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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 출신 가난뱅이 日 총리가 보여준 '진심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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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 출신 가난뱅이 日 총리가 보여준 '진심의 정치'

[이 주의 인물] 아흔의 노정객, 무라야마 도미이치

제1여당 자민당 간사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무라야마 총리가 국책을 그르쳤다. 정부와 여당이 같은 행보로 나가야 한다"고 했다. 일본의 침략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내용의 이른바 '무라야마 담화'가 발표된 후인 1995년 8월 23일, 당시 무라야마 내각의 최대 주주 자민당은 불쾌한 감정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그는 1994년 6월부터 1996년 1월까지 자민당, 사회당 등의 연정으로 탄생한 무라야마 내각에서 일본 총리로 재임했다.

1995년 8월 15일 일본의 전후 50주년 '종전기념일'에 발표된 '무라야마 담화'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긴 하지만, 발표 당시 주변국들은 박수를 치지 않았다. 1993년 고노 담화에서는 언급됐던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내용에서 빠졌고, 핵심 메시지도 선언적 사과 수준에 그쳤다. 한국, 중국, 대만 등에서는 "아름다운 용어가 구사됐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행동"이라는 지적들이 잇따랐다. 또 담화문이 발표될 시점에 일본 각료 10명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것은 사실상 무라야마를 망신주겠다는 의도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주변국들을 자극하기에 더없이 좋은 일을 저지른 셈이다.

이후 일본 정부의 처신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무라야마 총리는 사과 담화를 발표해놓고도 배상과 보상, 재산권 청구 문제 등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물론 이는 일본 주류 정치권의 한계이자, 당시 '자민당 연정 내각'의 한계일 수밖에 없었다. 자민당 유력 인사들은 이 담화를 '총리 개인의 돌출 행동'으로 축소시키려고 노력했다. 일본 내각의 사회당 개혁파와 자민당 보수파의 갈등은 상당히 심각했다. 애초 그가 본인의 소신을 일본 정치권 전체에 관철시키려 한 부분이 무리였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담화 발표 이후 발생한 정치적 위기를 잘 돌파해냈다. 정치인 무라야마의 저력이다.

▲ 김영삼 대통령과 무라야마 일본 총리가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주변국들의 평은 박했지만 일본 내에서는 신선한 것이었다. '담화'는 내각의 각료들이 모두 합의했다는 것을 전제로 발표되는 형식이기 때문에 그 의미가 적지 않았다. 특히 일본이 과거의 행동을 '침략'으로 명시한 부분은, 당시 일본을 국제 사회의 책임 있는 '선진국'으로 포장할 수 있게 된 계기로 작용했다. 과거사에 대한 사과가 되려 일본의 외교적 활동 공간을 넓히고,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목소리를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무라야마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 한국, 중국, 대만을 제외한 다른 국가에서는 '환영' 성명이 꽤 나왔었다.

무라야마 담화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서라도, 총리 후보군 근처에도 못 가봤던 일개 사회당 정치인 무라야마의 독특한 개인사가 빚어낸 이 '투쟁'이, 일본과 국제 사회를 얼마간 흔들었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그는 '반전주의자'였다. 일본 정부의 반응과 별도로 그의 개인적 신념 자체는 의심할 필요가 없는 수준이다. 정략이 난무하는 일본 정치권에서 순수한 캐릭터로 남아 있는 몇 안되는 인물이다. 역대 일본 총리 중 유일하게 일반 병사로 침략 전쟁에 참여한 경험을 갖고 있는 그의 이력도, '무라야마 담화'를 만들어낸 그의 사상의 일부분이 아닐까.

어부 출신 가난뱅이 日총리, 사회당 당수가 국가수반 된다면?


긴 눈썹이 트레이드 마크인 무라야마는 사회당이 캐릭터 인형을 발매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무라야마 총리 이후 부모가 정치인이 아닌 총리는 2010년 간 나오토 전 총리가 등장할 때까지 없었다. 정치 명문가 자제도 아니고, 유력 정당 소속도 아닌, 평범한 일본인 노동자 출신 총리, 그를 수식해 주는 말들은 많다.

아베 신조 현 일본총리처럼 정치 명문가들의 정계 진출, 지역구 대물림이 많은 일본에서 가난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 총리의 자리에까지 오른 무라야마의 이력은 여러모로 독특하다. 일본 각료들에 대한 자산 공개 제도가 시행된 1987년 이후, 그는 역대 가장 가난한 총리라는 별칭도 얻었다. 여름 휴가를 가지 않겠다며 "나는 연중 무휴인 어부 출신"이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회자된다. 지역을 방문하며 "민박에 묵고 싶다"고 말하자 담당자가 민박을 알아봤는데, "총리가 묵고 싶다고? 농담은 그만 해달라"는 말을 들었다는 일화 등은, 그를 대중 친화적 정치인으로 만들었다.

▲ 일본 사회당이 발매한 무라야마 전 총리의 캐릭터 인형 '재치짱 인형'. ⓒpark.geocities.jp

무라야마는 다이쇼 시대(1912~1926) 끝자락인 1924년 3월 3일, 일본 규슈 섬 오이타현 오이타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1형제 중 6남이었다. 나카지마 소학교와 오이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38년 도쿄로 상경했다. 낮에는 기계공장, 밤에는 인쇄소에서 일을 하면서도 도쿄시립상업학교를 야간학부를 다니며 공부를 놓지 않았다. 1943년 메이지 대학 정치경제과에 입학했지만, 1944년 동원령이 떨어지면서 이시카와섬 조선소에 배속됐다가 같은 해 육군 보병에 이등병으로 입대한다. 1945년 8월 15일, 간부 후보생으로 패전을 맞아 중사 계급으로 전역을 했다.

1946년 메이지 대학을 졸업한 무라야마는 '운동'에 뜻을 품고 고향에 내려간다. 어촌마을 청년동맹 서기장으로 일을 하며 어업협동조합을 만들었고, 이후 오이타현 직원노조위원장을 맡았다. 1951년 오이타현 시의회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 4년 간의 절치부심 끝에 1955년 사회당 후보로 당선된다. 그의 나이 서른 한 살이었다. 이후 1972년 마흔 여덟의 나이로 중의원 선거에서 당선돼 중앙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총 7선을 하게 된다.

무라야마가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것은 자민당-사회당 연정으로 총리직에 올랐을 때다. 그는 총리가 된 직후 첫 외교 무대에서 "외국어를 못해 걱정된다"는 심경을 토로했을 정도로 중앙 정치나 외교 무대 경험이 많지 않았다. 당시 주변 참모가 "통역이 있으니 괜찮다"고 그를 안심시켰다는 일화도 있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그의 개인사를 접한 후 호감을 느꼈다는 얘기도 나온다.

1993년 무라야마는 일본 사회당 당수가 되지만, 그가 일본의 총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듬해인 1994년, 일본의 정치 상황은 복잡했다. 일본의 침략 사실을 인정하고 한국과 무난한 관계를 이어갔던 호소카와 총리가 정치 자금 파동으로 사퇴한 후 자민당은 분열하기 시작했다. 결국 비자민당 연립 정권인 하네다 내각이 출범했지만 법무부장관이 취임 직후 "난징 대학살은 날조"라고 발언하는 등 정치적 '자살골'을 넣은 끝에 결국 단명하게 된다.

이후 합종연횡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비자민당 세력과 각을 세웠던 사회당과 자민당이 연합 전선을 구축한다. 자민당 내부의 파벌 싸움 등으로 사회당의 무라야마가 결국 총리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점이 흥미롭다. 당시 자민당 안에서도 "사회당 당수 출신 총리는 안된다"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복잡한 정치 상황은 무라야마를 대안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1947년 카타야마 내각 이후 47년 만에 사회당 수반 내각이 탄생한 것이다. 또한 무라야마는 1955년 자민당 창당 이후 2010년 6월 민주당의 간 나오토 총리가 취임하기 전까지 자민당 당적을 보유하지 않은 유일한 총리로 기록되고 있다.

▲ 무라야마 총리가 담화문을 발표한 다음날 <경향신문> 1면. ⓒ경향신문 지면 캡처

그러나 '사회당원' 무라야마의 '변신'은 예정돼 있었다. 당시 일부 외신이 "일본에 공산주의 정권이 탄생했다"고 보도해 일본 내에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연정을 통해 국가를 직접 운영한다 것 자체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총리에 취임한 직후 1994년 7월 무라야마는 의회 발언을 통해 "자위대 합헌", "일미 안보 견지" 등 기존 사회당의 '입장'을 변화시켰다. 연설용 원고에 "일미 안보 유지"로 돼 있던 것을 "일미 안보 견지(堅持)"로 바꿔 읽은 부분을 두고 "일본 사회당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했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이런 행동들은 미국 등 서구 동맹국의 의심을 털어내는 계기가 됐다. 또한 원전 반대 입장에서 후퇴, 일부 원전 정책 유지의 불가피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미나마타병 문제 등 일본 환경 문제나 나리타 공항 반대 주민 문제 등 사회적 이슈에서 진보적이 정책을 관철시키기도 했다. 정치에 있어서도 그는 아마추어가 아니었다. 사회당 당수 출신으로 1년 반 동안 무난히 총리직을 수행한 것은 그의 정치력이 주요했다는 분석이다. 주변국 문제에서도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일본의 역대 어느 정권보다도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 무라야마 전 일본 총리가 12일 국회를 방문해 위안부 피해자와 손을 잡고 있다. ⓒ연합뉴스

영화배우, 아시아기금 이사장 등으로 왕성한 활동

무라야마는 2000년 정계 은퇴를 선언한 후 각종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총리 재임 시절 발족시킨 민간 기구 여성을위한아시아평화국민기금 이사장을 지내기도 하면서 일본의 침략 역사에 대한 올바른 정보 전달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02년에는 세계 대전 참전 후 슬픔을 안고 살다 죽음을 앞두게 된 노인 역으로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를 포함해 총 두 차례 영화에 출연한 '영화 배우'이기도 하다. 정계를 은퇴한 뒤에도 무라야마 담화와 고노 담화 부정 세력 등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꾸준히 내고 있다.

무라야마가 지난 12일 아흔의 노구를 이끌고 한국을 방문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근래에 보도된 최고의 정치 사진 중 하나였다. 그는 국회에서 열린 강연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해 "여성의 존엄을 빼앗는 형언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며 "일본이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일본) 국민 대다수는 저희가 나빴다는 점을 잘 이해하고 있다. 한국 국민들도 이 점을 이해해 달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아흔살 노정객의 말을 이웃나라 젊은 정치인들이 새겨 들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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