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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유머

[남재희 칼럼] 유머는 독재체제, 민주체제와 관련있다

오래 전, 내가 노동부를 맡고 있을 때의 일이다. 당시 민자당의 대표위원이던 김종필 씨가 여의도 당사로 와서 당면 노동정책에 관해 브리핑을 하라고 하였다. 대충 민주노총(당시는 전노협이었다)의 합법화 여부 문제일 것이라 짐작은 하고 과장 한 명을 데리고 갔다.

노동부 업무 전반을 설명했는데 역시 그 민주노총 합법화 문제에 걸렸다.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이냐는 반응이다.

좀 딱딱한 성격인 나는 그때 어쩌다가 기지를 발휘하여 미국의 유머 하나를 소개하였다. 존슨 대통령이 반대파 인물 하나를 중용하려하자 옆의 참모가 그 사람은 반대파의 말썽꾸러기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자 존슨, "그 말썽꾸러기를 텐트 밖에 놓아두면 계속 텐트 안을 향해 오줌을 갈길게 아닌가, 텐트 안에 넣어야 오줌을 갈겨도 밖으로 향할 것이고…."

나는 민주노총 합법화 필요성을 그런 식으로 말했다. 같이 갔던 과장은 관료사회에서는 듣기에 황당한 설명이고 재미가 있었던지 두고두고 그 이야기를 했다. 김종필 씨는 역시 노련하고 현명한 정치인이기에 당장의 반론은 제기하지 않고, 며칠 후 한국노총 간부 10명쯤을 초청하여 한 턱 내는 자리에 나를 불러 "잘 봐줘유."

얼마 전에 박정희 정당을 같이 했던 사람을 우연히 만났더니 "이번 선거에선 그 분을 밀어주어야 할 게 아니겠느냐"고 했다. 나는 좀 냉담하게 "우리도 이북처럼 무조건 대를 이어 충성하기…." 운운 해버렸다. 그 사람은 슬그머니 사라진다.

앞의 것이 흔히 이야기하는 유머라면 뒤의 것은 서양권에서 말하는 black humor(냉소적 유머)일 것이다.

최근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나왔다. 미국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는 아들 부시 대통령이 공식석상에서는 별로인데 사석에서는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재치가 넘친다"는 의견이다. 그는 부시에게 "당신의 공식 스크립트(보도문안)는 포르노 영화에서 섹스 장면을 들어낸 것과 같다"고 말했다고 밝힌다. "재미있는 부분은 다 빠져있기 때문"이라는 설명. '섹스 장면을 들어내버린 포르노 영화'. 유머러스하다.

또 한 가지. 최근의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사르코지 후보가 올랑드 후보를 "각설탕은 단단해 보이지만 물에 넣는 순간 녹아버린다"면서 그를 우유부단한 정치인으로 비판한 것도 유머를 사용한 것이다.

김두관 경남도지사
얼마 전 김두관 지사에 관한 인물평을 써 달라는 청탁을 받고 선뜻 응했다. 남해의 이장 출신으로 군수·장관을 거쳐 도지사를 하고 있는 그의 밑바닥부터의 인생에 관심이 가서이다.

그래서 후배 기자들에게 이리저리 떠 보았더니 문재인 씨의 세련된 도시적 감각·유머에 비해 김두관 씨는 농촌에서 오래 살아서인지 그 감각·유머가 둔중하고 농촌적이라는 반응이다. "돌절구를 옮기는 듯 한 사람"이라는 표현도 나왔다.

그런 사연이 있어 정치와 유머와의 관계에 관해 얼마동안 생각을 거듭하고 이리저리 살펴보고 글을 쓰기에 이른 것이다.

요즘은 시대가 너무나도 달라지고 있다. 정치가 오락화하고 있다면 지나친 표현이겠지만, 정치와 오락의 경계가 허물어져가고 있다. 전에 정치를 할 적에 후보 인물사진은 정장을 차려 입고(물론 넥타이도 매고) 엄숙한 표정으로 찍었었는데 그 후에는 캐주얼을 입는 것이 많게 되고 운동복도 입고 찍는다. 경파에서 연파로 옮겼다.

'나꼼수'가 인기다. 그래서 그 중 한 멤버가 서울에서 후보로 발탁되었다가 말실수가 문제되어 떨어지기도 하였다. 미국의 <뉴욕타임스>까지 '나꼼수'를 긴 기사로 소개했다. 거기에 보면 "픽션과 논픽션이, 논평(commentary)과 코미디(comedy)의 경계가 애매해지고 있다"는 한국 언론의 인용도 나온다.

한국의 한 심리학 교수는 좋은 분석을 하였다. "나꼼수를 통해 대중은 이제 우리 사회의 정치권력이 만들어내는 허위와 위선이 무엇인지를 욕설과 유머로 즐기는 상황이 되었다. 아니, 웃으면서 진지하고 무거운 정치, 사회문제에 참여하는 경험을 하기 시작했다."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시대의 정치를 놓고는 여러 가지 해석이나 주장들이 많다. 혼미, 혼란…. 그런 상태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에서는 보수적이어서 그런지 정통 언론(종이신문, TV, 인터넷 신문까지)의 역할을 계속 중시하는 입장이다. 아무리 SNS 시대라고 하더라도 '레일'은 정통언론이 깔아주는 것 아닐까 하는 것이다. 가령 가장 중요한 정치, 경제, 사회적 이슈의 논쟁점들에 관한한 그 승패는 결국 정통언론에서 판가름이 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다.

1968년 초에 주일 미국대사를 지낸 하버드 대학 라이샤워 교수가 미국 기자들과 간담을 하는 자리에 함께 한 일이 있었다. 그때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이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 뛰어들어 화제가 되고 있었다. 라이샤워 교수는 로버트 케네디의 열성적 지지자로 알려져, 기자들은 왜 그가 로버트를 지지하는지 물었다. 나는 그럴듯한 설명이 나오리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답변은 뜻밖에도 간단했다.

"센스 오브 휴머(sense of humor)가 있어서 이지요." 모두들 그 한 마디로 만족하고 그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humor를 휴머로 발음하는데 우리는 유머로 표기한다)

유머 감각. 그것이 무어가 그리 중요하기에 막중한 대통령직을 놓고서의 경쟁에 그 한 마디로 답변을 대신할 수 있을까. 나는 계속 이 점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서양인(특히 미국인)의 감각으로는 몰라도 한국인의 감각으로는 참 그 오묘한 이치를 터득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나중에 여러 책이나 논문에서 보니 이 유머감각이 있고 없고가 전체주의 독재체제나 민주주의체제에도 관련이 있다는 서술도 있다)

미국의 한 원로 언론인이 영국에서 온 젊은 언론인을 지칭하면서 'gentleman from once Great Britain'이라고 살짝 놀리는 것을 겪은 적이 있는데 the의 자리에 once라는 단어 하나를 바꾸어 넣어 재치있는 유머가 되었다. 젊은 영국기자도 웃음을 머금고….

미국 이야기 하나 더. 1968년 무렵 하버드 대학의 하버드 칼리지의 학장보에 아치 엡스(Archie Epps)라는 사람이 있었다. 미국에서는 흑인(negro)이란 말을 되도록 피하고 유색인종(colored people), 애프로·아메리칸(afro-american)이라 한다. 그는 맬컴 X(Malcolm X)의 하바드에서의 연설문을 편집하여 책으로 내기도 한 인물이다. 나하고는 접촉할 기회가 많아 친밀해졌다.

크리스마스 얼마 전의 어느 날 하버드 야드에서 마주치니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인사를 건네 오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기독교 신자냐고 우선 묻는다. "아니오." 그러자 불교신자냐고, "아니오". 이어 유교신자냐고, "아니오." 그는 놀랐다는 듯이 "미스터 남, 여기 동부는 리버럴하니까 괜찮은데 중서부나 남부에 여행 가서는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말고 조심하라"고 주의를 준다. 주민들이 수사기관에 신고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의 나라에서 그게 웬 말이냐고 하니 주화를 꺼내더니 "In God we trust"라고 쓰여 있는 것을 가리킨다.

내가 "당신은 신을 믿느냐"고 되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미소를 지으며 "I believe in X-mas." 의식으로서의 종교를 생활화하고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 신자들은 우리나라에도 있다. 그리고 그 표현은 유머러스하다.

광주 출신 한 분이 어느 파티장에 무등산 수박을 잔뜩 선물이라고 갖고 왔는데 갈라보니 속이 희였다. 그의 말이 걸작. "수박을 보내라고 했더니 전화 사정이 나빠서 박을 보내라는 것으로 잘못 알고…." 모두 웃었다.

나도 유머 감각이 없는, 말하자면 '독일 병정' 스타일이다. 얼마 전 유머 감각이 특출한 전 경향신문 논설고문 이광훈 씨를 위한 추모문집이 나와 거기에 회고담이 많이 실렸다. 유머감각의 정체가 어떤 것인가 하고 주의를 기울이며 읽어보았다.

약간 학문적으로 풀이한 한 언론인은 "해학은 기지(機智)처럼 말끝이 날카롭지 않으며, 풍자(諷刺)처럼 남을 쏘는 화살이 들어있지 않아, 해학은 풍자나 기지에 비해 건강하고 부드럽다"며 "은근한 해학으로 도덕적 엄격주의의 숨통을 틀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럴듯한 해석이다. 이 해석도 확대한다면 앞서 말한 전체주의·민주주의론에까지 갈수도 있을 것이다. 전체주의 독재체제는 대개가 도덕적 엄격주의를 따르고 있다.

또 다른 언론인은 "문어체(文語體)의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어딘지 거리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는 언제 만나도 편안한 구어체(口語體)로, 때로는 통속어를 섞여가며 구수한 대화를 엮어갔다"고 했는데 이것도 유머감각의 중요한 측면을 잡은 것 같다.

서양 사람들이 유머를 설명한 글들을 살펴보니 이런 구절이 있다. "아주 완벽한 유머나 비꼬기(irony)는 대개가 무의식인 채 이루어진다." 그래서 듣고 나서 미소 짓고는 곧 잊어버리게 되는가 보다. 심각하지 않고 가볍다.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싱거운 이야기다.

유머는 시간과 장소가 중요하다. '나꼼수'나 '나가수' 시대의 유머는 그 전의 유머와 다르다. 미국 사람들의 유머는 대개가 한국 사람들을 위해 번역할 수가 없다. 그 나라, 그 나라의 정신 풍토라 할까. 유행을 타기 때문이다. 그 사회의 재담, 만화, 연극, 영화, 대중가요… 모든 것이 섞인 배경에서 유머가 나오기에 다른 문화의 사람들에게는 통하기가 어렵다. 유머는 문화에 따라 다르다.

학술적으로는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이, <웃음>이라는 책으로도 유명하다는 이야기까지도 해야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 가운데 웃는 것은 사람뿐이라고 했다는데 그럴듯하기도 하지만 연구가 없어 잘 모르겠다. 혹시 원숭이는 자기들끼리의 웃음이 있는 게 아닌지. 또한 개는 어떤가. 웃음은 전염이 된다 할까 곧바로 전파된다. 웃음은 같이 웃게 되는 것이기에 그것을 '공범(共犯) 현상'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웃음은 '교정(矯正) 수단'도 된다고 한다. 가벼운 잘못은 웃음으로 고친다는 뜻인데 건전한 사회를 위해서 참 좋은 일이다.

농촌에는 농촌 나름의 유머가 있다. 나도 농촌 지방에서 살면서 농촌의 유머를 많이 듣고 즐거워했다. 비행기가 농촌 상공을 자주 지나가니까 한 중년 농부는 "아마 고지를 많이 먹은 모양이여! 저렇게 부지런히 다니게." 하고 익살을 떨어 사람을 웃긴다. 도시 사람은 잘 모를 것이다. 춘궁기에 양식을 빌려서 먹고 농사철에 품으로(노동으로) 갚는 것이 고지다.

그러나 지금 농촌은 급속히 줄어들고 있고 도시화는 엄청나게 진행되고 있다. 또한, SNS가 아니더라도 TV의 보급으로 문화도 전국이 거의 균질화 되었다.

이제 현대적, 도시감각의 유머가 필요할 때다. 농어촌에서 통용하던 유머는 잘 안 통하게 되었다. 농어촌 출신인 김두관 씨는 이런 유머를 남겼다 한다. "내가 뚱뚱해 보입니까. 나는 두관(斗官 = 二貫)입니다. 날씬합니다." 괜찮은 유머다.

전날에 국회의장을 지낸 이효상(李孝祥) 씨는 무슨 병을 앓아서인지 얼굴이 붉은데다가 흰색의 반점이 섞여있어 사람들이 '총천연색', '아파치'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그가 연단에 서서 한 익살. "내가 나타나면 사람들이 '아버지','아버지' 캅데다." '아파치'라는 욕을 '아버지'로 역전시킨 재치있는 유머감각이다. 그는 정치인이기에 앞서 시인·철학자였다.

마지막으로 내가 선거 때 당한 에피소드. 중년 여성들이 많이 모인 곳으로 가서 인사를 하고 몇 마디의 정책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어머님들, 처음 보니 인상이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담대한 여성이 "찐빵같구료" 한다. 한 방 먹었다. 그러나 후퇴하여서는 안 된다. "맞습니다. 찐빵 최희준 씨가 바로 저와 대학 동기동창입니다." 와르르 웃는다. "어머님들 찐빵 최희준 씨야말로 내가 기억하는 훌륭한 철학자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인생이 무어냐 하는, 잊을 수 없는 진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가 공자·맹자를 배우고 소크라테스·플라톤을 배웠어도 지금 기억나는 게 있습니까. 그런데 최희준 철학자야말로 우리에게 인생은…."

"아, 인생은 나그네길…." 일동 손뼉을 치며 나에게 한 곡 부탁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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