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간에 깊은 관계를 맺으면 '비밀'이 생긴다. 회사에 다닌 사람은 조직에 관한 비밀을 알게 되고, 사랑하는 연인 관계에도 서로 간에 비밀을 알게 된다. 비밀의 특징은 당사자들의 동의를 받지 않고 폭로하는 순간, 상대편은 큰 충격과 상처를 받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비밀을 공개할 때는 큰 충격을 상쇄할 수 있는 '명분'이 있어야 하며, 명분을 얻지 못할 경우에 공적·사적으로 큰 문제를 발생시킬 가능성이 크다.
하물며 개인도 이러한데 국가 비밀을 알게 된 공직자가 아무런 명분도 없이 국가 비밀을 재직 및 퇴임 후에 떠벌리고 다니면 국가에 큰 충격을 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실제 국가 비밀을 규정하고 있는 '보안 업무 규정'은 비밀 1급을 "누설될 경우 대한민국과 외교 관계가 단절되고 전쟁을 일으키며"라는 말로 규정하고 있다. 이보다 약한 2급 비밀도 "누설될 경우 국가 안전 보장에 막대한 지장을 끼칠 우려가 있는 비밀"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최근 이런 위험성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전직 공직자들의 행태가 사회적으로 큰 혼란을 주고 있다. 김만복 전 국정원장은 지난 2일 한 언론 인터뷰에서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에 상시 전화통화를 할 수 있는 핫라인이 뚫려 있었다"며 "핫라인을 통해 남북 정상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라고 거침없이 밝혔다. 만약 이 발언을 한 것이 사실이라면 전 공직자로서 매우 부적절한 처신이며, 법 위반 유무를 판단해야 할 중대한 사안이다.
퇴임 후 자서전에 비밀 기록 공개한 MB
사실 여부를 떠나 이런 비밀 정보를 공개할 때는 명분이 있어야 한다. 보안 업무 규정 제25조에는 비밀을 공개할 때(국가 안전 보장을 위하여 국민에게 긴급히 알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거나, 공개함으로써 국가 안전 보장 또는 국가 이익에 현저한 도움이 된다고 판단될 때) 보안심사위원회에 심의를 거쳐서 공개하게 돼 있다.
김만복 전 국정원장의 발언은 위 사례에도 해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국정원법 17조(비밀의 엄수)도 위반했을 가능성이 크다. 더군다나 위와 같이 사회적으로 큰 혼란을 일으키는 행태가 최근 많아지고 있어 문제가 더욱 심각해 보인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명박 전 대통령이다. 대통령은 가장 고도의 비밀을 다루고 있는 공직자이며, 이는 퇴임 후라도 그 중요성이 경감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명박 전 대통령은 퇴임 당시 단 한 건의 비밀 기록도 청와대에 남겨놓지 않아 공직자의 책임성 여부가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비밀 기록은 반드시 생산해 후임 정권에 남겨주어야 하며, 노무현 전 대통령도 8000건이 넘는 기록을 이명박 정부에게 넘긴 바가 있다.
그런데 이명박 전 대통령은 정작 퇴임 후 자신의 자서전에 비밀 기록으로 유추할 수 있는 기록 수십 건을 적나라하게 공개해 버렸다. 당시 필자는 언론인들의 요청으로 책을 정독할 수 있었는데 큰따옴표를 통해 원자바오 전 총리 등의 발언을 가감 없이 서술한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런 내용은 그 자체로 중국 정부에 큰 불쾌감을 줄 수 있으며, 양국 간 외교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다. 책에는 이뿐만 아니라 남북 간 일어났던 고도의 비밀 정보를 거침없이 기록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런 공개가 아무런 명분도 없이 갑자기 책을 통해서 공개되었다는 점이다. 지금도 대형 서점 베스트셀러 칸에 전시된 이 책을 보면서 씁쓸한 마음이 든다.
전 세계 최초인 정보 기관의 비밀 기록 '셀프' 공개
이런 문제는 전직 공직자들만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남재준 전 국정원장은 현직 국정원장 신분으로 1급 비밀이었던 '10.4 남북 정상 회담록'을 NLL 포기 발언이 있었는지 여부를 확인한다는 명분으로 다 공개한 적이 있다. 아마도 전 세계에서 정보 기관이 비밀 기록을 스스로 공개한 것은 사상 처음일 것이다. 당시 수많은 전문가가 위 내용을 공개하면 남북 관계에 큰 타격을 주며, 향후 대통령과 고위 공직자들이 민감한 기록을 남기지 않을 것이라고 비판했지만 남재준 전 국정원장은 요지부동이었다. 과연 이 기록을 공개해서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물론 비밀기록은 그 자체로 영원히 비공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정 시점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공개되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국가 안전 보장을 위해 국민에게 긴급히 알려야 할 경우 공개할 수 있다. 또한 '국가' 안전 보장이 아닌 '정권' 안전 보장을 위해 비밀을 설정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이유로 공익 제보자, 언론인, 시민 단체 활동가들도 자신들의 명운을 걸고 비밀 기록을 공개하기도 한다. 미국 CIA가 전 세계를 도청한다는 사실을 밝힌 에드워드 스노든이나 각종 국가권력의 부당성을 밝히고 있는 <위키리크스>가 여기에 속한다. 이 경우 명백히 국가권력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한 목적이 존재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사례들은 공개 자체가 매우 자의적이고, 정치적이라는 점에서 정당성을 얻기 힘들다. 비밀기록은 공개 자체가 국가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위험한 기록이다. 이 기록을 공개하기 위해서는 더 큰 위험성을 알리기 위한 명분이 있어야 하며, 그 조차도 아주 고도의 판단이 필요한 작업이다.
과연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한 공개인가? 자신의 영달을 위한 공개인가? 국민은 대부분 그 해답을 분명히 알고 있다. 향후 자신의 영달을 위한 무차별적 비밀공개에 관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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