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자지라는 1996년 11월 개국한 카타르의 위성 텔레비전 방송이다. 알자지라의 탄생은 사우디 왕가와 BBC의 밀월 관계가 깨지면서 BBC 아랍 방송을 폐쇄한 데서 비롯됐다. 결국 갈 곳이 없어진 BBC 편집자들은 알자지라 방송에 대거 영입되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언론 자유에 대한 신념과 방송 스타일까지도 승계했다.
알자지라는 2001년 9월 11일 미국 테러 사건 이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과 오사마 빈 라덴의 테러 조직인 알카에다를 상대로 벌이는 '테러와의 전쟁'을 통해서 서방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오사마 빈 라덴의 건재를 과시한 테이프를 최초로 공개하면서 세계적인 방송으로 부상한 것이다.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방송을 지향하는 알자지라 뉴스의 모토는 '월드 뉴스, 로컬 뷰포인트'(World News, Local Viewpoint)로, 여기서 '로컬'(local)은 지역적인 의미 이외에도 서구에 대항하는 이슬람의 시각을 대변한다는 의미가 있다. 알자지라는 미국 주도의 서구 문명에 대항해 '이슬람의 정체성 확립'이라는 측면에서 방송을 하고 있다.
하지만 서구 언론들은 알자지라 방송이 9·11 테러 이후 알카에다에 편향되는 보도를 했다고 지적해 왔다. 알자지라가 이슬람권의 정서를 보도에 담아내면서 보도의 객관성 측면에서 역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알자지라 방송이 서구의 일방적인 보도 시각에 대해 일정한 반대급부 역할을 함으로써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종합 정보와 다각적인 시각을 제시해 줄 수 있었다는 긍정적인 의견 역시 적지 않다. 아울러 알자지라는 거침없는 보도로 뚜렷하게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면서 국내외에 독립성과 저항성을 갖춘 '아랍세계의 대변자'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데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 알자지라 아메리카 홈페이지 |
산 넘어 산, 우여곡절 많았던 개국 과정
알자지라 측에서 커런트TV를 인수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타임워너(Time Warner)' 케이블 사는 해당 채널을 자사 케이블 서비스에서 제외해버렸다. 이 때문에 타임워너 케이블 서비스를 통해 TV를 시청하는 1200만 가구에서는 알자지라 아메리카가 개국하더라도 그 채널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알자지라 아메리카의 방영 시작을 불과 몇 시간 앞두고, 미국 최대의 휴대전화 업체인 'AT&T'는 자체 유료 TV 망인 '유-버스(U-verse)'에서 해당 채널이 제외되었음을 알려왔다. 500만 명에 달하는 유-버스 소비자들 역시 이 채널을 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채널 자체를 삭제하지는 않은 다른 여러 케이블 회사들도, 시청자가 수백 달러에 달하는 요금을 추가로 내야만 알자지라 아메리카 채널을 볼 수 있도록 조정했다. 알자지라 아메리카 채널을 볼 수 없게 된 것은 미국의 케이블 방송 소비자들만은 아니었다. 케이블과 위성방송에 채널을 편성하는 조건으로, 알자지라는 (온라인 서비스인) 알자지라 영어 라이브 스트리밍 서비스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 사회에서 '알자지라'라는 채널의 이름은 중동국가의 방송이라고 인식된다. 미국인들 가운데 상당수는 여전히 중동 전체를 9.11 테러와 연관 짓고 있다. '알자지라 = 과거 오사마 빈 라덴의 메시지를 방송했던 곳'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블룸버그>는 알자지라가 '아랍의 봄'이나 시리아 사태 등을 보도하는 데 있어 치우침이 있다고 지적했고, 이집트에선 쫓겨난 모하메드 무르시 대통령을 명사 대우한 사례도 있다며 부정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다.
이런 시각을 그대로 반영하며 광고주들 역시 알자지라 아메리카 채널에 투자하기를 꺼리고 있다. 물론 알자지라 아메리카 측에서는 시간 당 약 6분의 광고만 틀겠다며, 다른 채널들보다 광고가 적다는 점을 강점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평균적으로 다른 뉴스 채널이 시간당 15분 광고를 하는 것에 비해 절반도 안 된다. 알자지라 측은 "광고가 뉴스를 방해하지 않도록 하겠다"지만, 반대로 이는 광고주들이 이 채널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것이기도 하다.
채널 편성권을 독점하고 있는 케이블사업자
문제는 대형 케이블 회사들과 같은 '게이트키퍼'들이 채널들에 대한 프로그램 제작자와 시청자 양측의 접근권 모두를 마음대로 제한할 수 있는 결정권을 독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알자지라 아메리카가 마주한 열악한 현실은 수많은 독립 제작자들이 이미 겪어왔다. 시청자들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AT&T, 타임워너 등을 비롯한 케이블 회사들의 심사를 통과해야 하는 실정이다. 이런 현실 때문에 방송의 공익적, 저널리즘적 성격보다는 상업적 이익이 우선시되거나, 다양한 채널과 콘텐츠가 TV로 진입하지 못하는 문제가 미국 현지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시청자 측면에서 보면, 이는 자유로워야 할 채널 선택권이 케이블 사업자에 의해 제한받는 문제가 될 수 있다. 언론 자유를 지향하는 '프리프레스(freepress.net)'는 우리가 "선택의 환상으로 점철된 시대를 살고 있다"며, 우리에게 기본으로 제공되는 수백 개의 케이블 채널들이 있지만, 정말 우리가 자유롭게 채널을 선택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한다. 덧붙여 "이것은 우리가 원하는 콘텐츠를 자유롭게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제공하는 콘텐츠만 볼 수 있게 된다는 뜻"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한국의 방송 시장도 다르지 않다
이처럼 알자지라 아메리카 개국과 함께 수면 위로 드러난 미국 방송시장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논란은 한국 방송 시장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바로 시청자의 채널선택권 문제다. 한국에서도 지역 케이블(종합유선방송, *SO: 케이블 TV 방송사업자. PP로부터 프로그램을 받아 일반 가정에 이를 공급하는 지역방송국. 한국에서는 관악케이블TV, 안양방송 등이 이에 속한다. 현재 전국 77개 구역에 119개의 SO가 있으며, 이 중 44개 구역이 독점 방송구역이다) 사업자가 일방적으로 일부 채널을 삭제하고는, 이를 이유로 계약 해지를 요구한 소비자에게 위약금을 청구하여 논란이 되는 등 SO의 일방적 채널편성권과 관련한 문제가 심심치 않게 발생해왔다.
반대로 우리나라 최초의 시청자참여프로그램 전문 채널(퍼블릭액세스 채널)인 RTV는 2005년 방송통신위원회 결정으로 의무송출 채널에서 제외되면서, 지금은 전국의 93개 지역 SO 중 단 28개와 위성방송 스카이라이프에서밖에 볼 수 없게 되는 일도 있었다. 한국 방송계도 프로그램 제작자 측과 시청자 사이를 이어주는 SO가 자의적인 판단으로 그 연결을 통제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SO 업체의 손익만을 기준으로 편성된 채널 때문에 시청자들이 선택권을 제한당할 수밖에 없는 문제는 한국, 미국 할 것 없이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에서는 존 매케인 상원의원이 제안하고 리처드 블러멘털 상원의원이 공동 후원한 '2013 텔레비전 소비자 자유 법안', 일명 '아 라 카르트'(A la carte, 메뉴판 방식)가 제기된 바 있다. 이 법안은 소비자들이 실제로 이용하는 채널에 대해서만 돈을 지불할 수 있도록 하여, 소비자들에게 진정한 선택권을 제공하는 동시에 더욱 유연한 채널 묶음 패키지를 이용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미국에서는 대기업이 여러 채널을 소유한 경우가 많은데(월트디즈니-ESPN, Viacom-MTV), 이런 경우 기업에서는 인기 있는 채널을 저렴하게 제공하는 대신 자사의 다른 채널을 시청자에게 끼워 팔도록 SO와 계약하는 경우가 많다. 매케인은 케이블 및 위성방송 사업자들이 기본채널로 개별 시청자들이 사용하지 않는 채널에 대해서도 부담을 지는 것과 더불어 이렇게 끼워 팔기를 하는 대형 프로그램 제작자들도 비판했다.)
한국에서도 최근 공정거래위원회가 '아 라 카르트' 방식을 차용한 '다채널 유료방송 제도개선 방안'과 더불어, 한 SO 업체가 특정 지역을 독점하는 방식을 금지하는 등의 개선안을 점진적으로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올 초 SO의 채널편성권 남용 규제에 대한 문제 제기가 국회에서 있었던 것을 시작으로 시청자들의 채널 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한 논의와 대책이 점차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셈이다.
아직은 앞길이 불투명한 TV의 자유
알자지라 아메리카의 미국 입성기는 현재 진행 중이다. <뉴욕타임스>의 브라이언 스텔러는 "900명의 직원 중 400명이 뉴스 작성실에 있다."며, "이는 현대 텔레비전 저널리즘에서 가장 의미 있는 투자"라고 밝혔다. 하지만 대형 케이블 사업자들의 외면으로 인해 극도로 제한된 수의 시청자들에 대한 접근권만을 확보한 채 시작하게 된 알자지라 아메리카의 앞날이 밝지만은 않다.
한국과 미국에서 대책으로 논의되고 있는 '아 라 카르트' 방식 역시 근본적 해결책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한계가 있다. 일단 법 시행 자체에 대해 SO 업체들은 물론이고 대형 프로그램 제작사 쪽에서도 반발이 만만치 않다. 여러 채널의 방송을 직접 만들고 있는 대기업에서는 SO와 계약할 때 자사의 인기 채널에 다른 채널을 끼워서 기본 채널로 하는, 소위 끼워 팔기 조건을 내걸곤 했는데, '아 라 카르트' 방식이 의무화되면 시청자가 채널 하나하나를 직접 선택하게 되기 때문에 이 편법이 불가능해진다.
또 이 법안이 그대로 시행된다면 SO 업체에서도 시청자들에게 어떤 채널을 기본으로 제공할지 결정 권한을 쥐고 있으면서 프로그램 제작자 측과 시청자들 양쪽에 행사해 온 영향력 내지 권력을 크게 잃게 된다. 이후 이 법안의 향방은 정부가 과연 시청자들의 채널 선택권 보장과 대형 PP(*고유 채널을 가지고,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SO에 공급하는 사업자. OCN, 투니버스를 소유한 '온미디어' 같은 업체를 일컫는다)와 SO 업체의 이익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
다양한 독립 프로그램의 제작환경 개선과 대안매체의 발전 등, 자유로운 언론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갈 길이 참 먼 듯하다. 이번 알자지라 아메리카의 개국에 대한 곱지 않은 미국 방송계의 대우에도 불구하고 이 채널이 시청자들의 선택을 받아 살아남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한국에서도 이로 인해 촉발된 채널 편성의 권력과 채널 선택권 등을 비롯하여, 언론 자유를 위한 다양한 이슈에 대해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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