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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 스스로 '군주' 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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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 스스로 '군주' 될 수 있겠습니까?

[프레시안 books]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의 <공통체>

나는 왜 네그리와 하트의 글을 읽는가?

1990년대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더불어 자본주의 체제가 승리를 선언하고 있던 그 시절, 87년 6.10 민주항쟁의 성과로 '위로부터 진행된 수동혁명'이 신자유주의 지구화와 본격적으로 결합되어가던 바로 그 시절, 그리하여 자본의 경제 권력이 정치 권력을 압도해 갈 뿐만 아니라 한국의 대중 소비 사회가 본격화되면서 탈정치화되어가고 있던 그 시절, 한편에서는 자유주의와 결합된 시민사회론이 자유경쟁-시장경쟁의 논리와 은밀한 공조를 형성하고 있던 그 시절, 각종 '포스트' 담론은 80년대 운동에 대한 사후복수의 정념과 니힐리즘적 전망 속에서 한국의 지적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 시대를 거쳐, 많은 한국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그러했듯이 나 또한 소위 포스트 이후의 담론들이라고 할 수 있는 들뢰즈-가타리, 랑시에르, 바디우와 지젝, 발리바르 등의 글을 읽었다. 나는 이들의 글을 통해서 암울했던 '1990년대'(정태춘은 1994년에 이 시대를 천박한 시절이라고 명명하는 노래 '건너간다'를 불렀지만 그로부터 20년 후 2014년 다시 우리는 '응답하라, 1994'를 보고 있다.)를 헤쳐갈 수 있었다. 그들의 사유는 분명 새로운 길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항상 이들에게서 현대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정치경제학비판'이라는 지평을 발견할 수 없어서 아쉬웠다.

<제국>(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지음, 윤수종 옮김, 이학사 펴냄). ⓒ이학사
마르크스는 청년 시절, 그 당시의 철학과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적인 사유라는 철학으로부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 그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거쳐 '코뮌'의 지평으로까지 자신의 인식을 구체화하고 확장하였다. 그러나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는 페리 앤더슨이 진단하고 있는 것처럼 이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아마도 제2 인터내셔널과 그 쌍생아로서 스탈린주의 소위 '정통'의 이름으로 정치경제학을 지배하는 '경제주의'였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 비판적 사유와 작업은 '정치경제학'이 아니라 '철학적 사유'로 향했다. 그것은 현재 알튀세르 이후 전개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 외부에서 마르크스의 정신을 혁신하는 작업을 추구하는 비판적 작업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자주 '멍청아, 문제는 정치경제학이야!'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조차 '리비도의 경제학'이 아닌,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분석이나 연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이들 논자들 중에 '정치경제학'과 철학적 사유의 지평을 연결하고 있는 비판적 지성이 있다면 그것은 네그리와 하트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사유는 <제국>(윤수종 옮김, 이학사 펴냄), <다중>(정남영·서창현·조정환 옮김, 세종서적 펴냄)에서 보듯이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분석과 연구를 근거로 하여 스피노자-들뢰즈의 사유를 '자본과 국가 너머의 세상'이라는 실천적 사유로 발전시키고 있다.

적어도 이 지점에서 나는 네그리와 하트가 우리에게 회자되는 '포스트 이후의 담론들' 중에서 가장 마르크스적인 정신에 충실한 사유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네그리와 하트의 글을 읽는 이유, 또 <공통체>라는 책의 번역 출간이 반가운 이유이다. 이번에 번역 출판된 <공통체>(정남영·윤영광 옮김, 사월의책 펴냄)는,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전 지구적 제국의 출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제국>이나 네트워크적 제국화가 이에 대항하는 역사적 존재로서 '다중'의 출현을 가져온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다중>과 달리 변혁 주체로서 다중의 사회조직화, 제도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중의 철학자: 공통적인 것의 전면화와 생성으로서의 전복적 운동

<공통체>(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지음, 정남영·윤영광 옮김, 사월의책 펴냄). ⓒ사월의책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의 사유를 명명한다면 나는 그들에게 '다중의 철학자'라는 이름을 주고 싶다. 스피노자에게 다중은 존재론적 사유의 차원에서 진행된다. 그러나 네그리와 하트의 정치경제학적 비판은 다중에게 역사적 존재로서의 형상을 부여한다. 산업사회에서 탈산업사회, 정보사회, 네트워크사회로의 변화라는 기술적 구성의 변화와 사회적 구성의 변화, 그리고 '비물질 노동 헤게모니'와 관련된 '다중'의 출현은, 마르크스가 찾고자 했던 해방의 주체로서 프롤레타리아라는 존재의 현재화이며 그 존재에 대한 네그리-하트의 현대적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제국에 대한 그들의 논의가 그러했듯이 그들이 말하는 다중에 대해서도 다양한 비판들이 제기되어 왔다. 그 중에서도 다중의 이중성이라는 존재론적 특징에 대한 논란과 정치-조직화의 문제, 그리고 주체화 전략의 부재나 힘을 구성해가는 정치의 장에서 헤게모니 전략이 없다는 비판이 주를 이룬다. <공통체>는 이런 비판들에 대해 네그리-하트가 답변하는 듯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책이다. 물론 이런 답변이 성공적인가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하지만 네그리와 하트가 이번 책에서 "공통적인 것을 위한 기획", "새로운 사회조직화 양태를 제안"할 수 있는 "교부학", "다중에게 적절한 정치적 조직화의 이론", "혁명을 다스리는 민주적 조직화와 결정의 논리"에 대해 줄기차게 말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네그리와 하트의 전 저작들을 관통하는 핵심 코드는 '공통적인 것의 생산'과 그것을 생산하는 '다중의 역량'이다. 그리고 이 속에서 그들은 자본과 국가 너머의 대안세계, 코뮤니즘의 실천적 기획을 찾아가고 있다. 이것은 마르크스식으로 말하자면 '생산의 사회화와 사적 소유의 모순', 네그리-하트가 전통적인 표현으로 규정하고 있는 "점점 더 사회적인 성격을 띠는 생산 네트워크와 사적인 형태의 축적 사이의 갈등"을 읽어가면서 그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 '자본과 국가 너머의 주체'를 찾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점증하는 모순과 갈등의 양상들을 다루면서 부르주아적 생산의 논리인 노동가치론의 와해와 민주주의의 실패, 새로운 정치, 다중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찾는다.

그들이 <공통체>의 후반부인 4~6부에서 "공통적인 것의 민주주의"라는 화두를 제출하고 "특이성과 다중, 그리고 혁명의 제도적 구성"을 다루는 것은 이 때문이다. 네그리-하트 사유는 내재론이며 이런 내재성의 철학은 오늘날 지구화가 낳은 주된 효과가 "공통적인 세계의 창조"이며 "좋든 나쁘든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세계" 외부는 없다는 현실에 기초한다. 여기서 '공통적인 세계를 창조'하는 것은 다중이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이 보고 있는 세계는 신자유주의 지구화라는 세계이다. 이 세계에서 '공통적인 것'은 자본과 국가의 지배력으로 전화되며 '외부가 없다'는 명제는 현재의 상황이나 삶의 상태를 받아들이고 살아가라는 숙명론적 테제로 전화한다. 오늘날 니힐리즘적이고 묵시론적인 비판은 이런 지평 위에서 작동한다.

그러나 네그리와 하트는 니힐리즘적 비판을 자신의 자양분으로 삼으면서도 거기에 멈추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늘날 자본과 국가의 막강한 권력 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외부'가 더욱 더 전면적이고 가시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네그리와 하트가 오늘날 세계를 그려내는 방식은 항상 이중의 궤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권력/역능, 자본-국가/다중, 지배/저항이라는 궤적이다. <공통체>의 전반부(1~3부)에서 다루고 있는 공화국, 자본, 근대성에 대한 분석은 바로 이런 이중의 궤적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 그것은 하나로 체계로 수렴되지 않는다. 소유의 공화국, 자본주의적 근대성, 수탈적 금융자본이라는 지배의 틀에 저항하는 빈자 다중, 대안근대성, 삶 정치적 생산과 같은 대안들 또한 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지배/저항'이라는 이중의 쌍은 네그리와 하트의 사유가 가진 독특성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앞에서 말한 '다중의 철학자'라고 명명할 수 있는 특징은 '지배가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는 기존의 관념을 역전시키고 있는, '저항이 먼저이고 지배는 그 다음'이라는 주장이다. 그들은 '지배'가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중의 삶-역량'이 먼저 있었으며 지배는 언제나 현재를 초과하는 다중의 삶-역량 때문에 출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들은 '지배에 대한 저항'이라는 기존의 관념이 낳을 수 있는 효과로서 부정성과 수동성, '분노와 원한 감정'에 기초한 운동 양식들을 해체한다. 대신에 그들은 다중의 내재적인 역량과 힘, 생성으로서의 삶(생명)에 대한 긍정에서 출발하는 '생성, 되기(becoming)'로서의 혁명을 제안하고 있다. 또한, 그들이 다중민주주의에 대해 말하면서는 "탈거(emancipation)"와 "해방(liberation)"을 나누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래의 기획: 다중의 군주되기와 구성적 협치

오늘날의 자본과 국가가 창출하는 내재성의 장은 그 외부가 없는 유일무이한 체계처럼 보이지만 그 내재성을 만들어내는 은폐된 힘은 다중의 '공통-되기'와 창조적 능력이기 때문에 '공통적인 것'과 자본 간의 갈등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특히, 탈산업사회-정보사회로의 변화는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 공장의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물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의 협력과 네트워크를 창출하기 때문에 다중의 역량은 보다 전면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신자유주의 소유공화국은 점점 더 네트워크화하는 다중의 역량을 순치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 다중의 '살(flesh)'을 제국의 신체로 바꾸어 놓기 위해서 '제국적 협치'를 작동시킨다.

사실, 자본이나 국가 권력의 원천은 '다중의 창조적 능력'이다. 모든 존재가 그러하듯이 다중은 각각의 고유한 특이성을 가진 존재들이지만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즉 서로가 차이 나기 때문에 협력을 추구한다. 만일 우리가 차이 없이 동일하다면 우리는 서로 협력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다중의 특이성인 '공통-되기(becoming-common)'를 통해서 '공통적인 것(the common)'을 생산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다중의 삶을 통제하는 제국의 생체권력(bio-power)은 자신의 창조적 능력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다중의 삶 정치적인 것(bio-political)에 대한 방해-저해 요인이 될 수밖에 없으며 부패할 수밖에 없다.

<다중>(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지음, 정남영·서창현·조정환 옮김, 세종서적 펴냄). ⓒ세종서적
바로 이 지점에서 네그리와 하트는 '공통-되기'의 그 '되기'라는 생성의 특징을 따라 "다중으로 존재하기(being the multitude)에서 다중 만들기(making the multitude)"로 문제의식을 이동시킨다. 다중 만들기는 차이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차이에 기초하여 합성(composition)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합성으로서의 사랑"에 근거하고 있는 "주체성 생산의 모델"을 제안한다. 물론 이런 사랑은 "사랑의 훈련"을 필요로 하며 제도화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바로 다중의 혁명이 단순한 분노와 원한 감정에서 나오는 파괴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다중의 역량에 따라 건설하고 창조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그들은 '다중의 군주되기'에 대해 말한다.

'다중의 군주되기'란 "다중이 자치 기술을 배우고 영속적인 민주적 사회조직 형태들을 발명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 스스로 '공통적인 것'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사랑의 훈련', '행복의 제도화', '자치의 훈련'은 바로 이런 다중의 군주되기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다중의 군주되기는 그람시의 '현대군주'로서의 당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의 특이성, 생명적 힘의 활력을 따라 "특이한 주체성들을 공통적인 것 속에서 합성함으로써 스스로를 창조"하는 다중의 존재론적 특징을 따라 이루어지는, '제국의 협치'를 전복하는 "구성적 협치"를 수행하는 다중의 민주주의에서 주체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구성적 협치'란 끊임없이 흘러넘쳐서 흐르는 활력들이 공통적인 것의 민주주의를 향해 올라가고 그것이 "제헌의 차원"으로 만들어지는, 즉 제도적이고 구성적인 의지, 법의지로 만들어가는 다중의 민주주의를 발명해내는 것이다. 따라서 '다중의 군주되기'란 이런 제도화의 과정 속에서 "행복의 상태를 창출하기 위해서 그 스스로를 다스리는" "민주적 결정능력의 함양"과 "자치의 훈련", 곧 자치의 힘을 확대하는 학습 메커니즘으로서 민주주의를 만들어가면서 "행복을 제도화하는 과정”을, 그 스스로 떠맡는 주체화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나는 이런 그들의 주장들에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며, 어떤 면에서는 그들과 상반된 지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유는 '다중의 철학자'라고 이름을 부여하기 아깝지 않을 정도로, 다중의 존재론적 특성과 내재성의 지평 위해서 다중의 주체화 전략, 다중의 민주주의와 제도화까지 하나의 수미일관된 '자본과 국가 너머의 세상'에 대한 방향을 제공하고 있다는 데 주저 없이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들이 제안하는 사유와 길 찾기에 대해, 더 나아가 그들이 제시하는 다중의 민주주의와 주체화의 짐에 대해, 평가하고 떠맡는 것은 결국 독자의 몫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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