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의 경기부양 효과
한국의 경제정책사에서 성장론과 안정론의 대립은 산업화의 역사만큼 오랜 내력을 갖고 있다. 전통적 성장론자들의 경제정책은 저금리와 신용팽창을 통한 투자 촉진과 고환율을 통한 수출확대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로 인한 물가상승, 과잉투자, 자산 거품 형성의 부작용에 대한 위험은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서양의 선진국에서는 주로 진보성향의 경제학자들이 하는 주장이 한국에서는 보수적 정치가와 언론의 단골 메뉴가 되고 있다는 점은 정치학적으로 매우 재미있는 현상이다.
환율 상승(원화가치 하락)이 왜 경기를 부양할 수 있는지는 비교적 잘 이해되고 있다. 나사를 한 개 1달러에 수출하는 기업이 있다. 원화의 대미 환율이 1달러 1000원에서 1200원으로 상승하면 원화로 환산한 이 기업의 해외매출이 당장 20% 증가하고 이에 따라 이윤도 증가한다. 또한 이 기업은 나사의 달러 수출 가격을 1달러 아래로 인하할 여력을 갖게 된다. 달러 수출 가격을 하락시키면 해외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이 상승하여 이 기업은 더 많은 나사를 수출할 수 있게 되고 이에 따라 생산량도 증가한다.
환율의 상승은 동시에 원화로 환산한 수입 가격도 증가시킨다. 이는 수입품의 가격을 국산품에 비해 상승시켜 수입을 감소시키고 국산품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킨다. 그러나 수출 기업들은 수출품을 제조하기 위해 많은 원자재와 부품을 수입한다. 환율 상승으로 수입 중간재의 원화 비용이 증가하면 생산 비용이 상승하여 수출 기업이 생산을 증가시킬 유인이 감소한다. 한국의 경우 이러한 효과가 꽤 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00달러어치의 수출을 하기 위해서는 40달러어치의 중간재를 수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비율은 다른 국가에 비해 높은 편이다.(1)
경제에는 수출기업만 있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중소기업은 국제경쟁력이 부족하여 내수시장에만 자신의 상품을 판매하고 있으며 동시에 원자재와 부품을 외국에서 수입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기업들에 환율 상승은 매출 증가 없는 생산 비용 상승을 유발하여 채산성을 악화시키고 내수시장에서 공급 감소를 초래한다. 또한 환율 상승으로 수입되는 필수 소비재의 가격이 상승하면 가계가 다른 상품에 쓸 수 있는 소득이 감소하여 내수 수요를 위축시킬 수 있다. 이러한 환율의 경기 위축 효과는 현재 일본에서 실제로 관찰되고 있다.
이는 아베노믹스로 인해 엔의 대미환율이 40%나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경기가 아직 살아나지 않는 중요한 이유로 지적되고 있다. 또한 환율 상승으로 수입 자본재의 가격이 상승하면 자본재를 수입하는 기업들의 투자 유인이 감소할 수 있다. 이에 더해 가계와 기업들이 외채를 많이 지고 있다면 환율 상승은 또 다른 경로로 수요를 압박한다. 환율이 상승하면 자국화폐로 표시한 외채의 액수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율의 상승은 달러로 환산한 임금의 하락을 가져와 공장의 한국 입지 매력을 증가시켜 투자를 증가시키기도 한다.
그럼 이렇게 복잡한 한국 경제의 환경에서 환율 상승은 경기를 부양할 수 있을까? 주요 대기업이 공장을 대부분 해외로 이전시켰기 때문에 환율 상승의 국내생산 자극 효과가 거의 소멸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해외로 공장을 이전시킨 일부 기업 입장에서 본 잘못된 설명이다. 국가 전체로 보아 한국은 여전히 수출을 수입보다 많이 하는 나라이고 수출이 수입을 초과하는 액수가 국내총생산의 5%를 초과하고 있다. 그래서 필자를 포함한 많은 경제학자는 최근 세계 생산 체제의 변화로 인해 그 효과가 작아졌을지는 모르지만 한국과 같은 흑자 국가에서 환율 상승은 믿을 만한 경기부양 효과를 발생시킬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환율 너무 낮은가?
그렇다면 강대국들이 보복만 하지 않는다면 끊임없이 환율을 증가시키려 노력해야 할까? 불행하게도 많은 경제 전문가는 기회 있을 때마다 언론에서 고환율 정책을 주문하고 있고 수출 기업가들도 이에 적극 동조한다. 그러나 환율을 통한 경기부양은 생산이 잠재 수준에 미달하거나 저인플레이션 위험이 높을 때만 필요하다. 불경기가 아닐 때 경기부양책을 쓰면 나중에 인플레이션 상승, 기업의 과잉 진입, 자산 거품 형성 등의 비싼 비용을 치러야 할 위험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경제가 불황 상태에 있지 않다면 환율은 경제의 근본 여건을 적절히 반영하는 수준에서 결정되어야 한다. 환율이 지나치게 높게 유지되면 장기적으로 경제적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환율 상승은 수출을 활성화시키지만 내수를 침체시켜 가계와 중소기업의 소득을 대기업으로 이전시키는 효과를 가진다. 가계와 중소기업의 소득 비중이 대기업에 비해 급속히 감소하여 중요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고 동시에 구조적인 내수 침체의 원인이 되고 있는 한국 경제에서 이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또한 환율 상승은 내수에 비해 수출과 수입을 증가시켜 경제의 무역의존도(수출과 수입의 합이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를 증가시킨다. 이는 경제가 외부충격에 과도하게 노출되는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그림 1>은 1997~1998년 한국 금융위기와 2008~2009년 세계 금융위기 기간 원화의 대미 환율이 급등했고 이와 동시에 무역의존도가 급증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한국의 무역의존도는 국가의 크기를 고려해도 다른 나라에 비해 높은 편이다.(2)
그럼 현재의 환율은 적정 수준에 비해 너무 낮은가? (원화가 지나치게 고평가 되었나?) 언론에 이러한 의견이 자주 표출되고 있고 환율을 상승시키기 위해 금리를 크게 인하하거나 강력한 외환시장 개입을 주문하는 주장들이 반복되어 등장한다. 그 근거는 <그림 2>에서 볼 수 있다. 2009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미국 양적완화의 여파로 원/달러 환율은 1400원대에서 1000원대로 급락했다. 또한 비교적 안정세를 보이던 원/엔 환율도 아베의 집권과 함께 시작된 일본의 양적완화 강화 조치로 인해 2012년 12월 이후 수직 낙하했다. 이에 따라 우리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이 급락했으니 이를 저지하기 위해 우리도 양적완화에 버금가는 강력한 환율 방어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환율전쟁’에서 우리만 무장해제를 당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관찰에는 두 가지 면에서 문제가 있다. 첫째로 엔에 대한 환율은 급락했지만 일본보다 더 중요한 우리의 무역 상대국인 중국 위안화에 대한 환율은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환율 정책이 엔화만을 기준으로 해서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3) 둘째로 이러한 관찰은 금융위기로 대규모 자본유출이 발생해 환율이 비정상적으로 높았던 2009년 초를 기준점으로 삼아 ‘환율 급락’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림 2>가 보여 주듯이 위기 전인 2005~2006년 기간과 비교하면 한국의 현재 환율은 오히려 높은 편이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경제학자들은 ‘실질실효환율’의 장기적인 추이를 관찰함으로써 화폐의 과대평가 여부를 판단하려고 한다. 실질실효환율은 다음과 같이 계산한다. 한국은 중국, 유럽, 일본, 미국 등 여러 국가와 교역을 하고 있으므로 이들 국가 화폐와의 환율을 가중평균하여 교역국의 화폐에 대비한 원화의 평균적인 가치를 계산한다. 이때 각 교역국의 가중치는 한국의 전체 교역량 중에서 그 국가와의 교역량이 차지하는 비중을 사용한다. 이에 더해 한국 제품의 가격경쟁력을 계산하기 위해 교역국간 물가상승률 차이를 감안한다. 환율이 고정되어 있다 하더라도 한국 제품의 물가가 교역상대국의 물가보다 빨리 증가하면 한국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하락하기 때문이다. <그림 3>은 지난 20년 동안 한국 실질실효환율의 추이를 보여준다. 실질실효환율은 명목 환율과 비슷한 움직임을 보인다. 금융 위기가 발생하면 환율이 급등하여 한국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졌다가 시간이 지나면 원래 수준으로 복귀해가는 움직임이 두 차례 반복되고 있다. 그림은 2009년 이후의 환율 급락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환율 수준은 지난 20년 평균 수준인 93에 밀착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현재의 환율은 역사적 평균에 비해 지나치게 낮다고 할 수 없다.
역사적 평균은 관찰 기간을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리 계산되기 때문에 경제학자들은 보다 과학적인 방법을 통하여 환율의 적정 수준을 계산하려고 한다. 이 때 가장 흔히 쓰는 방법은 수출과 수입이 균형을 이루도록 하게하는 환율을 적정 환율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 계산법에 의하면 현재 한국의 환율은 지나치게 높다. (원화 가치가 너무 낮다.) 현재 한국이 국내총생산의 5%를 초과하는 큰 경상수지 흑자를 내고 있고 있으므로 한국의 경상수지 흑자가 국내총생산의 3% 이내로 하락하기 위해서는 <그림 3>에서 실질실효환율이 90이하로 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계산법에 의하면 원화 환율은 작게는 3%, 크게는 6% 이상 추가 하락해야 한다.(4)
불안한 2015년
이명박 정부는 세계금융위기 직전인 2008년 초 연평균 경제성장률 7% 달성을 공약으로 내걸고 출범했다. 이렇게 높은 성장률은 한국의 잠재력을 훌쩍 넘는 허황된 수준인데다 이를 달성하기 수단도 전통적 경기부양책인 확대재정, 저금리, 고환율이어서 많은 경제전문가들의 우려를 자아냈다. 이러한 우려는 정권 초기 정부가 고환율을 유도하기 위해 외환시장에 실제로 개입함으로써 더욱 증폭되었다. 정부의 이러한 정책은 아이러니하게도 사후적으로 합리화 되었다. 세계금융위기의 발발로 세계가 극심한 경기침체에 빠짐에 따라 선진국 조기 진입이 아니라 경제를 위기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저금리와 확대재정이 필요한 상황으로 돌변했다. 또한 과다 유입되었던 달러가 금융 불안으로 급격히 한국을 탈출함에 따라 환율이 급등했다.
환율 급등은 한국경제에서 ‘자동 안정화 장치’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세계 경기가 급락하거나 국제 금리가 상승하여 불황의 위험이 커지면 환율이 급등하여 자동적인 경기부양 효과를 발생시켰기 때문이다. 한국이 지난 세계금융위기에서 비교적 적은 손상을 입고 탈출한 것은 이러한 환율의 덕을 크게 본 것이었다. 환율 급등은 수출품의 달러 가격은 급락했지만 원화 수출 가격을 위기 이전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을 가능케 해줘 수출 기업을 보호했다. 한국이 쓰러지지 않을 정도의 외환위기를 겪게 된 것은 결과적으로 행운이었다.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와는 대조적인 전략을 구사하면서 출범했다. 이번에는 지나치리만큼 비관적인 경제성장 전망을 제시하면서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피하기 위해서 적극적인 부양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부동산 경기부양, 증세 불가, 저금리 압박을 합리화하기 위한 전략이 아닌가 의심하면서도 정부의 비관론이 소비와 투자 심리를 냉각시켜 오히려 ‘자기실현적 기대’를 형성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정부의 이러한 정책 기조가 지난 정부에서처럼 사후적으로 합리화되는 길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려되는 시점이다. 2014년 10월 이후 잠시 잠잠했던 국제금융시장이 다시 요동치고 있다. 유럽과 일본이 기대 이하의 성장을 하고 있고, 그 위에 중국 위기설이 겹쳐 미국의 인상적인 경기회복 속도에도 불구하고 올해 세계 경제성장률이 작년보다도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이에 더해 에너지와 천연자원 가격의 급락으로 러시아를 비롯한 천연자원 수출 신흥국들이 큰 타격을 입고 있고, 올해 중반으로 예상되는 미국의 금리 인상이 겹치면 양적완화로 신흥국으로 유입됐던 달러가 대거 탈출하여 많은 신흥국들이 금융위기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농후해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계속되는 내수 침체와 수출 둔화에 대한 우려로 올해 성장률이 작년보다도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어가고 있다. 이에 더해 인플레이션도 1% 초반에서 맴돌고 있어서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다. 저금리와 고환율이 해보다 득을 더 많이 발생시킬 가능성이 높은 상황으로 경제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국제금융 시장의 전개를 예측하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미국의 강한 경기회복과 금리 인상, 그리고 신흥국 위기 우려의 확산으로 인해 2015년 원화 환율은 미국 달러에 대비해 상승세를 유지하게 될 것이라 전망된다. 반면 일본과 유럽의 경제 불안과 양적완화 강화로 유로와 엔에 대비한 원화의 환율은 하락할 것이라 예측되고 있다. 불안한 것은 중국이다. 최근까지 중국이 강한 위안화를 용인했지만, 최근 금리를 한차례 인하했고 이에 따라 위안화 절하 쪽으로 정책방향이 변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 전문가도 늘고 있다.
일부 전문가는 미국의 금리 인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과감한 저금리 정책과 외환시장 개입으로 경기를 우선 살려 놓아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제금융시장의 바닥을 형성하고 있는 얼음이 살얼음으로 변해가고 있을 즈음 금리 추가 인하와 원화 가치 하락 기대감을 국제 투기꾼들에게 심어주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부동산 대출규제가 풀린 상태에서 저금리가 부동산 담보 대출을 증가시키고 있는 것도 우려되는 대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선명한 정책 기조를 내세우기 보다는 상황 가변적인 정책을 모색하는 것이 좋다. 추가적 금리 인하는 한국이 국제금융시장에서 차별화되어 신흥국의 금융 불안이 한국으로 번질 위험이 없고 미국 금리 인상이 한국 자본 시장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판단될 때 시행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환율 상승을 목적으로 하는 금리 인하나 외환 시장 개입도 현재의 환율이 지나치게 낮은 것이 아니니만큼 엔화가 추가하락하고 위안화가 이에 가세하여 원화가 심각하게 고평가될 때를 기다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선은 이미 작동을 개시한 환율의 ‘자동 안정화’ 기능에 기대어보고 상황 변화를 예의 주시하고 있는 것이 불안한 2015년을 출발하는 현명한 자세일 것이다.
최근 수년간 원화 환율이 주요 통화에 대하여 급락했다. ‘환율전쟁’에서 패잔병이 되지 않기 위해 환율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최근의 환율 급락은 2008년 세계금융위기 당시 급등했던 환율이 정상화되는 과정이며 현재의 환율은 역사적 평균이나 경상수지 기준으로 보았을 때 지나치게 낮다고 할 수 없다. 올해 경기 전망이 어둡고 저인플레이션이 염려되는 상황에서 경기부양을 위한 저금리와 환율 상승 유도 정책의 매력이 증가하고 있지만 국제금융시장의 불안이 고조될 가능성이 높은 2015년은 정책 선택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때다.
(1) OECD-WTO (2013), Trade in Value-added, http://stats.oecd.org/.
(2) <그림 1>은 무역의존도가 90년 중반 이후 증가 추세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생산 공정이 여러 국가로 분산되는 수직적 특화가 심화됨에 따라 중간재의 수출과 수입이 동시에 증가하는 현상에 기인된 부분이 크다. 그러나 총부가가치의 최종수요 항목별 구성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도 환율 상승 이후 급증하는 경향이 관찰된다(한국은행 산업연관표 각 년도 통계표).
(3) 이에 더해 엔저가 한국의 수출에 미치는 영향이 2000년 이후 반감했다는 연구도 있다. Ree, J. and S. Choi (2014), “Safe-Haven Korea? – Spillover Effects from UMPs,” WP/14/53, International Monetary Fund.
(4) Cline, William R. (2014), Estimates of Fundamental Equilibrium Exchange Rates, November 2014, Policy Briefs in International Economics, Peterson Institute for International Econom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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