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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전 욱일기, 쉬쉬한 게 패착이었다"

[최동호의 스포츠당] 축구협회, '정치력'을 발휘하라

2006 독일월드컵 개막 직전 취재차 들른 토고는 엉망이었다. 토고축구협회는 월드컵대표팀 훈련비를 횡령했고 대표선수들은 출전수당 지급 문제를 놓고 파업 중이었다. 부패에 염증을 느낀 독일출신 오토 피스터 감독은 돌연 사퇴를 선언하며 자취를 감추기도 했다. 토고는 부패한 독재국가였다. 토고축구협회장은 대통령의 동생이었고 정부 주요 관직은 대통령 일가친척의 몫이었다. 독일월드컵 G조 조별리그 한국과의 1차전에서 토고 응원단은 'FREE TOGO(자유 토고)'를 내걸었다. 'FREE TOGO'는 토고 민주화를 열망하는 외침이었다. 월드컵 그라운드에 던져진 정치적 메시지였다.

2004년 아시안컵 결승전은 전쟁 같은 분위기였다. 때마침 불거진 중국과 일본의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영토분쟁으로 중국내 반일 감정은 극에 달했다. 1만2000여 명의 공안요원이 배치된 베이징 노동자경기장에도 어김없이 '댜오위다오는 중국 땅'이란 플래카드가 등장했다. 중국 치우미(球迷. 열성 축구팬)들이 외친 구호는 짜요(加油. 힘내라)가 아니라 '일본 타도'였다. 치우미에겐 중국 대표팀의 승리가 중화의 승리였고 아시안컵은 중화민족주의의 대리전쟁이었다.

유럽축구도 이면은 추악하다. 올드 트래포드가 페어 플레이와 매너의 무대라고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스탠드의 열광은 응원뿐만이 아니다. 온갖 욕설, 인종 차별, 야유가 난무한다. 수만 관중의 혼연일체된 함성은 집단 광기의 폭력성을 띠기도 한다. 유럽 훌리건은 인터폴(국제형사경찰기구)이 요주의 인물을 특별 관리할 정도로 악명 높은 폭력집단이다. 말끔한 옷차림의 신사가 거친 욕설과 야유로 스스로의 존재감을 확인한다는 점에서 유럽의 축구장은 거대한 욕망의 배출구이기도 하다.

민족주의, 지역감정, 종교갈등은 축구의 역사다.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의 스페인 엘 클라시코 더비의 모태는 600여년 뿌리 깊은 카스티야와 카탈루냐의 지역감정이다. 라이벌 매치의 대명사인 셀틱과 레인저스의 스코틀랜드 올드 펌 더비 역시 구교와 신교의 대립, 스코틀랜드 원주민과 아일랜드 이주민간의 갈등이 만들어낸 대리전쟁이었다.

억눌린 욕망의 분출, 갈등과 대립 속에 빚어진 파괴욕구, 전투적 집단주의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인간의 악마적 본능이 없었다면 축구가 축구일 수 있었을까? 축구는 민족과 지역, 종교, 국가에서 비롯된 갈등과 대립을 경기장에서의 감정 분출로 담아내며 성장했다. 그래서 FIFA는 '경기장 내 정치행위 금지'를 규정했지만 적극적으로 적용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문제가 된 정치행위는 조사하되 문제되지 않는 정치행위는 방조한다. 축구가 인간을 어떻게 매혹하고 열광시켜왔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FIFA는 민족과 지역, 국가를 교묘히 활용하며 적절히 규제하는 것이다. 아벨란제 전 FIFA회장은 '축구는 권력이다'라고 말했다. 4년에 한 번씩 전 세계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FIFA는 이미 오래 전 축구를 권력과 자본으로 누릴 만큼 정치화했다.

▲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린 2013 동아시안컵 축구대회 한국 대 일본의 경기에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적힌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다. ⓒ연합뉴스

7월 28일 동아시안컵 한일전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플래카드 이후 축구협회는 바짝 쪼그라든 지질한 모습이었다. 갈등 해결의 주체로 나설 생각은 아예 없는 듯했다. 혹시라도 책잡힐까, 행여 설화를 당할까, 바짝 엎드린 모습이었다. '일본 측의 반응을 보고 대응하겠다'며 이도 저도 아닌 자세로 여론 회피에 급급했던 축구협회는 7월 31일에야 뒤늦은 성명을 발표했다. 뒷북이었다. 여론 주도는 고사하고 외교적 화법과 액션조차 안 되는 축구협회의 무능과 무감각에 '역시 공만 차던 사람들'이란 비난이 쏟아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정치와 정치력은 별개다. 축구협회는 정치력이 필요하다. 정치의 개입을 막는 정치력, 국민감정을 어루만지는 정치력, 한일전을 한일전답게 만드는 정치력은 곧 축구협회의 능력이기도 하다. 28일 한일전에 등장했던 욱일승천기는 강하게 문제제기를 했어야 했다. 욱일승천기를 비판해 들끓는 국민감정을 달래주고 일본과의 플래카드 갈등에서도 주도권을 잡았어야 했다. 때마침 호기였다. 아베정권의 잇따른 역사인식 망언으로 국제사회는 일본의 우경화를 우려하는 분위기였다. 일본축구협회로선 약점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축구협회는 욱일승천기 문제 제기가 또 다른 말썽의 시작인양 쉬쉬하며 덮는 분위기였다. 욱일승천기는 압박용만으로도 적절한 카드였다.

▲ 축구경기에서 일본 관중들의 '욱일승천기' 응원은 이번 동아시안컵 이전에도 U20 월드컵 등 여러 차례 국제 대회에서 문제가 됐던 적이 있다. 민주당 안민석 의원은 2012년 8월 일본의 욱일승천기 사용과 경기장내 반입금지를 위한 대응 촉구 결의안을 대표발의하며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었다. ⓒ연합뉴스

축구협회 관계자는 '일본축구협회도 문제가 크게 번지지 않길 원한다'고 말했다. 일본축구협회로선 명분과 실리를 모두 취한 셈이다. 공식적인 조사 요청과 항의로 일본 국민의 감정을 수용했고 동시에 물밑에서 확전 반대 의사를 밝히며 적정선에서의 마무리를 시사했다. 이것이 정치력이다. 대한축구협회가 욱일승천기 문제를 공세적으로 제기하며 국민감정을 어루만져주었다면, 붉은 악마 플래카드 갈등에서 오히려 욱일승천기를 쟁점화해 주도권을 잡았다면, 그러면서 물밑에서 일본축구협회와 소통하며 적정선을 합의했다면, 28일 한일전 여파는 한차례 일합을 겨룬 또 하나의 장외 한일전 명승부전으로 마무리됐을 것이다.

축구협회 부회장이 안타까운 얼굴로 인터뷰했다. "축구장에서 정치적인 응원은 자제했으면 좋겠습니다." 축구 밖에 모르는 얘기다. 정치적인 응원이었다고? 그렇다면 민족감정을 빼야하나? 역사의식을 지워버려야 하나? 그러고도 한일전이 한일전이길 바라십니까? 묻고 싶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문구가 그렇게 정치적이었습니까? 정치적이라고 문제 제기하면 다 정치적으로 돼버리는 겁니까? 동아시안컵 한일전은 장외경기에서도 한국이 완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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