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범죄가 늘어 걱정이라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린다. 청소년 범죄에서 강력 범죄의 비율이 높아지고 재범률이 높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위험한 10대'를 묘사하는 보도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를 깊이 있게 탐색하는 시도는 그리 많지 않다.
<프레시안>은 법률구조와 사회 복지를 결합해 이 문제를 풀어갈 것을 제안하는 김익태 변호사(법무법인 도담)의 글을 게재한다. 김 변호사는 미국 변호사로서 미국 형사 법원에서 국선 전담 변호사로 활동하며 청소년 범죄를 비롯한 다양한 범죄를 접했다. 귀국 후 헌법재판소 헌법연구원을 지냈고, 현재 통상교섭본부 민간자문위원과 인하대 법학 전문 대학원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2012∼2013년 론스타와 ISD, FTA 문제를 집중 조명하는 연재를 진행하기도 했다(☞ 론스타 연재 바로 가기). <편집자>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나서야 한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이를 인용해, 1996년 힐러리 클린턴은 <마을이 나서야 한다(It takes a village)>라는 책을 출간했다. 청소년 문제와 자녀 교육이 얼마나 중요하며 또한 힘든 일인가를 말하고 있다.
요즈음 우리나라에서도 이 문구를 청소년 문제에 관한 기획 행사의 제목으로 종종 쓰는 걸 봤다. 저출산 현상으로 인해 사회적 재화가 청소년에게 좀 더 집중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며, 역설적으로 이전보다 청소년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왕따, 일진을 넘어 성매매와 흉악 범죄로까지 발전하는 청소년 범죄를 저소득 결손가정의 문제로만 치부하며 일벌백계와 사회적 격리라는 엄정한 잣대를 들이댄다면 우리 사회의 미래에 희망이 있을까? 혹은, 청소년 범죄 문제는 궁극적으로 사회 내부의 모순에 기인한 것이므로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면 자연스레 해결될 일이라고 부차적 의미만을 부여한다면 너무 무책임한 태도는 아닐까?
청소년 범죄자는 많은 경우 사춘기 청소년이다. 사춘기는 반항, 자유 그리고 혁명의 시기이다. 어른들이 그들을 어른의 영역에 적대적인 존재로 바라보는 지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힘이 없고 순종적이기만 한 아이들이 어떻게 다음 세대를 위해 보호자가 되며 법을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이 지점에 청소년 범죄 문제를 바라보는 다른 시각이 존재한다.
청소년 범죄 문제 해결의 출발점은 공정한 법적 절차 확보
소년범이라고도 불리는 청소년 범죄자는 일반 성인 범죄자와는 형사 절차를 통해 추구하는 목적이 다르다. 청소년 범죄자에 대한 형사 처분의 목적은 사회적 격리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교화를 지향하는 것이다. 아직 어린 나이의 청소년들을 교화해, 그들이 성인이 됐을 때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편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적·경제적 효용성을 위함이며 동시에 아직 어린 사회 구성원에 대한 인간적 배려이기도 하다.
청소년이라는 대상의 특수성과 청소년 형사 절차의 궁극적 목적을 이해한다면, 청소년 형사 사건에 대한 접근은 법적 보호와 복지적 접근을 동시에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충실한 변호를 통해 청소년 피의자의 법적 권리를 확보해 주었다고 하더라도, 무죄 방면된 청소년이 이미 망가진 가정에 돌아가지 않고 길거리를 떠돌다 다시 잡혀오는 일은 흔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미국 형사 법원에서 퍼블릭 디펜더(Public Defender, 국선 전담 변호사)를 하면서 느꼈던 비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변호사 윤리강령에 의하면 변호사 윤리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사회적 윤리와는 다소 차별성이 있는 경우가 있다. 반인륜적 패륜 범죄자라고 하더라도 헌법이 보장한 권리의 객체로 인정하고 변호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변호사는 자신의 변호 업무에만 충실하면 그만이다. 다른 사람의 삶에 섣불리 개입하려 할 때 오히려 오류를 범할 수 있다.
하지만 매번 최선을 다해 법률적으로 변호해준 의뢰인이 얼마 후 다시 범죄에 연루돼 법원으로 송치되어 돌아오는 상황을 목도할 때마다 개인적으로 변호사라는 직업에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성인 범죄자의 경우도 그러한데, 하물며 청소년의 경우는 어떻겠는가.
이런 점에서 볼 때, 청소년 범죄 문제의 해결은 법적 보호와 사회복지적인 치유가 융합적으로 결합되어야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쳇바퀴 돌기를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시작은 법적 보호이다. 청소년 법률구조의 문제를 지나치게 복지의 관점으로만 접근한다면, 청소년을 헌법이 보장한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교화와 선도의 대상으로만 전락시킬 위험성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법률가로서 볼 때, 청소년 범죄 문제 해결의 출발점을 일차적으로는 공정한 법적 절차 확보에서 찾고 싶다. 청소년 범죄자는 지적 능력이 성인에 비해 떨어지고 성인에 대한 두려움이 내재해 있다. 그 때문에 강압 수사나 불공정한 형사 절차의 피해자가 될 소지가 크다. 청소년 범죄 사건은 자백이 유일한 증거인 경우가 많으며, 이는 불공정한 수사와 인권 침해의 위험을 안고 있다. 방송을 통해 의심이 제기돼 2013년 재수사를 개시한 2000년 익산시 택시 기사 살해 사건이나,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난 2007년 수원시 노숙 소녀 살해 사건들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일요일 아침의 살인>에 담긴 교훈
브렌튼 버틀러(Brenton Butler)는 플로리다 잭슨빌에 사는 평범한 15세 흑인 고등학생이었다. 일요일 아침 여느 때와 같이 강아지에게 아침을 주고, 동네에 있는 비디오 가게에 '알바' 신청서를 내기 위해 걸어가고 있었다.
한데, 마침 인근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관광객 부부를 상대로 강도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한 흑인 청년이 갑자기 나타나 눈앞에서 아내의 핸드백을 빼앗으면서 아내를 총으로 쏘고 달아나는 것을 목도한 남편은 '범인은 어린 흑인'이라고 경찰에 신고했다. 주변을 순찰하던 경찰은 때마침 비디오 가게를 향해 걸어가고 있던 브렌튼 버틀러를 체포한 후, 남편에게 인상착의를 확인시켰다. 남편은 비슷한 것 같다며 소년을 살인범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소년에게서는 총도 핸드백도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은 소년의 집을 수색하지도 않았으며, 소년의 부모에게도 연락하지 않은 채 소년을 심문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소년은 경찰에게 얼굴을 가격당하고, 자백을 강요당했다. 겁에 질린 소년은 결국 자신이 살인범이라고 자백하고, 경찰이 직접 작성한 진술서에 사인하게 된다. 졸지에 살인범이 된 것이다. 하지만 수사 과정에서 있었던 강압과 인종차별 등을 예리하게 파헤친 국선 전담 변호사의 노력으로 소년은 배심원 재판에서 누명을 벗고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 후 진범이 잡혔고, 소년은 경찰을 상대로 피해 보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다.
이 모든 과정을 필름에 담은 이 다큐멘터리는 2002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장편 다큐멘터리 상을 받았다. 선진적이라고 인정받는 미국의 법조 시스템에도 이러한 한계가 노정되었다는 점과, 그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 시스템이 고안한 국선 전담 변호사의 역할이 한 억울한 소년의 일생을 바꾸는 실화를 담은 이 필름은 그 감동과 함께 한국 사회 청소년 법률구조에도 작은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국선 변호사의 활약이 없었다면, 다큐멘터리 속의 소년은 누명을 뒤집어쓴 채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평생을 살인범으로 감옥에서 보내야 했을 것이다. 미국 헌법 수정안 제6조는 변호인 선임의 권리를 보장해 준다. 이에 근거해 미국의 국선 변호 제도가 존재한다. 미국의 국선 전담 변호사들은 '범죄자들에게 왜 국가가 세금을 들여 변호를 해주느냐'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으로 그 규모를 달리하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예산 확보의 어려움 때문에 격무에 시달리며 양질의 법률 서비스를 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한국 현실과 비교하면 여전히 선진적인 법조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저소득 청소년 피의자
미국의 사회·경제 시스템을 많이 차용한 우리 사회는 어떤 점에서 볼 때 미국 사회의 이슈들을 시간차를 두고 비슷하게 닮아가고 있다. 사법 구조의 문제만 놓고 보더라도, 무전유죄 유전무죄 식의 억울한 형사범을 더 이상 양산하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지난 몇 십 년간 꾸준히 제기돼 왔다. 이에 사법부는 국선 전담 변호사 제도를 두고 형사 사건 피의자의 법적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나름대로 애써왔다.
하지만 이 제도가 도입된 지 얼마 되지 않고 아직은 양적으로 미미해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런 가운데, 사회의 미래인 청소년들이 벌이는 형사 사건은 급속히 늘고 있다. 그러나 성인 형사범에 대한 법률구조도 충분히 자리 잡지 못한 우리 현실을 감안할 때, 청소년 법률구조가 현재 어느 수준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앞서 소개한 <일요일 아침의 살인>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시사하는 것처럼, 선진국인 미국에서조차 아직 부(不)정의한 형사 절차가 존재하는 마당에 대한민국의 형사 절차가 얼마나 공정하고 준법적인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존재한다.
법적 가치는 인간의 실천적 노력 없이는 현실에서 실현될 수 없다. 미란다 원칙이라 불리는 형사 사건 피의자의 권리가 영화상의 가상현실 밖에서 얼마나 실현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고등교육을 받은 성인도 행사하기 쉽지 않은 권리를 청소년들이 행사할 수 있을까? 법치주의를 지향하는 우리 사회가 경제적·민주적 성장이라는 아픈 희생의 시간을 거치면서 절차적으로 확보한 형사 정의가 사회 저변에까지 미치고 있다고 말하기는 아직도 어려울 것 같다.
그리고 그 저변의 한 귀퉁이 사각지대에 청소년들이 놓여 있다. 청소년 법률구조 사업의 출발선이 거기에 있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게 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함이기도 하며, 사회 비용을 줄이기 위함이기도 하다. 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헌법과 법률로 규정한 우리 사회의 법적 가치를 미래의 주인인 청소년들에게 실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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