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국회 및 법원에 제출한 '안전·보건 진단 보고서' 내용 일부가 임의로 삭제 및 수정된 사실이 드러났다. 삼성디스플레이 직원이 고의로 저지른 변조 행위다.
같은 보고서가 고용노동부에 보관돼 있음에도, 자료 요청을 받은 고용노동부는 삼성디스플레이가 보관하던 보고서를 국회 및 법원에 제출했다. 고용노동부는 삼성이 임의로 변조한 보고서의 중간 전달자 노릇을 한 셈이다. 이 과정에서 고용노동부는 보고서 변조에 대해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
똑같은 보고서, 2014년 제출본과 2016년 제출본이 달라
<2013년 삼성디스플레이 아산 사업장에 대한 안전·보건 진단 보고서>는 지난 2014년 국회 및 법원에 제출됐다. 같은 보고서가 올해에도 국회에 제출됐다. 두 보고서를 대조한 결과, 2014년 제출본은 2016년 제출본과 달랐다. 2014년 제출본에는 임의로 삭제 및 수정된 곳이 있었다.
보고서 안의 'L8 공장 위험 요인' 항목을 보면, 2014년 제출본에는 4건이라고 돼 있다. 하지만 2016년 제출본에는 11건이라고 돼 있다.
2016년 제출본에 담겨 있는 산업안전보건공단의 권고 사항이 2014년 제출본에는 통째로 삭제돼 있다. 이런 사례가 곳곳에 있다.
"실무자 재량으로 보고서 속 정보 삭제, 지우고 보니 합계 안 맞아 수정"
삼성 측 해명은 이렇다. 2014년 당시 국회 및 법원으로부터 자료 요청을 받은 고용노동부는 관련 당사자인 삼성 측에 문의했다. 삼성 실무자는 '영업 비밀' 관련 내용을 지운 채 보고서를 고용노동부에 넘겼다. 그런데 보고서에서 일부 내용을 지우고 보니, 숫자 합계 등이 맞지 않았다. 결국 그것까지 수정했다는 해명이다.
삼성 측은 "보고서를 위조할 생각이었다면, 왜 굳이 2014년 제출본만 손질했겠는가"라며 임의 위조 의혹을 부인했다. 삼성 측은 회사 내부 정보를 외부 기관에 공개할 때, 적용되는 내부 기준 역시 없다고 했다. 요컨대 2014년 당시 보고서 내용 일부를 지운 결정은 실무자가 임의로 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어디까지 지워서 넘길지에 대한 판단 역시 실무자 재량이었다고 했다. 삼성 측은 이런 모든 과정이 현행 정보 공개 관련 법률에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임의 변조 보고서로 논의 및 판단한 법원과 국회
이희진 씨는 지난 2002년 11월부터 2007년 2월까지 삼성전자 디스플레이 사업부 천안사업장에서 일했다. 현재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희귀 질환을 앓고 있다. 이 씨는 삼성 재직 당시 LCD 판넬의 불량품을 걸러내는 일을 했다. 12시간 맞교대로 일하며 장시간 동안 LCD 판넬의 색상과 불량을 육안으로 검사하는 등의 격무에 시달렸다.
이 씨의 산업 재해 여부를 놓고 소송이 벌어졌다. 해당 재판부에 제출된 게 <2013년 삼성디스플레이 아산 사업장에 대한 안전·보건 진단 보고서> 2014년 제출본이다. 당시 국회에서도 삼성 직업병 문제가 논란이 됐는데, 국회에도 같은 보고서가 제출됐다. 법원과 국회는 삼성 실무자가 임의로 변조한 보고서를 근거로 논의 및 판단을 했던 셈이다.
삼성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산업 재해 문제가 불거진 이래, 삼성 측은 관련 자료 제출을 줄곧 거부해 왔다. 그런데 2014년에 <2013년 삼성디스플레이 아산 사업장에 대한 안전·보건 진단 보고서>를 법원과 국회에 제출했고, 이는 진일보한 조치라는 평가를 받았었다. 하지만 해당 보고서가 임의 변조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런 평가는 빛이 바랬다.
어떤 정보 감출지 판단, 삼성 마음대로
문제는 고용노동부다. 법원 및 국회가 보고서 제출을 요구한 곳은 고용노동부였다. 해당 보고서는 고용노동부 장관의 명령에 따라 산업안전보건공단이 삼성디스플레이를 상대로 작성한 것이다. 따라서 같은 보고서가 고용노동부에도 보관돼 있다. 그런데 고용노동부는 굳이 삼성이 보관하던 보고서를 넘겨받아 법원 및 국회에 제출했다. 이 과정에서 고용노동부는 삼성의 보고서 변조에 대해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
보고서 내용 가운데 '영업 비밀'에 해당하는 부분이 어디인지에 대한 판단을, 고용노동부가 삼성에게 온전히 맡겼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이런 사실은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 회관에서 열린 "끝나지 않은 삼성 직업병, 계속되는 위험은폐, 과연 영업 비밀인가" 토론회에서 공개됐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반올림)'이 주최한 이날 토론회에서 임자운 변호사는 "삼성이 법원에 제출될 보고서를 임의로 수정·삭제까지 했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 법원 자료 제출 요구 가운데 83%를 거부
삼성의 보고서 변조 행위가 가능했던 배경에는 기업의 '영업 비밀 적용 남용'에 관대한 법원 및 행정부의 태도가 있다. 노동자와 소비자의 건강 및 생명에 관한 내용조차 기업은 '영업 비밀'이라며 감추곤 한다. 법원 및 행정부 역시 기업이 '영업 비밀'로 규정한 부분은 굳이 캐묻지 않는다.
이날 토론회 자료집에 따르면, 삼성전자가 산업재해 소송에서 법원의 질의 및 자료 제출 요구를 거부한 비율이 83%였다. 대부분 '영업 비밀'을 근거로 내세웠다.
<반도체 공장 위험성 컨설팅 보고서>, <퇴직자 암 지원 제도>, <재해자가 취급한 화학제품명과 성분>, <작업 환경 측정 결과 보고서> …. 모두 삼성 측이 법원에 제출을 거부한 자료들이다.
산재 피해자가 위험성 입증하는 구조, 기업이 정보 감추면 방법 없어
이런 상황에선 산업 재해 피해자가 자신이 담당했던 업무의 위험성을 입증할 길이 없다. 현행 법 체계에선 입증 책임이 피해자에게 있다. 그런데 입증을 위한 자료는 기업이 갖고 있다. 기업이 공개를 거부하면, 피해자는 방법이 없다.
반올림이 이날 토론회를 마련한 이유다. 기업 멋대로 이뤄지는 영업 비밀 적용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것. 아울러 노동자에겐 작업 환경에 대한 '알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너무 폭넓은 '영업 비밀' 규정, 독성 물질 관리에도 맹점
이날 토론자로 참가한 윤충식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교수는 기업들이 '영업 비밀'로 주장하는 근거가 대부분 타당하지 않다고 말했다. 윤 교수에 따르면, 한 반도체 업체는 약 550가지 화학물질을 쓴다. 그런데 이 가운데 300가지가 영업 비밀이라는 게 이 업체의 주장이다. 윤 교수는 이 업체가 '영업 비밀'을 너무 폭넓게 규정했다고 본다.
그래서 생긴 부작용도 크다. 독성 물질 관리가 제대로 안 되는 것이다. 산업 안전 및 보건 당국 입장에선 독성 물질 노출 기준을 마련하기 어렵다. 해당 업체가 실제로 어떤 물질을 쓰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노동자 입장에선 확인도, 예방도 불가능한 위험이 확대된다.
윤 교수는 "영업 비밀이란 '공공연히 알려져 있지 않고 독립된 경제적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 상당한 노력에 의해 비밀로 유지된 생산 방법, 판매 방법, 그 밖에 영업 활동에 유용한 기술상 정보"라며 "삼성 등 위험 물질을 다루는 기업이 주장하는 영업 비밀 근거 사유는 부당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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