새로 나서 고추를 좀 따기는 땄다.
그래도 겨울의 든든한 식량들이 집안 곳곳에 쌓여 있고 배추전, 배추시래깃국, 김장김치, 생배추로 상을 차린다. 배추만 있어도 풍성하고 무나물은 다디달다. 남편은 밭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데 사람들만 오면 자기는 부엽토 긁기의 달인이며 우리 밭은 그 자체로 보물이라고 자랑한다. 가끔은 저러려고 그렇게 열심히 긁었나 싶기도 하다. 어쨌든 귀농운동본부에서 처음 접했던‘유기물 피복 농법’을 남편은 신명에 겨워 훌륭하게 해냈다. 긴 세월 동안 인내심 있게 벌레를 잡지도 않고 유기농 약제를 사거나 만들어 뿌리지도 않았는데 주변의 생태계가 균형을 이루었는지 늘 우리 먹을 것보다 넘치게 난다. 남는 것은 우리를 좋아하거나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나눈다.
돈에 대해서는 있으면 쓰고 없으면 쓰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돈을 쓰는 재미도 있고 쓰지 않는 재미도 있다. 돈을 쓰지 않을수록 자급률이 올라가기도 한다. 하지만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경북 유일의 예술영화 상영관인 안동중앙시네마에 가서 앉아 있고 싶고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에 후원하기를 줄이지 않고 더 늘리고 싶기도 하다. 좀 더 안정적인 자립생활을 위해 투자하고 싶은 부분도 생긴다. 돈을 어디에 쓰고 어디에 쓰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아직 늘 어렵다. 농사지어 돈 벌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다른 일로 쓰고 싶은 만큼 벌겠다 했다. 하지만 그 다른 일이란 게 또 안정적이지 않으니 쓰고 싶은 생각을 싹 버리든지 지금 가진 자원을 활용해서 돈을 벌든지 궁리를 해보는데, 아마도 미룰 수 있을 때까지 결정을 미룰 것 같다.
봄비가 대학을 가지 않고 세상을 학교 삼기로 했고, 얼마 전엔 채식을 실천해보기로 했다. 함께 녹색당 활동을 하며 세상의 변화를 꿈꾼다. 얼마 전부터 108배를 봄비와 함께한다. 몇 년 전 1년 가까이 하다 그만두었던 108배다. 그냥 하면 심심해서 108배 참회문을 틀어놓고 하는데 전에 혼자 조용히 할 때보다 더 재미있다. 참회문 중 많은 부분이 '~에 대한 자비심의 부족'을 참회하는 내용이다. 공동체성 부족은 사실 자비심 부족 때문인데 108배를 하는 동안 참회하면 좀 나아질까 기대한다.
귀농을 결심하지 않았을 때 '아버지가 인생의 목표가 뭐냐?'고 물으면, '꼭 목표가 있어야 하냐?'고 되물었다. 그런데 귀농을 결심하고 나니, 그 목표만으로도 이미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도시에서 불안하게 떠도는 삶이 싫어 시골에 자리를 잡고 사는데 뿌리를 너무 잘 내려서 그런지, 이제 다른 곳에 가기가 힘들다. 안동 시내 나가는 것도 재고 또 잰다. 좀 멀리 가는 것은 대부분 스스로 차단시키고 1년에 한두 번 정도로 제한한다. 그게 조금 불편하기도 하지만 좋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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