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구로구 가리봉동. 북으로 구로공단 1단지와 남으로 2·3단지 사이에 위치한다. 과거 구로공단 노동자들은 '가리봉 수준'이라는 표현을 쓰곤 했다. 자신들의 거주지가 얼마큼 열악한지를 자조적으로 드러내는 단어였다. '강남 스타일'과는 정반대의, 누추하고 어딘가 형편없는 후진 동네라는 느낌. '가리봉 수준'과 함께 '라보때'라는 은어도 있었다. 흡사 외래어처럼 들리는 이 단어는 '라면으로 보통 때운다'는 뜻이다. 1970~80년대 구로지역 노동자들의 생활상을 잘 보여준다.
작가 신경숙의 소설인 <외딴 방>에서도 과거 구로공단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작가의 표현에 의하면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의 주인공은 16세 어린 여성이다. 구로공단에 취직해 노동 전선에 뛰어든 그녀는 37개 방이 다닥다닥 붙은 '벌집'에서 살았다. 반(半)자전적인 이 소설은 당시 산업 역군이라 불리던 어린 여공들의 삶이 결코 순탄치 않았음을 담담하게 전한다.
‘외딴 방’의 집합체인 벌집은 시간이 흐르며 다양한 형태로 활용됐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노동자들의 숙소였고, 그 이후에는 가출 청소년과 빈민층의 아지트였다. 그리고 현재는 조선족의 터전이 되었다.
벌집은 보통 2~3층 높이에 50~100평 정도 넓이의 양옥 주택이다. 겉으로 보면 '번듯'하나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서면 전혀 다른 모습이 펼쳐진다. 통로를 따라 양옆으로 방들이 늘어서 있고, 지상과 지하 각 층마다 10여 개의 방이 늘어져 있다. 방 내부에는 연탄아궁이와 수도꼭지가 있는 부엌이 있고, 부엌을 통과해 방문을 열면 두 사람이 눕기도 버거운 1.5~3평짜리 방이 하나가 나온다.
벌집의 평균 방 개수는 21.6개다. 당시 서울시 불량주택 지구의 방 개수(2.93개)나 가내 수공업 공장이 밀집한 창신동의 방 개수(3.91개), 일반주택의 방 개수(3.81개)와 비교하면 엄청난 숫자였다.
벌집 대부분은 무허가 증축됐다. 기존 주택을 불법 개조하거나 일반주택을 짓는 것처럼 건축 허가를 받은 뒤 실제로는 벌집 형태로 신축하였다. 그러다 보니, 정상적인 주택 기능을 할 수 없었다. 화장실은 층마다 하나씩 있는 경우가 허다했고, 대변기 1개의 평균 사용인수는 26명에 달했다. 아침이면 화장실을 쓰기 위해 몇십 분간 줄을 서고, 휴일에는 빨래 자리를 잡기 위해 몸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공단 벌집 ‘복지 사각’ 속 슬럼화 위기', 1990년 4월 11일, <경향신문>)
방음도 제대로 안 되어 두세 칸 너머의 방에서 텔레비전 소리도 들려왔다. 텔레비전 없이도 연속극 내용을 알 수 있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고, 친구와의 중요한 대화는 라디오를 크게 틀고 속삭여야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러한 주택 구조는 소유주가 한정된 공간에 최대한 많은 수의 방을 만듦으로써 이익 극대화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화장실, 목욕실, 정원과 같은 공유 시설이 많아지면 방 수가 적어지기 때문에 편의 시설을 최소한으로 제공한 것이다. 소유주에게 세입자의 쾌적함은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벌집이 만들어진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가리봉동의 위치적 특성과 가혹한 노동시간, 어린 여성 노동자들의 높은 비중이 일조한 듯하다.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을 자랑하였다. 하루 평균 12시간 근무와 2~3교대가 맞물려 돌아가는 구조여서, 밤늦은 시각 또는 새벽 이른 시각 출퇴근이 당연한 때였다. 그렇기에 가급적 근거리에서 출퇴근이 가능한 장소를 선호했을 것이다.
시각에 따라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고, 반드시 주거 환경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점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1970년대 집중적으로 형성되었던 벌집이 오늘날에도 그 형태가 고스란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서울이라는 도시의 역사를 보여주는 의미 있는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 가리봉동과 '벌집'에 관한 이야기가 다음 주 수요일에 계속됩니다. 김경민의 [도시 이야기]는 책 <리씽킹 서울-도시, 과거에서 미래를 보다>(김경민 지음, 서해문집 펴냄)으로도 출간되었습니다.
김경민의 도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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