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 3호선 도곡역 부근의 타워팰리스를 지나 양재천 길을 따라 200m쯤 내려가다 보면 멀리서도 한 번에 눈에 띄는 판자촌이 보인다. 나무로 벽과 지붕을 만들고 그 위에 보온을 위해 비닐과 천 등으로 단열재를 덧씌웠다. 곳곳에는 "죽음의 고리, 토지 변상금 철회하라, 멈춰버린 삶, 인간답게 살고 싶다" 등의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포이동 266번지.' 구획정리로 이제는 개포동으로 편입돼 포이동이란 이름은 공식문서에서는 사라졌다.
포이동 266번지
사람 한 명 겨우 다닐 수 있는 좁은 길이 얼키설키 아흔여섯 개의 판자집을 연결하고 있었다. 골목은 흙바닥이어서 비가 오면 진흙탕이 될 듯했다. 판자집들이 너무 다닥다닥 붙어 있어 판자촌 안에는 한낮임에도 햇빛이 잘 들지 않았다. 마을회관으로 쓰이는 포이동 대책위원회 사무실 옆에 위치한 유병관(가명) 씨 판자집 문을 여니 5평 규모의 어두침침한 실내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신발을 벗는 곳이 세면을 하는 곳이었다. 의외로 방안에는 고급 용품들이 즐비했다. LCD TV를 비롯해 고급 원목 식탁, 드럼 세탁기, 대형 냉장고, 침대 등.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강남 고급 아파트 등에서 나오는 고물을 수거해 판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간혹 이렇게 좋은 물건이 나오면 팔지 않고 직접 자신들이 쓰죠. 이곳에는 이렇게 좋은 물건들이 많이 나와요. 잘 사는 사람들은 참 이상해. 이렇게 멀쩡한 물건을 버리고… 쯧."
김용금(63) 씨는 주름진 얼굴로 연신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고 기자에게 말을 붙였다. 김 씨는 이 곳에서 산지 올해로 30년이 됐다. 김 씨는 "이곳에는 현재 96가구가 살고 있다"며 "전기나 수도요금은 공동으로 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씨는 "재래식 화장실 1개당 5~6가구가 이용하니 불편하다"며 "또한 판자집이 지어진지 오래돼 벌레들도 많다. 비가 오면 새는 곳도 있다"고 불편한 점을 말했다. 김 씨는 "하지만 지금은 그나마 처음 이곳에 올 때보다 나아졌다"고 웃었다. 김 씨는 "예전에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사방천지가 '뻘'이었다"며 "그래서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을 우리들끼리 우스갯소리로 하곤 했다"고 말했다.
사람 잡는 토지 변상금
김 씨가 처음 이 곳으로 온 건 1981년이다. 1979년 박정희 정권은 거리를 미화한다는 명분으로 길거리에서 넝마주이(돌아다니며 헌 종이, 빈병 따위 돈이 될 것들을 줍는 사람), 도시빈민, 부랑인 등을 모아 '자활근로대'를 만들었다. 이들은 서초동 정보사 뒷산에 차려진 시설에 강제 수용됐다. 김 씨도 포함됐다.
그러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1981년 지역주민의 민원으로 시설에 수용돼 있던 450명의 사람들이 10개 지역으로 분산·배치됐다. 김 씨는 당시 45명과 함께 이곳 포이동 266번지에 강제 이주됐다. (이후 1996년까지 다른 지역 철거민 36가구, 상이용사 18가구가 이사를 와 총 99가구가 뿌리를 내렸다.) 수도 등 제반 시설이 하나도 없는 곳에서 촛불을 켜놓고 비닐하우스에서 생활을 했다. 당시 강남 지역은 거의 논과 밭이었다.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 올림픽 때는 혐오감을 준다고 낮에는 외출조차 하지 못했다. 이들을 지키는 감독관, 즉 담당 경찰들이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처음 이 곳에 왔을 때는 판자집도 없었다. 공동으로 살던 비닐하우스가 삭아서 쓰러질 지경이 되자 판자 등을 구해와 판자집을 지었다. 생계는 빈병 등을 주워 파는 걸로 근근이 유지했다. 다른 곳으로 가려해도 여의치 않았다. 김용금 씨는 "사글세 방 하나 얻을 돈도 없는 상황에서 어디를 갈 수 있었겠냐"고 반문했다. 그렇게 이 곳에서 생활을 한지 10년째 되던 1990년께에 김 씨는 한 통의 고지서를 받았다. 요지는 정부의 토지를 무단으로 사용한 대가를 지불하라는 것, 토지 변상금 통지서였다. 하지만 이를 내기가 어려웠다. 변상금이 300만 원이나 했기 때문이었다. 낼 돈도, 의지도 없었다.
1989년 자활근로대는 해산됐다. 이 때 서울시는 공공부지 재활용과 도시 재정비 정책에 따라 토지구획정리를 하면서 기존에 이들이 살던 포이동 200-1번지를 포이동 266번지로 변경했고, "시 소유인 포이동 266번지를 불법점유했다"며 이들에게 국유지 무단점유 변상금을 낼 것을 요구했다. 정부에 의해 강제 이주돼 관리까지 받아온 이들이지만 시에서는 강제 이주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자활근로대 해산 이후부터 토지 변상금을 부과하고 있는 것이다.
김 씨의 경우, 지금까지 쌓인 변상금만 해도 7000만 원이 넘는다. 연 평균 20%의 연체이자는 뺀 금액이다. 김 씨는 "이 곳을 벗어나려 해도 변상금이 발목을 잡고 있다"고 말했다. 이 곳 세대주는 몇 년 전까지는 자기 명의로 통장도 만들지 못했다. 구청에서 변상금을 안 낸다는 이유로 세대주의 모든 재산에 압류를 걸어놨기 때문이다. 2010년 7월 기준으로 주민들에게 부과된 총 변상금은 23억6100만 원, 가산금은 14억4000만 원으로 총 38억100만 원이다.
조철순 포이동 대책위원회 위원장은 "구청에서는 변상금을 부과하면 우리가 나갈 줄 알았겠지만, 나가면 변상금으로 인한 가압류 때문에 사글세도 하나 구하지 못한다. 어디를 어떻게 가란 말인지 모르겠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이주해온 99가구 중 여태껏 단 3가구만이 이 곳을 빠져나간 이유다. 또한 주변으로부터의 개발 압력도 거세다. 이들이 뿌리 내린 지 30년 동안 강산은 변해 뻘이었던 이 곳은 금싸라기 땅이 됐다. 근처 개포4동은 개별공시지가만 3.3㎡에 1000만 원에 육박한다.
연이어 두 아들을 잃고 치매에 걸린 어머니
누군들 이런 곳에서 살고 싶어 할까. 주민들 모두들 벗어나고 싶어 했다. 살기 힘든 것은 둘째 치고 무엇보다 자신들의 자손들에게는 자신이 받았던 손가락질을 받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올해 서른한 살인 딸아이가 작년 12월에 결혼을 했어요. 쉽지가 않았죠. 아이는 학창시절 단 한 번도 집에 친구를 데려온 적이 없었어요. 부끄러워했던 거죠. 결혼 적령기에서도 남자를 만날 생각도 안 했어요. 포이동 출신이라는 자격지심 때문이었죠." 조 위원장은 "이런 건 비단 우리 아이만이 아니다"라며 "이곳에 있는 모든 아이들이 이 곳 출신인 걸 숨기려고 한다"고 말했다.
실제 포이동 인근 중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불과 300m도 되지 않는 거리를 굳이 멀리 돌아서 등교한다. 자신이 포이동 출신이라는 걸 들키기 싫어서다. 만약 자신이 포이동 출신이라는 걸 아이들이 알 경우, 거지라고 '왕따'를 당하기 일쑤다. 색안경을 끼고 이들을 바라보는 선생님도 있다고 한다. 그런 취급을 당하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부모의 마음은 찢어진다. 그래서 대부분의 집에서는 아이를 한 명 이상은 낳지 않았다고 한다. 김용금 씨도 올해 스물네 살 된 자식 하나다. 김 씨는 "마흔에 자식 하나 낳았다"며 "이런 생활을 하는 데 아이를 낳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가난을 물려주기도, 손가락질 당하는 걸 물려주기도 싫었기 때문이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자식을 떠나보내야 하는 부모도 있었다. 조 위원장도 마찬가지였다. 조 위원장이 처음 남편을 만났을 때는 남편이 '자활근로대'인 걸 속였다. 사실을 안 건 결혼한 지 6개월이 지나서였다. 하지만 남편이 착하고 인간성이 좋아 그냥 살았다. 직업에 귀천이 어디 있냐는 생각이었다. 포이동으로 결혼해 들어온 여자들은 대개 속아서 결혼을 했다고 한다. 조 위원장은 남편을 따라 포이동을 온 이듬해에 첫째 아이를 낳았다. 그때 생각한 건 아이를 위해서라도 어떻게 해서든 돈을 모아 이 곳을 빠져나와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다.
"악착같이 일을 했어요. 조그마한 공간에서 고물 집을 하면서 갓난아기였던 첫째 아이를 큰 플라스틱 양동이에 놓은 뒤 모기장을 덮어 두고 일을 했어요. 하나 밖에 없는 조그마한 형광등에는 셀 수 없는 파리와 모기떼들이 득실거렸죠. 약을 한 번 뿌리면 빗자루로 수북이 쓸어 담아야 할 정도였죠." 그렇게 악착같이 일을 했지만 산다는 건 쉽지 않았다. 개구쟁이였던 둘째 아이가 4살이 되던 해, 고물을 싣고 들어오던 차에 치여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조 위원장은 "그 때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진다"며 눈물을 닦았다.
이런 일이 조 위원장에게만 있던 건 아니다. 최근 간경화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에게는 한 명의 아들이 더 있었다. 병에 걸린 아들에게 변변한 치료 하나 받지 못하고 떠나보낸 것이 못내 마음이 아픈 어머니였다. 그런데 그런 것도 잠시, 하나 남은 아들 역시 간경화에 걸렸다. 치료만 받으면 살 수 있는 병인지라 어머니는 어떻게든 아들 치료비를 구하러 백방으로 돌아다녔다.
노쇠한 몸으로 무거운 리어카를 이끌고 폐품을 구하러 사방팔방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그런 노력은 허사였다. 아들은 변변한 치료 한 번 받지 못하고 먼저 간 아들을 따라갔다. 두 아들을 연이어 잃은 어머니는 충격으로 치매에 걸려 아직도 아들 병원비를 구하기 위해 리어카를 끌고 동네 곳곳을 누비고 있다고 했다.
또 다른 집의 경우, 아들이 스물여섯 살인데 덜컥 결핵에 걸렸다. 하지만 역시 치료 한 번 받지 못하고 병원에서 임종을 맞았다. 죽는 순간에도 아들은 혼자 남게 될 어머니가 걱정돼 병원에 어머니의 건강 진단을 부탁한 뒤 숨을 거뒀다. 병원에서는 죽은 아들의 소원이 안타까워 어머니의 건강 검진을 진행했다. 그 결과 어머니는 암 판정을 받았다.
건강세상네트워크가 2006년에 포이동 주민들을 조사한 결과 주민들 중 1년간 1일 이상 입원한 경험이 있는 경우가 27.3%(서울시민 평균 5.3%)인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주민 중 의료급여 수급자는 10.5%(서울시민 평균 1.3%), 건강보험, 의료급여 등의 건강보장책이 없는 경우도 10.5%(서울시민 건강보장 미가입자 0.7%)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외에도 조사대상자 중 67.4%가 의료비 부담으로 의료이용을 못한 적이 있다고 응답하기도 했다. 의료비 부담으로 병을 키운 경험이 있느냐는 물음에도 40.9%가 '한두 번 정도', 31.8%가 '3회 이상'이라고 응답했다. 조 위원장은 "여기 살고 있는 사람들 중 사연 없는 사람들은 없다"며 "다들 가슴 속에 아픔을 간직하고 살아간다"고 전했다.
권익위, 포이동 조사결과 5월 발표
아직도 이곳 주민 대부분은 타워팰리스 등에서 내놓은 폐품을 수거해 파는 돈으로 근근이 생활하고 있다. 일부는 강남 대형 식당 등에서 서빙을 하거나 사무실 청소 등을 하기도 한다. 하루 벌어 하루 살기도 빠듯하다.
현재 '포이동 266번지' 주민들은 토지변상금 철회와 점유권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강제이주를 시켜놓고 변상금을 내라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또한 30년을 이 곳에서 살았으니 계속 이 곳에서 살 수 있도록 법적으로 보장해달라는 것. 조 위원장은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은 서울시 소유"라며 "그래서 주택을 짓겠다느니, 주차장을 만들겠다는니, 그런 이야기가 늘 들려온다. 그럴 때면 언젠가는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주민들은 두려움에 떤다"고 말했다. 이들이 점유권을 주장하는 이유다.
과거에 비해 이들의 요구도 어느 정도 받아들여지는 눈치다. 지난 2월초 국민권익위원회가 서울시청, 강남구청 관계자와 이 곳을 방문해 주민들과 만났다. 그 자리에서 국민권익위원회는 주민들이 총회를 통해 토지변상금 철회 및 점유권 보장 등의 요구사항을 정해 다시 만나자고 했고 주민들은 2월 16일, 다시 포이동을 방문한 국민권익위원회 관계자에게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조 위원장은 "권익위에서 우리 문제를 조사 중이다"며 "오는 5월께 조사 결과가 나올 예정"이라고 말했다. 조 위원장은 "우리 역시 우리가 강제 이주 당했다는 증거와 자료 등을 찾아서 권익위에 제출한 상태"라며 "구청이나 시에서도 권익위에서 전향적인 결과가 나올 경우, 따르겠다고 했다"고 설명했다.
그간 서울시와 구청에서는 토지변상금과 점유권 인정을 두고 "선례가 없다", "(강제 이주 당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거부해왔었다. 조 위원장은 "우린 이 곳을 떠날 수도 없다"며 "권익위에서 부디 올바른 결정을 내려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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