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총선이 있었던 게 벌써 두 달 전이다. 그런데 아직도 누가 차기 권력의 주인이 될지 미확정이다. 지난 주말에야 총선에서 1, 2위를 기록한 두 정당, 기독교민주연합/기독교사회연합(기독교민주연합)과 사회민주당 사이에 연립 정부 구성 협상이 잠정 타결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국으로 치면 대선 치른 지 두 달이 다 돼서야 승자가 누구인지 최종 결정 날 것 같다는 이야기다.
총선 결과는 국내에도 떠들썩하게 보도된 바 있다. 3선을 노리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를 내세운 기독교민주연합이 정당 투표에서 41.5%를 득표했다. 우리에 비해 다당제라 할 수 있는 독일에서 40%를 득표했으니 양강 구도에서 박근혜 후보가 얻은 득표율 못지않은 결과다. 가히 '메르켈 바람'이라 할만 했다.
반면 사회민주당은 25.7% 득표에 그쳤다. 사회민주당은 이번 총선에서 나름대로 정권 교체를 기대했었다. 그래서 최저 임금제 도입(산별 노사 교섭으로 임금을 결정하는 전통이 강한 독일에는 놀랍게도 아직까지 전국적인 법정 최저 임금이 없다)과 주요 도시의 주택 임대료 통제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우며 야심찬 선거 운동을 펼쳤다. 이런 기대에 비하면 사회민주당의 성적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사실 넓은 의미의 좌파 정당들이 확보한 의석을 다 합치면, 기독교민주연합보다 더 많다. 이번 총선에서 3위를 한 좌파당이 있고, 간발의 차이로 제4당이 된 녹색당이 있다. 사회민주당에 이 두 당의 의석을 합치면 320석이다. 반면 기독교민주연합은 311석이다. 논리적으로만 따지면, 사회민주당-좌파당-녹색당 연립 정부가 들어설 수도 있는 상황이다. 독일 말고 스웨덴에서는 사회민주노동당이 실제로 스웨덴의 좌파당, 녹색당과 함께 내년 총선을 통해 이러한 적-적-녹 연정을 출범시키려 하고 있다.
그러나 오랜 분단의 역사 그리고 지난 몇 년 새 사회민주당의 상당수가 탈당해 좌파당에 합류한 일 등등으로 독일 좌파 정치도 속사정이 복잡하다. 그래서 적-적-녹 연정은 '논리적' 가능성으로만 남아 있다. 총선 결과가 나오고 나서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다른 카드는 전혀 고려도 않은 채 기독교민주연합과의 대연정 구성 협상에 매진했다. 기독교민주연합으로서도 자칫 이 협상에 실패한다면 선거를 다시 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에 1위를 차지했다고 해서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협상이 무려 두 달을 끈 것이다.
이유는 메르켈 측이 사회민주당 핵심 공약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 데 있었다. 사회민주당은 선거 운동 기간에 강조한 최저 임금제와 임대료 통제를 대연정 수립의 필수 조건으로 제시했고, 자본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기독교민주연합은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그렇게 서로 옥신각신하다가 결국은 며칠 전 합의안이 나왔다.
잠정 타결된 협정문에는 최저 임금제 도입도 있고 임대료 통제 실시도 있다. 그래서 사회민주당은 협상에서 승리했다고 자평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의혹의 목소리도 높다. 최저 임금제만 해도 2017년에나 실효를 갖는 것으로 합의돼 있다. 좌파당은 이렇게 되면 주요 기업들이 모두 다 법 적용에서 빠져나올 방안을 미리 마련해놓을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런 논란에 더해 한 가지 절차가 더 남아 있다. 사회민주당의 당원 총투표가 기다리고 있다. 사회민주당은 소수 지도자가 아니라 47만5000여 명에 달하는 당원들의 총투표로 대연정 참가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대연정안이 부결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관측이지만, 아무튼 정당 민주주의의 인상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이상이 최근 몇 달간 독일 민주주의가 보여준 모습이다. 이 시스템에서 '메르켈 바람' 같은 현상은 결코 절대적인 결정 요인이 될 수 없다. 메르켈의 당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더라도 이들이 일방적으로 권력을 쥐거나 행사할 수는 없다. 다른 정당을 지지한 유권자들의 분포가 어떤 식으로든 정권 수립 과정에 반영되어야 한다. 41%를 득표한 기독교민주연합이라도 실제 집권하자면 25% 득표한 사회민주당 핵심 공약을 일부라도 수용하지 않을 수 없고, 심지어는 메르켈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반대당들이 연합해 집권할 가능성이 늘 열려 있다.
어느 시스템이나 다 그런 것처럼 여기에도 장점만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실제로 지난 두 달간의 과정을 혹평하는 목소리도 꽤 있다. 선거에서 다수임을 확인한 세력에게 그에 걸맞은 권력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고, 정당 간 합의에 도달하는 과정의 지루함과 번잡함을 불평하는 견해도 있다. 저마다 일리는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내게는 단점보다는 장점이 훨씬 더 커 보인다. 적어도 한국의 민주주의와 비교해서는 그렇다. 독일에서 대연정 구성 협상이 벌어지던 바로 그 동안에 이 나라에서는 그와 정반대되는 일들이 벌어졌다. 독일에서 41% 득표 정당과 25% 득표 정당이 교섭을 진행할 때 이 땅에서는 절반의 득표로 집권한 정부가 나머지 절반의 국민들을 향해 전쟁을 벌였다. 독일에서는 승자의 지위를 확실히 보장하지 않는 게 장점이자 단점이라면, 여기에서는 최소한 절반의 국민이 철저한 패배자가 되어야 했다.
아니, 절반만 패배자가 아니다. 반대쪽 절반은 과연 승리했는가? 박근혜 정부가 51%의 지지를 얻어 집권했다지만 이들은 그 51%의 힘으로 자신의 공약을 관철할 생각이 없다. 오히려 51% 득표율 그리고 이후 그 수준 밑으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여론 조사 지지율에 기대어 공약을 하나 둘 폐기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총선 1위 정당이 후순위 정당들의 공약까지 받아 안아야 하는 처지이지만, 여기에서는 자기 공약조차 선거 끝나면 그만이다. 그 공약을 믿고 지지했다면, 분명 51%도 패배자다.
무엇이 이런 엄청난 차이를 낳았는가?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결정적인 것은 서로 다른 제도다. 독일은 내각 책임제이고, 우리는 대통령 중심제다. 개인이 아니라 정당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내각 책임제에서 정당 제도가 훨씬 더 발전하게 마련이다. 원내 과반수에 기반을 둔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정당 사이의 협상과 합의도 빈번하게 이뤄진다. 그런 합의가 없으면 비록 선거에서 최다 득표를 한 정당이라도 권력을 손에 쥘 수 없다. 합의는 필수다. 그렇기 때문에 배타적 승리의 폭도 좁은 만큼 철저한 패배의 가능성도 적다.
하지만 내각 책임제라고 다 독일 같은 것은 아니다. 같은 내각 책임제라도 영국의 경우는 다르다. 영국은 선거 제도가 우리와 같은 소선거구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각 선거구마다 뚜렷한 패배자들이 있다. 국회의원 당선자가 아닌 다른 후보에게 표를 던진 이들은 여기에서도 역시 패자들이다.
반면 독일은 정당 명부 비례 대표제다. 정당 투표에 따라 의석이 배분된다. 집권당이나 제1야당뿐만 아니라 좌파당, 녹색당에게 표를 던진 이들도 결코 배제의 대상이 아니다. 최소한 원내 비판 세력으로서 정확히 그 지지율만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고, 또한 이들의 대변자들에게도 협상에 참여할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대의 민주주의의 여러 제도들 중에 '선한' 제도와 '악한' 제도는 없다. 그러나 어떤 구체적인 상황에 좀 더 '필요한' 제도는 확실히 있다. 지금 한국 사회는 대통령 중심제-소선거구제 조합이 낳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 안에 갇혀 있다. 그렇다면 다른 무엇보다, 이런 상황에 들어맞는 처방이 절실히 필요한 게 아닐까? 적어도 제도적 차원에서 그 처방의 단서는 독일이 보여주는 내각 책임제-정당 명부 비례 대표제 조합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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