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귀국 사흘 째 침묵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문창극 국무총리 내정자는 23일 퇴근길에 기자들과 만나 사실상 사퇴할 뜻이 없음을 드러냈다. 문 내정자는 지난 19일 부터 주말을 제외하고 매일 퇴근길 '기자 간담회'를 자청하고 있지만, 이날은 자신의 조부가 독립유공자라는 언론 보도에 대해 짧게 설명한 후 질문을 더 이상 받지 않은 채 자신의 승용차를 타고 자리를 떴다.
앞서 문 내정자는 박 대통령의 국무총리 지명 후, 국가보훈처에 독립 유공자 문남규 선생이 그의 조부와 동일 인물인지 여부를 문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 내정자 사퇴론이 비등한 민감한 시점에 보훈처는 "대한독립단 대원으로 활동한 애국지사 문남규(文南奎) 선생과 문 내정자의 조부가 동일 인물인 것으로 보인다"고 이날 밝혔다.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거의 확실하다는 취지다.
문 내정자는 이와 관련해 "이 문제는 저의 가슴 아픈 가족사이고, 또 저의 조부님의 명예가 걸린 사안이다. 그래서 이 문제는 저희 가족이 해결해야 할 문제다. 따라서 국가보훈처도 법 절차에 따라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른 케이스와 똑같이 (조부와 문남규 선생이 동일 인물인지 확인 작업을) 공정하게 처리해주길 바란다. 감사하다"고 말한 후 자리를 떴다. 거취와 관련한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졌지만 문 내정자는 "나중에"라고 말한 뒤 황급히 자리를 떴다.
결국 문 후보자는 이날도 자진사퇴를 거부하고 '조부 독립 유공자' 문제를 띄우며 버티기를 시도한 셈이다. 청와대도 이틀 간의 자진사퇴 설득에 실패한 뒤 여론 추이를 살피는 '눈치보기'에 돌입한 분위기다.
사의를 표명한지 59일 째인 정홍원 국무총리는 오는 24일 오전에도 직접 국무회의를 주재할 예정이다. 문 내정자를 두고 박 대통령의 장고가 길어지는 정부는 '식물 총리' 주재의 국무회의를 두 차례나 열게 되는 셈이다. 새누리당의 입장도 뚜렷하지 않다. 박 대통령의 침묵에 대해 제각각 해석을 내리며 여전히 청와대 눈치만 보고 있다는 지적이다.
與에서도 다시 고개 드는 '문창극 사퇴 불가' 여론
새누리당의 기류는 '문창극 불가론'이 여전히 많지만 "청문회에서 소명할 기회는 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이날 오전 열린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회 비공개 회의에서도 문 내정자와 관련해선 언급이 전혀 없었다. '입단속'에 나선 것이다. 박대출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인사청문회라는 법이 정한 제도적 장치가 엄연히 존재하는 만큼 이를 통해 국민이 냉철하게 후보자를 판단할 기회는 반드시 주어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친박 핵심 인사 중 한명인 홍문종 의원은 '새누리당의 입장은 문 내정자 불가인가'라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 저도 청문회를 하는 게 원칙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 변희재 미디어워치 대표, 고영주 변호사 등 보수 인사들과 개신교 목사, 장로, 전도사 등 종교인 482인이 주말에 낸 문 내정자 지지 성명을 기점으로 여론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홍 의원은 "지난 주말까지만 해도 바깥에서 여론이 썩 좋다고 볼 수 없었다. 그런데 보수 언론인들이 성명을 내고 '마녀 사냥식 인권 살인이 아니냐'고 말을 한 후에 국민 여론이 '청문회 정도는 해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변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홍 의원은 "대통령도 그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많이 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홍 의원은 "일방적으로 여론이 문창극 내정자를 매도해 (문 내정자가) 불리했다. 그런데 문 내정자가 독립운동가 후손이기도 하고, 진의가 왜곡됐다고도 하고, 많은 분들이 좋은 분들이라고 해서 그렇다면 청문회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 실질적으로 여론이 그 쪽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 18일 홍 의원이 "국민 여론을 다시 바꾸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며 문 내정자의 결단을 촉구한 것과 관련해 "나는 청문회가 원칙이라는 데에서 한번도 물러난 적이 없었다. 문 후보자가 명명백백하게 해명해야 한다는 취지의 말이었다"고 설명했다.
홍 의원과 함께 전당대회 출마를 선언한 김태호 의원도 이날 성명을 내고 "문창극 내정자의 인사청문회를 열어야 한다"며 "이것이 민주 절차를 지키는 것이며 국격을 높이고 성숙된 사회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심각한 레임덕, 조기에 올 수도 있다"
야당은 박 대통령의 지명 철회를 연일 요구하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안철수 공동대표는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대통령에게 결자해지하시라고 제안한다. 잘못된 인사를 철회하시라"고 주장했고 김한길 공동대표도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고 말하고 용서를 구하는 게 국민에 대한 도리"라고 주장했다.
김효석 최고위원은 "박 대통령이 국민과 다른 길을 가려고 하면 정치적, 사회적으로 고립돼 심각한 레임덕이 조기에 올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문 내정자 인사청문특위 위원장에 내정된 박지원 의원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새정치연합) 내부적으로 강한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청문회가 열리면 문제점이) 몇 가지가 더 밝혀질 것"이라며 "물러나신다고 한다면 새정치민주연합에서도 조용히 물러나게 해드리겠지만 청문회를 하게 된다면 엄격히 하겠다"고 밝혔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