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로틴의 칼날이 그의 목을 향해 내려온다.
혁명적 삶의 생애를 마감하는 그 '찰나'가 너무나 길고 길다. 지루함마저 든다. 그 속도로는 목이 잘리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이다. 칼날마저도 생명의 시간을 훔치는 그 순간에는 주저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훔쳐도 되는지 아닌지 눈치를 보느라. 끔찍하고 두려운 상황의 빠른 소멸을 욕망함으로써 생겨난 '상대적 시간 감각'일지 모른다.
잘린 그의 목이 바구니 속으로 떨어져 내린다. 피가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붉은 빛깔을 띠며 흘러내린다. 혁명적 삶의 생애를 마감한 자, 생의 시간을 빼앗긴 자, 목이 잘린 자, 서른다섯 살의 사내, 당통이다.
막시 밀리앵 드 로베스 피에르(Maximilien François Marie Isidore de Robespierre, 1758~1794년)와 장 폴 마라(Jean-Paul Marat, 1743~1793년)와 함께 프랑스 대혁명을 이끌었던 조르주 자크 당통(Georges Jacques Danton, 1759~1994년), 그는 왜 그렇게 죽었는가?
안제이 바이다는 역사와 인간을 '평생의 키워드'로 삼아 온 감독이다. 그는 '전쟁 3부작' <세대>(1955년), <카날>(1957년), <재와 다이아몬드>(1958년)를 통해 동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감독 중 한 사람이 됐다. 세 작품 모두 외세 침략에 따른 전쟁과 이념 갈등으로 고통 받은 조국 폴란드와 인민들의 상처를 다루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중에서 가장 인상깊게 본 작품은 <카날>이었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의 실패로 독일군을 피해 혹은 다시금 독일군에 맞서기 위해 벗어날 수 없는 미로 같은 하수구로 들어갔다가 출구를 못 찾고 헤매며 드러나는 인간의 이기심과 나약함과 절망 그리고 책임감과 투지와 희망. 이것들의 부딪힘 속에서 흘러나오는 비명과 절규. 인간이라는 존재의 궁지를 밤새워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스탈린 체제에서의 노동 영웅의 허구성과 폴란드의 민주화 과정을 다룬 <대리석의 사나이>(1976년)와 <철의 사나이>(1981년)도 유명하다. 이 작품들은 폴란드의 정치·사회를 바꿔놨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 그가 1982년에 <당통>을 만들었다. 그는 혁명의 성공과 실패를 가름할 잣대를 탐색하고자 했던 것인가? 조국 폴란드가 민주화 이후 꼭 짚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를 말하고자 했던 것인가? 그래서 인민의 자유해방을 위해 헤센을 전복하고자 했던 투쟁 과정에서 뷔휘너가 프랑스 대혁명에 주목했던 것을 떠올렸던 것일까? 그래서 그의 <당통의 죽음>을 다시금 끄집어냈던 것일까?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역사적 텍스트를 통해 인간에 대한 이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 안제이 바이다가 당통과 그의 죽음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혁명 이후 정치가 문제 삼아야 할 토픽(topic), 혁명의 성패를 좌우할 정치의 관건은 바로 인간에 대한 이해라는 것이다.
안제이 바이다가 조명한 당통의 죽음은 인간에 대한 이해의 문제를 둘러싼 로베스 피에르와의 정치적 갈등, 그리고 그것을 폴기 위한 전략적 선택의 소산물이다. 인간에 대한 이해를 중심에 놓고 벌어지는 정치의 풍경. 지금 세상의 정치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선거를 특권화함으로써 인간을 '유권자'로 못박아 놓은 현대 민주주의 정치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정치이다. 결국은 피범벅의 풍경을 그려내며 끝난다는 점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정치라 할 수 있지만.
영화 <당통>의 골자
프랑스 공화정 2년 차인 1794년 봄. 당통은 '공포 정치'를 끝내기 위해 로베스 피에르와 혁명 정부와 공안위원회에 정면으로 맞선다. 측근들이 주장한 것과 달리 무력에 의한 저항이 아니라, 신문과 여론을 통해서였다. "정치는 머리를 쓰는 것"이라며, 그는 더 이상의 피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미 반혁명 분자들을 과감하게 처형할 용기를 주창했던 '샹 드 마르스 학살'의 책임자 당통이 아니었다. 로베스 피에르와 함께 산악파의 일원으로서 지롱드파를 숙청하고 왕을 처형하고 정적 에베르를 제거했던 당통이 아니었다. 함께 처형당하게 될 필리포의 말처럼, 어쩌면 당통은 혁명을, 정치를, 권력을 욕망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부자였기에 변한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당통은 자신의 부유함을 비판하는 동조자 필리포에게 이렇게 말한다.
로베스 피에르는 당통의 신문을 폐간 조치하고, 그에게 자신에 대한 비판과 공격을 철회하라고 강하게 압박한다. 그러면서도 당통의 제거를 요구하는 측근들의 요구에 처음부터 선뜻 응하지는 않는다.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는 당통을 숙청·처형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될 것이었기에. 무엇보다도 당통을 지지하는 "부르주아를 반혁명으로 내몰 것"이기에. 하지만 무엇보다도 로베스 피에르가 우려했던 것은 "혁명에 대한 인간의 신념의 흔들림"이었다. 그는 당통을 처형하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래서 "공포만으로 통치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이것은 "혁명의 절망과 끝"을 의미했다.
당통파는 국민공회에서 로베스 피에르와 혁명 정부 공안위원회의 최대 약점(?), 인민을 혁명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있는 '가난한 혁명'의 핵심 요인으로 '비밀 경찰'의 문제를 들고 나와 강도 높게 공격한다. 이에 로베스 피에르는 당통과 만나 마지막 협상을 벌인다. 하지만 결렬되자 당통을 죽이기로 한다. 그것도 매우 신속하게. 로베스 피에르에게 당통을 제거하자고 먼저 제안했던 이들마저 놀랄 정도로. 시간을 끌면 부르주아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조직해 자신을, 그리고 자신이 가고자 하는 혁명의 길을 무너뜨릴 것이라 여겼기에. 게다가 인간에 대한 이해를 두고 다투면서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간극을 확인하였기에.
1794년 4월 5일 당통은 형장으로 향하면서 로베스 피에르가 묶는 숙소의 창문을 올려다보며 혼자 말한다.
로베스 피에르는 당통이 처형된 후, "이제 당통에게 승리했으니 독재권을 받아들여라"라고 말하는 자신의 측근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게 나에게 뭘 의미하는지 알아? 내가 믿는 모든 것, 살면서 지키려고 한 모든 것이 영원히 깨졌버렸다는 것이야. (…) 혁명은 잘못된 길로 들어섰어. 이제 정말 독재가 필요하게 됐어. 난 단지 자고 싶을 뿐이야."
로베스 피에르는 당통이 예견한 것처럼 석 달이 조금 넘은 7월 28일 당통의 뒤를 따른다.
로베스 피에르와 당통의 간극
인간에 대한 이해를 둘러싼 로베스 피에르와 당통 간의 간극, 당통을 그리고 결국은 로베스 피에르 역시 죽음으로 끌고 들어간 그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안제이 바이다는 두 사람 간의 논쟁 장면을 통해 이를 보여준다. 이 장면이 영화 <당통>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로베스 피에르 : 당신이 정부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시오?
당통 : 개인이란 다수의 위에 존재하는 거요. 당신과 나는 모두 공안위를 경멸해요. 하지만 난 그걸 말하지. 그들이 우리 사이에 있어선 안돼요. 공안위도 안돼고, 정부도 안 되고, 그 누구도 안 되요. 우리가 분리되면 우린 공멸할 거요. 당신이 공포 정치를 계속하면, 난 당신을 지원할 수 없소. 누구나 그럴 거요. 우리의 힘인 인민이 혁명을 파괴할 거요.
로베스 피에르 : 난 인민을 방어하지요. 아무도 그걸 안 하고 있소.당통 : 누구로부터?
로베스 피에르 : 혁명을 이용해서 부를 늘려가는 자들로부터. 찬성이요 반대요?
당통 : 당신은 사람들이 소설 속의 영웅처럼 행동하길 바라요. 당신이 잊은 건 우리가 살과 피로 이루어졌다는 거요. 당신은 우리가 숨 쉴 수 없는 고도까지 우리를 끌어올리려고 한다고. 그래서 혁명을 외롭게 만들지. 혁명을 얼어붙게 한다고. 가장 뜨거운 호응도 얼려버리지.
로베스 피에르 : 당신의 충고는?
당통 : 우리 수준으로 돌아와요. 지금 바로.
로베스 피에르 : 당신은 혁명을 동력을 멈추게 하고 혁명을 죽이게 하고 있어.
당통 : 사람들은 먹고 잠자고 싶어 평화롭게. 빵이 없으면 법도 없어. 자유도, 정의도, 공화국도 없다구. 공안위와 함께 지옥까지 가보시오. 난 당신을 존경해요. 당신을 따라가고 싶소. 하지만 어디든지는 아니오.
로베스 피에르 : 내가 원하는 건 80%의 인민에게 정상적인 삶의 조건을 제공하는 거요.
당통 : 됐어요. 난 당신을 안다고요. 우린 법정에 있는 게 아니요. 그게 당신이 원하는 전부가 아니지. 권력을 너무 오래 쥐고 있으면 안 되요.
로베스 피에르 : 권력을 원하시오?
당통 : 그럴 필요가…. 난 권력이 있소. 유일한 진정한 권력, 거리의 사람 하나하나로부터 나오는 권력. 난 인민을 이해하고 인민도 나를 이해해요. 그걸 잊지 마시오.
로베스 피에르 : 잊을 수 없지. 하지만 당신도 잊지 마시오. 인민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난 어떤 장애물에도 멈추지 않아.
당통 : 당신이 인간의 행복을 원한다고? 당신은 인민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어떻게 당신이… 자기 자신을 보라고. 술도 안 마시고, 분칠이나 하고. 검이 당신을 창백하게 만들어. 사람들이 뭐라는지 아나. 당신은 여자하고 자지도 않는대. 뭘 위해서 연설하나.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길 원한다고? 하지만 당신은 사람이 아냐. 내가 인민을 보여주지. 길거리를 걸어보라고.
정치가 인간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하는 이유
지금 세상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정치의 풍경, 안제이 바이다의 영화 <당통>은 인간의 이해를 다투는 정치의 풍경을 그려냈다. 그 풍경은 결코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다. 당통과 로베스 피에르 둘 다 결국 비극적 죽음을 맞이했을 뿐만 아니라, 로베스 피에르의 말처럼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혁명의 전조를 보여주는 것이었기에. 그것도 피로 범벅된 죽음을. 그래서 어쩌면 쉽게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 여길지도 모른다. 혁명이라는 예외적 시기의 정치에서 나타나는 풍경이라고 안도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 인간에 대한 이해를 두고 다투는 정치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잊어서는 안 된다. 정치는 '권력의 놀이'가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이 함께 살아가기 위한 기술'이라는 것을. 그래서 정치를 함에 있어 필수적인 것이 바로 '인간에 대한 이해'라는 것을. 왜, 무엇이, 어찌 다른지를 잘 헤아려야 함께 살아갈 수 있고, 이를 위해서는 나 자신과 타인에 대한 살핌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래서 결국은 함께 살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공통성'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을. 권력은 그것에 기반했을 때에만 정당성을 갖는다는 것을. 이를 잊고서는 서로 다름을 끌어안지도, 서로 같은 것을 만들어내지도 못할 때에는 하나의 죽음이 다른 하나의 죽음을, 결국은 모두의 궤멸을 가져온다는 것을.
참, 끝으로 얼마 전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당통과 로베스 피에르의 논쟁 장면을 보여주고선 장난스럽게 물었다. 둘 중에 누가 '애인'으로 더 좋겠냐고. 과연 어떤 답이 나왔을까? 궁금하면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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