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이 1일 '주민소환제'에 대한 불편한 속내를 공개적으로 드러내 비판을 자초했다.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이 대통령의 인식이 다시 한 번 확인됐다는 게 공통적인 지적이다.
"소환요구에 서명한 유권자들에 대한 도발"
이 대통령은 이날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지역투자박람회'에서 전국 광역단체장 중 처음으로 주민소환 논란에 휘말린 김태환 제주지사가 불참하자 "국책사업을 진행하는 지사를 주민소환하는 것은 그렇게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에도 "정치적으로 반대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주민소환제를) 악용할 수 있기 때문에 보완하면 어떨까 한다"고 주문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연세대 김호기 교수는 <프레시안>과 통화에서 "주민소환제도는 '위임한 권력'에 대한 거의 유일한 통제의 수단"이라면서 "대의민주주의의 약점을 보완하자는 이 제도의 취지와 타당성은 이미 널리 입증됐다"고 지적했다.
인천대 이준한 교수 역시 "중앙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지방 유권자들의 선택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격이 맞지 않다"고 꼬집었다.
이 교수는 "주민소환제도는 이미 안정적으로 정착돼 있고, 대통령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정치적 남용'의 사례도 전혀 없었다"면서 "주민소환제의 존재 자체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와 유권자들의 성숙도를 보여 주는 하나의 척도"라고 했다.
이어 그는 "결국 이 대통령의 발언은 소환요구에 서명한 이 유권자들에 대한 도발로까지 해석될 수도 있다"라면서 "이 대통령 또한 수많은 유권자들의 선택으로 인해 대통령에 선출되지 않았나"라고 반문했다.
김태환 제주지사는 여론수렴 절차를 무시하고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밀어붙이다 주민들로부터 거센 소환압박에 직면해 있다. '김태환 지사 주민소환본부'는 김 지사가 추진하고 있는 내국인 전용 카지노 건설, 영리병원 도입 등도 문제삼고 있다.
소환요구에는 청구요건인 4만여 명을 훌쩍 뛰어 넘는 7만8000여 명의 제주시민이 서명했다. 이 대통령 논리대로라면 7만8000여 명의 시민들이 '정치적 반대'를 위해 제도를 악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대통령의 이같은 발언이 보도된 직후 주민소환본부는 성명을 통해 "이는 주민소환법과 제주특별자치도특별법에 따라 추진한 합법적인 국민의 권리마저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행위이자, 지역주민들의 자발적인 의사과정에 대통령의 신분으로 개입하려는 권위적, 억압적 발언"이라고 반박하면서, 이 대통령 발언에 대한 선관위원회 차원의 조사를 촉구하기도 했다.
"결국 문제는 MB의 '권위주의적 법치'"
김호기 교수는 "높아진 유권자들의 의식과 발전된 21세기 민주주의에 대한 이 대통령의 취약한 이해가 재확인된 발언"이라고 지적하면서 "결국 문제는 이 대통령의 국정운영 방식"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법치를 내세우면서도 민주주의적 작동원리에 대한 인식은 대단히 취약한, '신권위주의적 법치'에서 하루 빨리 이 대통령이 벗어나야 한다"면서 "선출된 권력이 공론을 반영하지 않고, 일방적인 통치를 시도하는 것이 곧 민주주의의 위기가 아니냐"라고 말했다.
이준한 교수도 "이 정부가 말로는 서민정치, 중도정치를 한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권위주의적 국정운영에 몰입하고 있다는 게 국민들의 밑바닥 정서"라고 비판했다.
이 대통령의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은 라디오 연설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지난해 10월부터 현재까지 총 18차례 이어진 정례 라디오 연설에서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단 6차례 등장했을 뿐이었다.
그마나 이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폭력은 양립할 수 없다", "회의실 문을 부수는 해머가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때렸다"는 식으로 '국회폭력' 사태와 관련해 야당 의원들을 비난하는 데에만 민주주의를 입에 올렸다. '평등'과 '인권'이라는 단어는 아예 등장하지도 않는다.
반면 '경제'는 73회로 가장 자주 사용됐다. '북한'은 32회, '성장'도 16회로 비교적 자주 등장하는 단어로 꼽힌다.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는 이같은 이 대통령의 언어사용이 각종 '가치'에 대한 이 대통령의 인식 수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라고 해석했다.
황 교수는 "공개적으로 자주 사용되는 단어들은 결국 대통령과 청와대가 주요하게 생각하는 핵심 과제와 직결된다는 측면에서 이 대통령과 청와대는 이같은 가치들의 우선순위를 경제나 안보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후퇴',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세간의 지적이 이 대통령과 청와대로서는 '뜬금없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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