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유신의 기수, 박근혜 농단의 '왕실장'. 2013년 8월부터 2015년 2월까지 박근혜 대통령을 보좌했던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인생 말로가 암흑에 휩싸였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이 세상에 드러난 후 "최순실을 모른다"고 잡아 떼 왔던 김 전 비서실장이, 사실 최 씨와 가까웠던데다, 나아가 최 씨의 국정 농단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했을 수 있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27일 구속 기소된 차은택 씨의 변호인인 김종민 변호사는 오후 서울중앙지검에서 기자들과 만나 최순실 씨가 차 씨와 김 전 실장의 만남을 주선했다고 밝혔다. 김 변호사는 "2014년 6∼7월께 청와대 비서실장 공관에서 당시 김 실장과 김종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정성근 문체부 장관 내정자를 만난 사실이 있다"고 밝혔다.
김 변호사는 "당시 최(순실) 씨가 차 씨에게 '어디론가 찾아가 보아라'고 해서 지시에 따랐고, 그 장소가 청와대 비서실장 공관이었다"고 했다. 여기에서 차 씨는 김 전 실장과 10분가량 면담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변호사는 모임 성격을 "인사하는 자리 정도"라고 말했다.
앞서 김종 전 차관은 검찰에서 "2013년 취임 초 김 전 실장이 '만나보라'고 해서 약속 자리에 나갔더니 최순실씨가 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즉 최순실 씨와 차 씨, 김 전 차관 사이에 김 전 실장이 있다는 증언들이다. 이 증언들이 맞다면 김 전 실장은 지금까지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게 된다. 거짓말을 했다는 것은, 진실이 드러날 경우 본인이 큰 타격을 입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 변호사는 또한 차 씨가 경기도 화성 기흥컨트리클럽(CC)에서 최순실 씨,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장모인 김장자 삼남개발 회장 등과 함께 골프를 친 것에 대해서도 사실이라고 밝혔다. 기흥CC는 우 전 수석 처가가 사실상 최대 주주인 골프장이다. 이는 최 씨와 우 전 수석이 알고 지냈다는 결정적 정황 증거다. 우 전 수석도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이야기다. 김 변호사는 "자리를 제안한 건 최순실 씨로 추측된다"고 밝혔다.
김 전 실장에 대한 검찰 조사는 불가피해졌다. 우 전 수석에 대한 수사도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김 전 실장은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 이후, 최 씨와 문고리 3인방인 정호성, 이재만, 안봉근 전 청와대 비서관의 공백을 채우고 사태 수습을 진두지휘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현재 사표를 낸 최재경 민정수석이 김 전 실장의 '인맥'으로 분류되는 것도 무관치 않다. 박 대통령이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한 이후 컨트롤타워로 의심받았던 김 전 실장이 최순실 씨와 엮이면서, 박근혜 정권은 패닉 상황에 빠질 것으로 보인다.
김 전 실장은 박정희 정권 때부터 유신 헌법 기안에 참여했던 인사다. 군사 독재 정권에서 승승장구했고, 정치인으로 변신한 후에도 국회 법사위원장을 맡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는 등, 각종 '반동'적인 일들을 주도해왔던 인사다. 부산 초원복국 사건의 '우리가 남이가'는 그의 대표 어록이다. 그런 구태의 상징적 인물이 박근혜 대통령에 의해 '청와대 2인자'인 비서실장 자리에까지 올랐던 것이다. 평생 '부역'과 '반동', '기망'과 '곡학아세'로 점철된 김 전 실장의 삶이, 이번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통과하며 어느 선까지 추한 모습으로 전락하게 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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